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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추적 역사

2019.11.28 06:50

관리자 조회 수:4

신화추적1.

인류를 검색하면

인류와 유인원과의 분기점은 1000만년 전의 라마피테쿠스(Ramapithecus), 이를 인류적 특징을 갖춘 선행 인류라고 부른다. 300만년~100만년 전에는 남부 및 동부 아프리카에 분포하였던 원인(猿人)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류가 있었음이 알려지고, 자바 원인이나 북경 원인(Pithecanthropus, Sinanthropus라 명명했지만 현재는 현생 인류와 같은 속으로서 Homo erectus라고 부른다.), 네안데르탈인(현재에는 Homo sapiens의 변종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의 순서로 나타나 현생 인류로 이어지고 있다. 크로마뇽 인, 그리말디 인은 화석의 현생 인류이다.

 

현생 인류는 코카소이드(백색형, 유럽형)와 니그로이드(흑색형), 몽골로이드(황색형)3대 인종군으로 대별되나, 각 인종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고 계통적으로 단일한 것인지도 계속 의문시되고 있다. 인류는 여러 차례의 진화 단계에서 지역적으로 나뉘어 평행적으로 진화하였다고 하는 설이 있으며 분기 이후의 혼혈도 많이 발생할 수 있다. 출처:네이버

 

60만년 전 한반도에 자바 원인이나 북경 원인(Homo erectus)이 살았는데 현생 인류(Homo sapiens)가 북방에서 내려와 점유했다고 한다. 대체로 마지막빙하기 시점으로 온화한 기후와 먹이의 이동에 따라 자연적으로 남하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제주도 발자국화석), 구석기유물을 남기고 있다.

 

그 호모사피엔스가 토착민이라면, 신화에 나오는 환인 환웅 그리고 박혁거세 김알지 김수로 등은 외지에서 우월한 문명을 가지고 이동해온 비토착민 이라고 추정 할 수가 있다.

 

필자는 한국의 문헌과 발굴된 유물을 중심으로 하는 글 [1]“홍산문화가 인류문명을.... , [2] 언어학적고찰로 보는 수메르 인이 세계 4대 고대 문명을 창건했다.” [3] 종교적 고찰로 보는 “[3]인류 역사의 회고 1 : 이집트인, 수메르인, 바벨론인들을 비교해보면서 향후 이런 논점이 어느 하나로 통일되기를 바란다. 이일은 우리민족이 풀어야 할 숙제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홍산문명의 주역이 한겨레(한민족, 거란 여진 말갈 몽골...)라면 현재 국가를 유지하고 있고 과거역사와 전통 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민족은 유일하게 우리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북한도 단군의 자손으로 '제세이민' '홍익인간'의 정신을 계승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하고 힘을 모아야 할일이지 않겠는가? 지금의 그 방식으로 가능할까?

 

[1] 홍산문화

* 사진및 지도(그림)생략

1. 환웅시대 개설

2. 신시 아사달의 고증

3. 홍산 유적지

4. 홍산문화의 특징

환웅은 기마 목축 민족으로서 태양을 숭상하고 각종 새를 숭상하며, 또한 구려문화의 전통가치인 용과 거북 등을 숭상했다.

 

태양에 사는 새인 삼족오三足烏(태양 흑점의 형상)와 부엉이나 매 등 여러 새를 숭상했는데 새를 영혼의 전령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제 용으로 대표되는 토착적 물의 문화와, 새로 유입되었던 태양의 문화, 불의 문화가 융화되어지는 것이 환웅시대다.

 

1. 환웅시대 개설

고고학계에서는 홍산문화를 대략 bc3500년부터라고 알려져왔는데, 우리나라 고기록에 의하여 단군시대와 환웅시대를 더하면 bc3898년이 된다.

 

안함로의 <삼성기三聖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환웅씨는 천신의 부름을 받들어 백산, 흑수지간에 내려와 천평에 자정여정을 뚫고 청구 땅에 궁지를 구획하였다...나라 이름을 배달이라 하고 신시에 도읍하였다. 桓雄氏 繼興 奉天神之詔 降于 白山 黑水之間 鑿子井女井於天坪 劃井地 於靑邱. .......立都神市 國號倍達

 

<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삼성기>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배달은 환웅이 정한 나라 이름이고 도읍은 신시다. 뒤에 청구국으로 수도를 옮겨 181565년을 누렸다. 倍達 桓雄定有天下之號也 其所都曰神市 後徙靑邱國 傳十八世 歷一千五百六十五年

 

1세 환웅은 거발한居發桓, 2세 환웅은 거불리居佛理, 3세 환웅은 우야고右耶古, 4세 환웅은 모사라慕士羅, 5세 환웅은 태우의太虞儀, 6세 환웅은 다의발多儀發 , 7세 환웅은 거련居連, 8세 환웅은 안부련安夫連, 9세 환웅은 양운養雲, 10세 환웅은 갈고曷古 또는 독로한獨盧韓, 11세 환웅은 거야발居耶發, 12세 환웅은 주무신州武愼, 13세 환웅은 사와라斯瓦羅, 14세 환웅은 자오지慈烏支 또는 치우蚩尤, 청구국으로 옮겼다. 徒都靑邱國, 15세 환웅은 치액특蚩額特, 16세 환웅은 축다세祝多世, 17세 환웅은 혁다세赫多世, 18세 환웅은 거불단居弗檀 등이다.

 

안함로의 <삼성기><신시역대기>로 보면 1세 환웅은 먼저 백산과 흑수 사이의 청구에 내려와 천평에 도읍하고, 환인국을 점령하여 신시에서 개천하고, 그후 다시 청구로 되돌아와 18세를 전하였다. 15세 치우환웅에 이르러서는 청구국이라는 이름으로 산동반도 용산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따라서 환웅 18분 중에 4분은 중국에 있게 된다.

 

환웅이 3000인을 거느리고 서요하로 들어와서는 가장 높은 산 위에 올라서 사방을 둘러 보았을 것이다. 이 홍산문화권에서 가장 높은 산은 난하灤河와 서요하西遼河의 북쪽 가지가 발원하는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으로서 높이는 2067m.

 

서쪽으로 나가는 난하 이외에도 대광정자산에서 북쪽으로 서요하의 가지인 백분하百汾河가 발원하여 케스케덴克什克腾旗을 지나고, 대광정자산에서 동쪽으로는 등롱하燈籠河가 발원하여 옹고트翁牛特旗를 지나고, 동남쪽으로는 음하陰河가 발원하여 적봉시 홍산紅山을 지나는데, 난하를 뺀 나머지 모두는 다시 동북방으로 흘러들어 모여서 옹고트를 남과 북으로 각각 지나면 서요하로 합친다.

 

[요사지리지고遼史地理志考]에 의하면 옛 요락수饒樂水인 지금의 영금하英金河가 하북성 위장(圍場 =하북성 위장현)의 도태산都呼岱山에서 나온다고 하였으니 도태산이 곧 대광정자산이고 환웅의 태백산이다. 도태산徒太山을 태백산太白山, 또는 불함산不咸山이라고도 하였다.

 

<삼한관경본기三韓觀境本紀>에서 태백산太白山은 비서갑斐西岬의 경계에 있다고 하였다. 또 대일왕大日王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인데 천왕이 순수하던 곳이라고 하였다. 그후 웅녀군熊女君이 세습하였다고 하였다. 대일왕大日王은 웅녀군과 대비되는데 대일왕을 지명으로 찾아보면 오늘날의 대일한산(大日罕-, 達爾汗山)을 의미한다. 케스케덴 서부 지역 달라이누얼, 즉 달일호수達爾湖水변의 화산火山이다. dalihu라고도 한다.

 

태백산 비서갑은 대일왕의 대일한산이고, 달리호수에 의해서 비서갑의 하백여신河伯女神이 있었다.

 

백두산은 bc 180년 전후에 폭발하여 오늘 같은 칼데라 호수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의 백두산 칼데라 호수는 서기 1000년 전후에 만들어졌고 발해 멸망 원인과도 관련없다. 환인, 환웅, 단군 시대 백두산은 역사의 변방이다. 2세기에 기록된 [산해경山海經]에서 대황북경大荒北經 중에 숙신국肅慎氏之國에는 불함산不咸山이 있다고 하였다. 숙신씨는 천산에서 bc2300년경에 장춘으로 이동하였고 그때 불함산이라는 이름도 같이 옮긴 것이다.

 

환웅의 첫 수도는 백산白山과 흑수黑水 사이에 있었다고 하는데, 백산은 대광정자산이었고 흑수는 지금의 노합하老哈河로서 마우산馬盂山(=1729m)에서 발원한다. 마우산은 옛 우이산隅夷山이면서 고대에는 흑산黑山이어서 흑수黑水라고 하였을 것이다. 흑수는 뒤에 도하都河와 토하土河를 거쳐 노로하老魯河라고 불리게 되는데 노로하는 나라하, 즉 낙랑하에서 비롯된 말이다. 환웅의 배달국은 백산의 물과 흑산의 물이 만나는 적봉시 동북에 있었던 것이다.

 

적봉시 홍산紅山의 동북쪽 동팔가석성東八家石城은 신석기시대에 출현한 석성石城으로서 남북이 160m, 동서가 140m인데 불규칙한 장방형 모양이다.

 

적봉시 녕성현에서는 팔가八家를 몽고말로 보리가布日嘎라고 이중으로 표기했다. 즉 팔가는 팔씨네 집이 아니고 보리가의 음독을 비교하여서 발가라는 우리말의 차음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석성의 석까지 당겨서 읽으면 발가달성이 된다. 즉 밝달성, 배달성이다.

 

주위에는 신정新井, 상정上井, 삼안정三眼井, 동삼안정東三眼井, 동신정東新井 이도정二道井 삼도정三道井 사도정四道井 등 정자 지명이 매우 많으니, 환웅은 이곳에 정착하기 위하여 우물을 중심으로 정착촌을 만들어 자정子井, 여정女井 등을 획정劃井하고 3000인을 살게 한 것이다.

 

물이 성읍 건설의 중심이 되는 것은 확실하게 농업 위주 문명 시대인 것을 의미한다.

 

동팔가석성을 지나는 물이름은 대광정자산의 음하陰河에서 비롯되는 영금하英金河. 음하나 영금하는 둘 다 우리말 임금과 관련되는 임금하의 차자다. 음하를 중국 발음대로 인하로 읽으면 인금하의 인하가 되는 것이다. 음하 상류 삼좌점三座店 부근에 청동기 시대 석성이 20여좌, 왕가점王家店 부근에 5, 초두랑진初頭郞鎭 부근에 12개좌 석성이 있다. 그중에 지가영자池家營子 석성이 최대의 원형석성으로서 면적이 약 10.(지름 350m?)

 

영금하를 후대에는 요락수饒樂水라고도 하고 또 낙수樂水라고도 했다.

 

적봉시 북쪽 영금하 변에는 지주산蜘蛛山이라는 홍산문화 유적지도 있다. 지주산은 우리말로 거미산이고 이는 고미산, 곰의산, 즉 곰산이 어원이다. 부여어 계통인 일본말로는 신가미라서 고미산을 신산神山으로 볼 수 있다. 곰산의 또다른 차자는 금산金山이다. 백제 웅진성의 곰강이 금강錦江으로 쓰인 것이다. 영금산은 즉 잉곰산이었다. 영금하의 또다른 상류 가지는 고도하古都河라고 한다. 즉 영금하, 임금하와 마찬가지로 도하都河 역시 영금하가 고대 도읍지의 물인 것을 의미한다. 도하都河가 후에 토하土河로 바뀌었다.

 

고도하古都河 부근 서도촌西道村 강변에 고구려 성의 특징인 점장대点將臺 유적이 외롭게 남아있다. 그 서쪽에는 판축토성版築土城인 송주성松州城(1000m x 500m)이 남아있다. 당나라가 거란에 설치했던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가 있던 곳이다. 그래서 이 도하都河는 송강松江, 또는 송산하松山河라고도 불렀다.

 

적봉 남쪽에 팔리포八里浦가 있는데, 적봉이나 홍산은 우리말로 붉은달이며 밝달이고, 팔리포는 밝성포로 고려된다. 적봉 동쪽의 우미려하 동고성에도 고구려 성의 흔적인 점장대가 남아 있다.

 

서요하의 남쪽 발원지인 흑리하黑里河(=노하老河의 최상류)가 흐르는 영성현寧城縣 팔리한진八里罕鎭의 팔리한하八里罕河를 보면 팔리한은 발한發桓의 차음借音이다. 간혹 파이한巴爾罕으로도 기록하니 역시 발한의 차음이다. (팔리의 리를 앞글자의 받침으로 보는 것은 <단군세기> 23세단군 아홀阿忽 기록에서 몽골을 몽고리蒙古里로 기록한 것이나 똑같은 경우다. 비서갑 달리한성의 리도 마찬가지다.)

 

1세 환웅의 이름이 거발한居發桓인데,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이 고국천에 묻힌 것처럼 거발한 환웅은 발한하發桓河, 즉 팔리한하에 묻혔을 것이다. 즉 발한성에 묻힌 것인데 이는 영성현의 남산근 유적지와 관련된다.

 

환웅시대 첫 도읍 청구국 천평성인 동팔가달성과 거발한 환웅이 묻힌 팔리한진 발한성의 거리는 120km내외다.

 

종합하면 환웅 세력은 천산의 신시로부터 태백산의 청구 땅 배달국으로 내려온 세력이며 예족을 구축하고 웅족으로 대신하였다. 마늘과 쑥으로 은유되는 대기근이 웅족의 남진을 초래하였을 것인데, 배서갑은 해발 1000m의 고지고, 적봉은 해발 500m 정도다.

 

2. 신시 아사달의 고증

배달국 신시 아사달은 단군 왕검이 조선을 세워 천제와 즉위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서 신인 왕검王儉800명과 함께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阿斯達의 단목지허檀木之墟로 와서 국인들의 추대로 천제가 되었다.

 

[삼국유사]에서 단군 수도는 백주白州 무엽산無葉山이라고 했다.

 

극시극등기克什克腾旗(=케스케덴)의 아시하도阿斯哈图(=2029m)는 흥안령산맥의 남쪽 최고 봉우리로서 과거에 목엽산木葉山이라 불렀다.

 

또한 아로과이심기阿魯科爾沁旗 동남쪽 천산진의 천산天山(=685m, )도 요나라때 목엽산이었다.

 

물론 단군 왕검의 수도였던 요녕성 창무彰武시 위가자 아래에도 무엽산葉茂臺의 흔적인 엽무대가 있다.

 

[단기고사]에서 3세 단군 가륵嘉勒이 동생 가록嘉祿을 신시 아사달에 책봉하고, 사달왕斯達王이라고 불렀다. 이후 진번후眞番候라고도 하였다.

 

왕검의 손자 가록왕으로 비롯되는 가록산嘉鹿山이 요나라 때 왕족 야율습열耶律習涅 묘지墓志가 발견되어 그 위치가 고증되었다.

 

가록산은 지금의 소한산小罕山(=1497m)인데, 파림좌기巴林左旗와 아로과이심기阿魯科爾沁旗사이에 있다. 지도에 표시된 천산의 동북에 있고 지도에 표시된 신시의 서북쪽에 있다.

 

따라서 가록산의 아래인 아로과이심기의 천산진天山鎭(=지도에서 신시)이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치러 가면서 하늘에 제사를 올린 목엽산木葉山이며, 이 천산진 아래는 백성자白城子가 있으니 신시라고 부르던 백악산아사달의 흔적이고 또 사달왕과 관계될 수 있는 시달목소목柴達木-蘇木도 있다. 만주말 시달목을 한어로 번역하면 백락白濼이라 한다. 백락은 흰 물이며 동시에 밝다는 뜻의 대웅大熊으로 보면 환웅산이 된다.

 

대웅大熊을 몽고어로 파라이巴賴라고 한다. 우리말로 빛을 낸다는 의미의 이다. 백락도 대웅도 곧 우리말 밝을 의미한다. 현재 지명의 파림기도 대웅에서 유래된 것이다.

 

사진) 환웅의 신시 아사달 위치와 성터, 백악산아사달이라고도 한다. 옆에는 해모수 북부여성터가 있다

 

백성자를 요나라는 영주永州라고 했는데, 여기에 의미있는 기록이 남아있다.

 

상경도 영주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영주 목엽산에는 거란시조 기수가한묘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인이 백마를 타고 마우산(지도의 흑산)에서 토하를 따라 내려오고 천녀가 푸른소가 끄는 마차를 타고 평지송림에서 황하潢河를 따라 내려와서 목엽산에 이르러 토하와 황하 두 강이 만나니 서로 결합하여 8명의 아들을 낳아서 8부를 두었다. 有木葉山上建契丹始祖廟奇首可汗在南廟可敦在北廟 繪塑二聖並八子神像相傳有神人乘白馬自馬盂山浮土河而東有天女駕青牛車由平地松林泛潢河而下至木葉山二水合流相遇爲配偶生八子其後族屬漸盛分爲八部

 

마우산馬盂山은 요나라 야율종耶律琮과 진진대장공주秦晉大長公主 묘지 발굴로 인하여 확증되었는데 팔리한 고성 서남쪽의 서요하 발원지인 마우산으로서 높이는 1729m이다. 즉 신인神人은 신시를 세운 환웅인데, 토하를 따라 말을 타고 가서 천녀, 즉 웅녀를 만나서 결합한 것이다.

 

여기서 황수는 거란 상경임황부의 물로서 상경 동쪽을 흐르는 물이다. 이는 소한산, 즉 가록산의 동쪽에서 비롯되며 지금은 오이길목륜하烏爾吉木淪河라고 한다. 평지송림은 상경의 동쪽 40리 지점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곳으로 호교胡嶠[함요기陷遼記, 946~953]에 기록되었다.

 

거란 8부족을 만든 거란 시조로 추앙되는 기수가한奇首可汗이 언제 때 인물인지 알 수 없다.

 

가돈, 즉 천녀의 묘가 기수가한의 묘보다 북쪽인 것으로 보아서 우하량 유적지처럼 여제사장이 있던 모계사회 시대 전설로 고려된다.

 

가한이라는 말의 최고 기록은 <번한세가>2대 번한 낭사가 세운 가한성可汗城이다. 여기서 가한은 단군 아래로 보이지만 처음부터 아래는 아니다.

 

거란족은 북부여의 패망 이후 천년 이상 역사를 잃어버렸고, 신인 환웅의 사당을 다시 발견해서는 그들이 아는 가장 성스러운 이름으로 신인을 기수라 하고 환웅을 가한이라고 호칭했을 수 있다. 고구려가 5, 부여가 6가제였는데 단군시대는 [규원사화] 기록에서 호가, 마가, 우가, 웅가, 응가, 노가, 학가, 구가 등 8가제다. <신시본기>에서 8괘를 만들어 복희역을 만든 복희가 태어난 곳이 신시라고 하는데 이 천산진 북쪽 부하문화 유적지에서는 가장 오래된 복골이 나왔다. 그 복골이야말로 복희역의 출발점인 것이다.

 

요나라 때 이 목엽산에서 요나라 황제와 황후가 직접 절하고 천제天際를 지냈다. [요사-예지], 이 천산의 목엽산 한가운데에 왕이 되는 군왕수를 동쪽으로 향해서 중앙에 심고 그 아래에는 신하 나무를 조례 하듯이 세우고 군왕수 뒤에는 배우목으로 두 나무를 심고 이를 신문神門이라고 불렀다.

 

신문神門은 신목神木, 즉 신단수神檀樹.

 

祭山儀:設天神地祗位於木葉山,東鄉中立君樹前植群樹以像朝班又偶植二樹以爲神門

 

황제 황후가 이르러서 백마, 흑소, 백양을 잡는데 복신이 기를 흔들고 북을 울리며 희생을 잡고 신단수에 매어단다.

皇帝皇后至夷離畢具禮儀牲用赭白馬玄牛赤白羊皆牡僕臣曰旗鼓拽刺殺牲體割懸之君樹

 

무당이 술을 붓고...황제, 황후가 와서 군왕목 앞에서 하마하고 남단에 올라 어탑좌에 앉는다. 이하 생략

太巫以酒酹牲禮官曰敵烈麻都儀辦」。皇帝服金文金冠白綾袍絳帶懸魚三山絳垂飾犀玉刀錯絡縫烏靴皇后御絳溗絡縫紅袍懸玉珮雙結帕絡縫烏靴皇帝皇后御鞍馬群臣在南命婦在北服從各部旗幟之色以從皇帝皇后至君樹前下馬升南壇御塌坐下略

 

이제

1) 단군 가륵의 동생 사달왕 가록의 가록산의 고증과 가록왕의 신시 아사달,

2) [삼국유사]의 단군 수도 백주 목엽산,

3) 옛 백성자에 남아있는 환웅과 웅녀의 만남 전설 등과 더불어, 4)목엽산에서 행해졌던 신단수 제사법의 유일한 기록에 의해서 1세 거발한 환웅과 단군 왕검의 개천 도읍 신시는 아로과이심기 천산진 남쪽 백성자로 확정된다.

 

거발한 환웅은 태백산에 내려왔다가 신시 목엽산에서 웅씨족과 결합하고 그곳에 수도 아사달을 두고 시장을 열어서 문물을 모이게 하였다. 그러나 환웅의 도성은 다시 남쪽 청구, 그의 처음 개척지로 옮겨갔다.

 

그 웅녀족의 피를 직통으로 받은 단군족에게는 환웅이 강림했던 성산이지만 환웅에게는 그가 사냥하고 순수했던 여러 지역 중의 하나였던 셈이다. 왜냐하면 이 지역의 도자기는 갈도褐陶로서 홍산문화의 전형인 채도彩陶가 아니다. 즉 환웅이 강림하여서 웅녀와 결합까지 하였으나 정착하지 않고 돌아간 것이다. 웅녀조차도 환웅을 따라서 남천하여 능원현凌源縣의 우하량牛河梁에 자리잡고 그곳에 살던 기존의 예족을 밀어낸 것으로 보인다.

 

3세 단군 가륵은 신지神誌 고글高契에게 신시 배달의 역사를 기록한 배달유기를 기록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신지 고글의 후손은 바로 글안契丹, 즉 거란족이다. 배달국 신시가 거란족 요나라의 발생지인 것은 이런 연유다. 신시의 신단수 제례 풍습을 시행하고 또 기록하여 남겨두기도 했다. 마한 풍속에서도 대목大木에 방울을 걸어서 신을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大熊을 몽고말로 파라巴賴라고 하며 우리말로 이다. 의 훈에 불꽃처럼 빛나는 모양이 있다. 대웅이 한웅桓熊(桓雄)이고 훈이 밝인데 신시였던 천산의 백성자를 의미한다. 그 동남쪽 시달목소목의 시달목柴達木은 몽고어로서 본래는 박락白濼(蒙名 柴達木)이라 하는데 파라巴賴와 같다.

 

환웅 전설속의 신단목神檀木이 시달목柴達木으로 기록된 것으로 고려되는데 시달은 마고 전설의 실달實達성과도 관련될 수도 있다. [삼국유사]에서 말한 단군 조선의 수도 백주 무엽산은 바로 여기 천산진이다.

 

한편 단군 이후 거란족의 역사 기록이 천년이나 끊겨서, 거란족이 다시 거란국 역사를 편찬할 때는 조상의 신성한 만남이 이름도 잘 모르는 전설이 되어, 환웅-웅녀의 기록이 빠져버렸다. 그 대신에 중국 역사를 빌려다가 [요사-영위지] 앞머리를 만드니 거란 스스로 제 조상인 치우천황을 작란作亂한 인물로 욕했다.

 

3. 홍산 유적지

1) 나리사대 유적지

가록산(소한산)의 서쪽 한산罕山(=1936m) 또는 새한산賽罕山은 흑산이라고도 했는데, 소한산의 서쪽 골은 흑수黑水라고 했으며 이 흑수가 서요하로 들어가는 길목에 나리사대那日斯臺 유적지가 있다. 나리사대문화 유적지에서는 옥도끼와 더불어서 마노瑪瑙로 만든 석도石刀도 등장한다. 옥기 조각이 매우 다양화 되며 각종의 옥패식이 등장한다. 구름형옥대, 옥구, 물고기형 옥패식, 용형 옥결, 부엉이형 옥패식, 옥관 등이다. (그림 15 참조)

 

도기는 빗살무늬 토기가 여러 첨가 기법으로 다양해지면서 뱀무늬의 채도문도 등장한다.

 

나리사대 문화의 가장 주요한 발굴로서 남자와 여자의 돌조각이 각각 하나씩 있는데 남자는 35cm 높이에 미간까지 보호하는 투구(투구 재료가 청동인지 코뿔소 가죽인지 알 수 없다.)를 쓰고 의자에 걸터앉아 있다. 여자는 높이 19cm에 안면을 머리칼로 팔자 형태로 가리고 머리 위에는 3층의 족두리 장식을 얹었으며 두 손을 합장하고 무릎을 꿇었다. 여자상과 함께 발굴된 석수상石獸像은 높이 9cm, 남은 길이 14cm의 작은 곰의 형상이다. (아래 그림)

 

환웅, 웅녀의 만남은 이미 반만년전에 실재로 존재했던 사실이 이 나리사대 돌조각품으로 증거된다. 이 석조물들처럼 곰 부족의 여자가 소원하여 환웅의 씨를 얻어서 득세를 하고 호랑이족 예의 영역을 획득해나간다. 그리고 그 서쪽의 임서현林西縣 쌍정雙井 백음장한白音長汗 유적지에서는 35cm 높이의 임신한 여신상生育女神像이 나왔다. 고구려까지 모시던 부여신扶餘神일 수도 있다.

 

사진)나리사대에서 발굴된 환웅-웅녀, 곰 조각상

나리사대에서 발굴된 옥기

 

웅녀족이 환웅과 함께 예맥의 땅을 빼앗아 옮겨간 곳으로 신석기 홍산문화의 정수격인 요녕성 능원시凌源市 우하량牛河梁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 최상단의 여신묘를 중심으로 반경 5km 안에 6개 지점에 걸쳐서 약 20개의 대형 적석총과 제단 등이 있다. (그림 16 참조)

 

남쪽에 금자탑金字塔이라는 제사 건축지는 3단 원형 제단으로서 아랫단의 직경이 60m, 윗단의 직경이 40m에 이르고 그 위에 봉토를 하였다.

 

그리고 북쪽에는 200m X 200m 규모의 신석기 석성 터가 남아있다.

 

2) 우하량유적지

우하량 적석총에서 발굴된 유물은 거의 홍산문화 유물이며 청동기는 일체 없지만 제단의 규모, 왕릉의 규모가 개세적이라서 중국 역사학계에 역사적 쇼크를 주었다. 우하량 적석총 홍산문화는 시기적으로는 약 5500년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 왕릉들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까? 중국에서는 이 우하량 지역을 웅산熊山이라고 고려하면서 유웅씨有熊氏와 그 후예인 황제黃帝 헌원公孫軒轅, 그리고 황제의 손자 고양왕 전욱顓頊등의 조상으로 고려한다. 그리고 최상부의 여신묘는 복희와 부부였던 여와신女媧神이라고도 해석한다. 그러나 여와신은 복희와 함께 뱀으로 형상화되기는 했어도 곰은 아니었다. 이곳 여신묘에는 특별하게도 곰의 턱뼈가 부장되어 있었다. (그림 참조)

 

그래서 이 홍산문화 적석총의 주인은 환웅과 웅녀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홍산문화 특유의 적석총 묘제는 요동반도와 압록강의 적석총, 서울 송파의 적석총, 경주의 적석총으로 이어진다.

 

우하량유적지는 유적지의 분포가 넓고 많다. 우하량 유적지는 20여개 지점이며 그중에 5개 지점의 적석총군이 대표적이다. 적석총 2지점은 150 x 80m 규모다. 2지점의 제단은 3층 원형의 돌제단이며, 4기의 춘추시대 적석총과 여러개의 석곽묘가 있다. 적석총 3지점은 2지점의 북쪽 200m 거리에 있는데 적석총 1기와 8개의 석곽묘가 있다. 적석총 5지점은 3지점으로부터 서쪽 882m 지점이고 2기의 적석총과 발굴하지 않은 석곽묘가 있다. 4지점은 3지점으로부터 577m이다. 미발굴이다. 또한 3지점 1000m 북쪽에는 여신묘(女神墓) 건축유적이 있고 여신묘 북쪽에 규모가 작은 적석총 6지점, 7지점, 8지점, 9지점이 있다. 5지점 남쪽에는 금자탑(金子塔)으로 불리는 직경 100m3층 원형 토단(土壇)이 있다.

 

우하량은 홍산문화의 보통 석곽묘(石槨墓)제에 더하여 최초로 적석총(積石塚)으로서 산릉(山陵)을 쌓았다.

 

여신묘 건축지로서 진흙으로 만든 여신상과 더불어 곰의 머리뼈가 출토되어 곰 토템과 여제사장으로서의 웅녀를 강력하게 시사한다. 여신의 두상에는 옥으로 눈을 만들었고 그외 작은 여신상, 생육여신 (生肉女神)상도 있다.

 

사진) 진흙 여신상과 곰 턱뼈

 

금자탑(金子塔)3층의 대형토돈(大型土墩)으로서 윗층은 반경 40m이고 하층 외곽은 반경 60 - 100m에 이르는데 각층마다 8-15m 높이의 석축을 쌓고 중앙을 흙으로 채웠다. (bc. 1500년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금자탑은 중국 동남해안, 양자강 하류와 태호(太湖) 부근의 양저문화(良渚文化)의 제단 및 옥기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양저문화는 치우 청구국의 산동반도 이주로 인해 영향을 받아서 옥기가 번성한 문화다.

 

우하량에서는 홍산문화의 최정수라고 할수 있는 각종 옥기들이 최다량으로 발굴되었다. 옥조룡(玉彫龍)이 대표적으로 많고, 구름무늬 옥패(玉牌), 옥벽(玉璧), 쌍련옥벽(雙聯玉璧), 삼련옥벽(三聯玉璧), 옥종형기(玉琮形器), 옥탁(玉鐸), 옥완(玉瑗), 옥비식(玉臂飾), 옥고([]), 옥고형기([]形器), 옥거북이, 새조각, 수면형(獸面形) 옥패식 등이다.

사진) 우하량에서 발굴된 옥기

우하량의 도기는 용린문(龍鱗文) 흑도(黑陶), 홍도(紅陶), 자도(紫陶) 등 채도가 많이 나오는데 종합하면 매우 강력한 신권 국가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가까운 객좌현(客左縣)에서도 제사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객좌현성에서 서쪽으로 3.5km 지점의 흥륭장향 장경여자촌 대릉하 서안의 동산취 후량 정상부에서 네모난 돌을 쌓아올린 돌담벽과 쌍두룡옥황 , 녹송석 조각 새 등 장식과 형체특이적 채도기가 대량 발굴되었다.

 

유적지 남부에서 직경 8m의 원형제단이 발굴되었다. 제단 주변은 석판을 대고 안에는 크고 작은 돌을 덮어 쌓았다.

 

, 북부는 네모 방형이고 남부는 원형이니 전방후원고분에 대응된다. 탄소측정 연대는 대략 5000년전이다.

 

여성나체임부조각상, 대형임신부좌성이 발굴되어 생육신상이라 한다. 그외 타격석기, 돌도끼, 세석기, 뼈화살촉 등이 나오고 홍도편, 채도편, 흑도편, 지자문 위주 질그룻이 많았다.

 

3)부하구 유적지

5세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이 복희伏犧인데, 점복술로 인하여 여와복희의 전설을 남겼다. 그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 낙랑을 거쳐 진으로 갔는데 산서성을 다스리다가 산동성으로 갔다.

 

내몽고 오이길목륜하烏爾吉沐淪河 유역 파림좌기巴林左旗 부하구문화富河溝文化는 약 5300년전에 시작되었는데, 촌락의 방이 원형인 것이 추가되고有方形圓形兩種 방 중앙에 화로 구덩이有灶坑가 나타나고 불을 피워서 추위를 막고 음식을 끓여 먹었고, 그외 뼈를 불에 구워서 점을 치는 복골卜骨이 나왔다. 이는 중국 최초의 복골이며 은허의 복골 문화가 본래 홍산문화 신시의 복희로부터 전래된 것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즉 은나라 은허 문명은 바로 홍산 문화와 용산문화의 후손이다. 동시에 은나라 갑골 상형 문자도 여기서 발생하여 전래된 것이다. 한자漢字도 중국인들의 독자적인 문화가 아니라 동이민족이 홍산문화에서 개발한 기호로서 만들어진 양의 문자이다.

 

4. 홍산문화의 특징

1) 홍산문화의 첫 번째 특징은 소위 빗살무늬 도자기 시대였던 선홍산문화인 예맥시대의 단순 기하문의 질박한 회색, 혹은 황색 토기에서, 홍색 토기에 검은 무늬의 새로운 문화 세력이 이입된 것이다.

 

2) 홍산문화의 두 번째 특징은 다양하고 정교한 옥기다. , 돼지용, 물고기, 거북이, 매미, 부엉이 등과 같은 다양한 토템, 그리고 옥벽玉壁옥환玉環구름무늬장식勾云纹佩飾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3) 홍산문화의 세 번째 특징은 돌무덤이다. 돌을 쌓은 적석총積石冢도 나타나고 석곽石槨 무덤과 석관石棺 무덤도 나타난다.

석관무덤은 요녕성 우하량牛河梁, 하북성 평천平泉 위장圍場 당산唐山 적봉시 홍산紅山과 하가점夏家店, 영성寧城 등에 존재한다.

 

4) 네 번째 특징은 화로를 이용한 난방과 역시 불을 이용한 복골의 출현이다.

 

5) 다섯 번째 특징은 암각화의 기록이다. 태백산이었던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서요하의 지류인 케스케덴克什克騰旗 백분하百岔河 계곡를 따라서 신석기 시대부터 암각화가 발달해 있다. 강안을 따라서 100리에 걸쳐서 약 140개의 암벽에 가지가지 주제로 벽화가 남아있다.

여러곳의 암화와 비교하여 이곳의 암화 주제 중에 사슴이 유독하게 많다. 부여가 원래 사슴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반면에 부루는 늑대를 가리킨다는데 단군 부루가 산동에 세운 낭사군 낭사대琅邪臺도 늑대의 낭이다.

 

사진) 케스케덴克什克騰旗 백분하 암각화 모음

 

백분하 암각화에는 수렵화, 부엉이형 인물화, 군무화群舞畵, 생식화生殖畵, 천체성수화星宿畵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토성자에서도 사냥 기마도 같은 암화가 보인다. 대부분은 청동기 시대 예술로 추정하지만 일부는 신석기 유적지에서 발현되어 신석기에 암각화가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주제가 주로 사냥과 목축이므로 유목민족의 생활이기에 환웅이 도래한 홍산문화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고려한다.

 

홍산문화의 범위는 동쪽으로 요하遼河 유역, 서쪽으로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 남쪽으로 북경北京과 천진天津 북으로는 서요하西遼河 북쪽까지 광할한 지역이다. 홍산문화는 대략 bc4800년에서 bc2200년까지인데 [한단고기韓檀古記-신시역대기神市歷代記] 기록상의 환웅시대인 bc3898년에서 bc2333년까지와는 하한下限이 거의 일치한다.

 

웅녀족과 같은 곰 토템을 현재도 가진 에벤키鄂溫克, ewenki 민족은 퉁구스tungus, 또는 색륜索倫, solong 등으로 불려왔는데, 그들은 지금 내몽고의 흑룡강 가까운 최북부 하이라얼시와 몽고, 소련 바이칼호변, 그리고 예르니아강 퉁구스카, 사하공화국 야쿠트공화국까지 퍼져 사는 겨우 수만명의 희소 종족이다. 이들은 아직도 사슴을 키우고, , 멧돼지를 사냥하는 유목민이며, 지야지신(치우기?)을 경배하고 또 산신과 불의 신, 그리고 곰을 숭상한다. 또한 그들 사회에서 무당은 신분이 높은데 이들로 인해 샤만 연구가 생겨났다. 아무튼 이들의 유목 생활 풍습이 백분하 계곡의 암각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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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적고찰]

[2] 수메르 인이 세계 4대 고대 문명을 창건했다.

(1) 이집트로 이동한 수메르 인

이집트 문명이 남긴 전통 어휘들의 기원은 수메르 어입니다. 이집트를 지배했던 수메르 인들은 기원전 3100년경 원주민의 세력에 밀려, 그 일부가 아프리카의 중서부에 있는 니제르 강과 세네갈 강 유역으로 이동했습니다.

 

'나일(Nile)'의 뜻은 무엇일까?

'나일'의 어원은 우리말의 ''와 같습니다.

 

이집트의 나일(Nile) 강과 시나이(Sinai) 반도, 유럽의 라인(Rhein) 강과 세느(Seine) , 아프리카 중서부의 니제르(Niger) 강과 세네갈(Senegal) , 한국의 낙동강과 섬진강, 이 이름들 속에는 하나의 공통성이 있습니다. '시나이'를 시나이 반도에서 지중해로 흐르는 계절적인 강인 와디 알아리쉬(Wadi al-Arish)의 옛날 이름이었다고 볼 때, 각 지역의 두 강은 그 지역의 대표적인 강들입니다. 큰 강들의 이름들인 나일·라인·니제르·낙동강은 '(na)'로 시작됩니다. '라인(Rhein)''나인'과 같다고 볼 수 있고, '니제르(Niger)''나이지리아(Nigeria)'와 같이 '나이저'로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작은 강들의 이름인 시나이·세느·세네갈·섬진에는 '(s)(n)'의 소리가 있습니다. '섬진(蟾津)''()''나루 진'이므로 '섬진'은 이두로 '섬나'로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큰 강들은 큰 강들끼리, 작은 강들은 작은 강들끼리 이름이 이렇게 비슷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연일까요?

 

물론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이·라이·나이'는 우리말의 ''와 어원이 같고, '시나이·세느·세네'는 우리말의 '시내'와 어원이 같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시내'''보다 작은 물줄기입니다. 이것은 한 언어권의 종족들이 이들 각 지역으로 각각 이주하여 큰 강을 '나이'로 작은 강을 '시나이'로 불렀기 때문에, 이런 이름들이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전통 어휘들과 전설이 이들 각 지역에 남아 있습니다.

 

이집트 동쪽의 요르단 강 유역에 있는 '갈릴리(Galilee)''', 세느 강과 라인 강 일대를 이르던 옛 이름인 '(Gaul, Gallia)', '세네갈'''은 우리말의 '고을'과 어원이 같습니다. 우리말의 '고을'은 그 지역을 관할하는 관청이 있던 곳을 이르던 말입니다.

 

프랑스 어의 '(Gaul)'은 아리아 어에 속하는 켈트 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수메르 인들도 이 말을 즐겨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네갈''나이저'라는 이름을 남긴 종족은 수메르 인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만주에서 살았던 종족의 이름인 '속말말갈(粟末靺鞨)'의 뜻은 '수메르 모니 고을(Sumer Muni Gaul)' '수메르 인들이 사는 고을'입니다. ()은 골(Gaul)과 어원이 같습니다.

 

'모니(muni)'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성인이라는 뜻입니다. '석가모니(Sakyamuni)'는 사캬 족의 성인이라는 뜻입니다. '모니'라는 말은 서울 '몽촌 토성''', '몽골''',강화도 '마니산''마니'와 어원이 같습니다. 이것은 수메르 인들이 이주지에서 자신들을 '모니' '성인'이라고 칭했다는 뜻입니다. 독일의 도시 이름인 '뮌헨(Munich, Munchen)'의 앞 글자 '무니(Muni)', 영어로 '지방 자치의'라는 뜻인 '뮤니시플(municipal)''뮤니(muni)'는 성인이라는 뜻인 '모니(muni)'와 어원이 같습니다. '모니'들이 모여서 살던 곳이 '뮌헨'이었고, '모니'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던 것에서 '지방 자치'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강원도 춘천시의 옛날 이름인 '우수주(牛首州)''우수(牛首)'는 이두로 '소머리'입니다. '우수''우두머리''우두'와 어원이 같습니다. 우리말의 '우두머리''우두(牛頭)''머리'가 합쳐진 말입니다. '牛頭'를 이두로 읽으면 '소머리' '수메르'가 됩니다. 따라서, '우두머리''수메르 머리' '수메르 인의 지도자'라는 뜻입니다. 옛날에 만주에서 살았던 한 종족의 이름인 '속말말갈(粟末靺鞨)''속말''수메르'를 한자로 표기한 것입니다. 일본 천황의 호칭인 '스메라미코토''스메라', 일본어로 무사라는 말인 '사무라이[]''사무라', 서 요르단 지방에 있는 지명인 '사마리아(Samaria)', 아프리카의 중동부에 있는 반도의 이름인 '소말리아(Somalia)' 등 이 이름들도 '수메르(Sumer)'와 어원이 같습니다. 전통 어휘들이 이렇게 유사하다는 것은 우연이나 억지가 아니고, 수메르 인들이 이들 지역으로 이동을 했다는 뜻입니다.

 

나이지리아 북부에 있는 카노(Kano)라는 도시에 전해져 오는 전설에 의하면, 먼 옛날에 가야(Gaya)족의 카노(Kano)라는 대장장이가 철을 찾아 이곳에 와서 처음 이 도시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이 지역에 있는 하우사 족의 전설에 의하면, 하우사 족 선조의 이름이 '아부이아지두(Abuyazidu)'라고 합니다. '아부이아지두'는 우리말로 '아버이 아사달'로 해석됩니다. '가야'라는 지명은 한국의 낙동강 유역과 인도의 갠지스 강 유역에도 있습니다. 이것은 수메르 인들이 한국과 인도와 나이지리아로 이동했다는 뜻입니다. '가야'의 어원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 '가나안(Canaan)'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메소포타미아의 갈데아(Chaldea) 우르(Ur)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한 아브라함은 아담과 이브의 셋째 아들 셋(Seth)의 후손으로서, 수메르 인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Egypt)'의 어원은 '에아의 집터'.

'에아의 집터'는 대양(大洋)의 신()인 에아(Ea)가 사는 집터라는 뜻입니다. 이집트의 전통 어휘들이 우리말로 해석되는 것은 이집트 문명이 남긴 전통 어휘들의 어원이 수메르 어라는 뜻입니다.

 

호루스(Horus) 신화는 이집트의 통일 신화입니다.

 

땅과 하늘의 신이 낳은 식물의 신인 오시리스(Osiris)는 이집트를 미개에서 문명으로 이끈 신이다. 이를 시기한 동생 셋(Seth)은 형 오시리스를 위계로 살해하여 나무 상자에 넣어 나일 강에 띄워 버렸다.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Isis)는 이 상자를 페니키아의 비블로스 항구에서 찾아 가지고 이집트로 돌아와 소생시킨다. 이것을 안 셋은 오시리스의 상자를 찾아내어 다시는 소생하지 못하도록 그의 시체를 잘게 절단하여 이집트 전역에 뿌렸다. 그러나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는 헌신적으로 남편의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 남편을 다시 소생시켜 명계의 왕이 되게 했다. 오시리스의 아들 호루스(Horus)는 어머니 이시스의 비호를 받아 셋을 물리치고 신들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아 통일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신화의 이면에는 역사가 있습니다. 이 신화의 이면에는 고대 이집트의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호루스는 머리의 모양이 매인 신입니다. 수확기에 곡물에 피해를 주는 새들을 매가 잡아 먹기 때문에, 농경이 위주였던 이집트 인들은 매를 토템으로 한 것입니다. 셋은 당나귀, , 재칼 등 여러 짐승의 모양을 조합하여 만든 가공의 동물 모양을 한 신입니다. 이 신화에서 오시리스와 호루스는 나일 강 유역에서 농경을 하던 원주민이었고, 셋은 나일 강의 삼각주 일대로 침입한 유목민으로 보아야 합니다.

 

호루스 신화를 역사와 결부시켜 정리하면 "나일 강 유역으로 침입한 유목민인 셋(Seth) 족의 힘에 밀려 흩어졌던 원주민들이 나일 강의 상류에서 상이집트 왕국을 세우고, 힘을 정비하여, 나일 강 하류 삼각주 일대에 있던 셋 족의 하이집트 왕국을 징벌하고, 이집트를 통일시켰다."라는 역사가 됩니다.

 

이집트의 ''은 아담과 이브의 셋째 아들 ''과 같습니다. 수메르 인들이 원주지에서 대이동을 할 때, 그 일부가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하여 수메르 문명을 일으켰고, 일부는 이집트로 이주하여 셋 족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셋째 아들 ''의 후예인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수메르 인의 도시 국가들이 멸망한 뒤, 가나안으로 이주한 수메르 인의 후손입니다. 이것을 입증할 수 있는 언어의 자취들이 이집트와 가나안의 전통 어휘들 속에 있습니다.

 

이집트의 전통 어휘들이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은 이집트로 이동한 수메르 인이 이집트 문명의 기초를 다졌고, 한반도로 이동한 수메르 인의 언어가 우리말의 뿌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고대 문명들이 남긴 전통 어휘들은 대부분 당시의 종교와 깊이 연관되어 오래도록 사용되었기 때문에,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해석이 가능합니다.

 

'나일(Nile)''시나이(Sinai)'의 어원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나일''', '시나이''시내'와 같습니다.

 

'이집트(Egypt)'의 어원은 대양(大洋)을 다스리는 물의 신()'에아(Ea)'가 사는 '집터'라는 뜻인 '에아 집터'입니다. 나일 강 유역으로 이주한 수메르 인들이 나일 강 유역을 '에아(Ea) 집터'라고 불렀던데서 '이집트'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Ra, Re)'는 태양신의 이름입니다. ''는 이집트 원주민의 신이 아니었고, 셋 족의 유목민들이 섬겼던 신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수메르(Sumer)''', '슬라브(Slav)''', '신라'''는 태양신을 뜻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들에서 태양신을 똑같이 ''로 불렀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 수 없고, 어느쪽이 먼저냐가 문제입니다.

 

종교는 보수성이 강합니다. 따라서, 종족마다 다르고 배타성이 강한 토템 숭배에서 모든 종족들에게 평등하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과 유일신적 절대성이 강한 태양신 숭배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통일을 지향하는 대변혁이 그 사회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집트의 통일 신화에서 주인공 호루스가 매의 형상이었다는 것은 태양신 ''가 이집트에서 자연 발생한 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태양신 ''는 아랄 해 일대로 이주한 잡다한 소규모 여러 종족들이 새로운 거대한 집단으로 통일되어 성장하는 과정 중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집트가 침략자인 셋 족의 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인 이유는 우주적 보편성을 띤 셋 족의 태양신을 숭배하는 종교가 이집트의 원래 종교보다 통일 이집트를 통치하는데 더 우수했고, 셋 족이 이집트를 지배한 기간이 길어 셋 족의 종교가 이집트화되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이집트의 전통 어휘들이 수메르 어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수메르 어에서 기원한 한국어로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테베(Thebes)'는 나일 강 중류에 있는 고대 도시의 이름입니다. 수메르 인이 이집트를 지배했던 지역은 나일 강 하류의 삼각주에서부터 적어도 나일 강 중류의 '테베'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테베'는 수메르 어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테베라는 지명은 그리스에도 있습니다. 테베는 '티베트 고원''티베트(Tibet)', 한국에 있는 '태백산''태백'과 기원이 같습니다. 중국 산동성에 있는 '타이산[泰山]''타이', '타이랜드(Thailand)''타이''테베'''와 맥이 통합니다. '테베'는 우리말로 '토대가 되는 밭'이라는 뜻을 가진 말인 '텃밭'과 어원이 같고, 수메르 인의 중심지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수메르 인들은 큰 강의 중상류 쪽에, 큰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입구만 막으면 방어하기 좋은 골짜기를 종족의 중심지로 삼는 전통이 원주지에서부터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의 '테베'도 수메르 인의 중심지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Nun,Nu)'은 이집트 신화에서 강과 비를 다스리는 물의 신입니다. '(Nun, Nu)'은 우리말의 '[]'과 어원이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메르 인들은 눈이 녹아 물이 되는 것을 보고, 물의 신을 ''이라 불렀던 것이 이집트에 그대로 전래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어로 눈이라는 말인 '스노우(snow)'의 어원은 's(새로운,위대한) now()'이고, 뜻은 위대한 물의 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카이로(Cairo)'의 어원은 아랍 어로 승리라는 뜻인 '알 콰히라(Al-Quahirah)'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현대인의 생각입니다. 아랍 어가 이집트의 공용어로 되기 이전에도 '카이로'라는 말이 이집트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메르 인의 종교를 수용하면서 신이 그들에게 약속한 땅이라는 말인 '가야'를 버렸을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카이로'의 어원은 수메르 인들이 이주지에 남긴 '가나안(Canaan)'·'가야(Gaya)'라는 지명과 기원이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야'의 어원은 '가미 야(곰의 뜰, God yard)'이고 뜻은 신의 뜰로 볼 수 있습니다.

 

'피닉스(phoenix)'는 이집트 신화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새입니다. 불사조로 알려진 피닉스의 고향은 이집트가 아닙니다. 아라비아도 아닙니다. 피닉스는 난생 신앙의 진원지인 알알 문명에서 시작하여 인구의 이동과 더불어 이집트, 그리스, 아라비아 등지로 이동했습니다.

 

피닉스는 동쪽으로도 이동했습니다. 중국은 피닉스를 '현조(玄鳥)' 또는 '봉황(鳳凰)'으로 기록했습니다. 피닉스는 한국에서 길조를 상징하는 '파랑새'로 되었습니다. 피닉스는 서유럽으로도 날아가 '프랑스(France)'로 되었습니다. 피닉스·현조·봉황·파랑새·프랑스는, 알알 문명의 신화가 낳은, 임금의 탄생과 관계된 새입니다.

 

'피닉스(phoenix)'의 어원은 '(p) 호에닉(hoenic) (s)'이고, 뜻은 '위대한 햇님 새'입니다. '프랑스''파랑새'의 어원은 '파라(Pa Ra)의 새'이고, 뜻은 '위대한 태양신의 새'입니다. 피닉스는 수메르 어, 프랑스와 파랑새는 아리아 어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의 '보라매''바라(Ba Ra) ' '위대한 태양신의 매'라는 뜻입니다. 보라매는 파랑새와 피닉스에 상응하는 태양신의 새입니다.

 

'스핑크스(sphinx)'의 어원은 '스피닉스(s-phoenix)'이고, 뜻은 '새로운 피닉스'입니다. '스핑크스''새로운'이라는 뜻이 있는 '(s)'자를 '피닉스(phoenix)' 앞에 붙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테베의 스핑크스는 날개가 달려있습니다.

 

'사하라(Sahara)'의 어원은 '새로운(sa) 위대한(ha) 태양신(ra)'으로 볼 수 있습니다.

 

'피라미드(pyramid)'는 어원은 영어로 표준·기압계라는 뜻인 '바로미터(barometer)'와 같습니다. '(py)''(ba)'는 위대한이라는 뜻입니다. '(ra)''(ro)'는 태양신입니다. '(mi)''(me)'의 어원은 우리말의 ''로서 산 또는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d)''(ter)'는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고대의 유적들인 '지구라트(ziggurat)''(t)', '파키스탄'''과 같은 뜻이고, 우리말의 ''와 어원이 같습니다. 따라서, '피라미드''바로미터'의 뜻은 '위대한 태양신의 뫼 터' '위대한 태양신을 모시는 산 터'입니다. '바로미터(barometer)'는 영어로 군주·국왕이라는 말인 '파라마운트(paramount)'와 어원이 같습니다. '피라미드''바로미터'는 종족의 중심지로서 권력의 중심지였고,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파라오(Pharaoh)'는 고대 이집트 국왕의 칭호다. 이 파라호의 뜻은 '위대한(pha) 태양신(ra) (oh)'. '(oh)'는 존칭으로서 한자의 '()'와 기원이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파라(phara)'는 우리말에서 '파란 하늘''파란'과 어원이 같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라는 말은 '위대한 태양신의 하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의 '푸른 들''푸른''풀과 같은 색'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파란''푸른'은 분명히 구별되는 말입니다. 파란색은 청색이고, 푸른색은 녹색입니다.

 

(2) 인도로 이동한 수메르 인

인도로 이동한 수메르 인의 언어는 드라비다 어로 되었습니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부터 기원전 1500년경까지 인더스 강 유역에 있었던 고대 문명입니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1500년경에 인도로 이동한 아리아 인에 의해 붕괴되었습니다. 인더스 문명을 일구었던 종족은 어떤 종족이었고,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 수수께끼의 해답은 인도의 남부 지방에서 살고 있는 드라비다 족의 언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드라비다 족의 언어인 드라비다 어는 우리말과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합니다. 문장 순서가 같고, 토씨가 있습니다. 기초 어휘들 중에는 우리말과 같거나 비슷한 것들이 1천여 개나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두 언어의 이러한 친근성을 설명하려면, 인도로 이동한 수메르 인의 언어는 드라비다 어로 되었고, 한반도로 이동한 수메르 인의 언어는 우리말의 뿌리로 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수메르 어와 아리아 어는 아랄 해 일대의 거대한 초원에서 여러 종족들의 원시 언어들이 융합되며 새롭게 형성된 언어들입니다. 이 두 언어권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거대한 언어권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인도에 있는 고인돌들은 수메르 인들이 남긴 것입니다. 이것은, 수메르 인들이 기원전 2500년경부터 시작된 인더스 문명을 창건했다는 뜻입니다. 수메르 인들은 아리아 인에 밀려 남으로 이동했고, 갠지스 강 유역에 가야(Gaya)라는 지명을 남겼습니다.

 

(3) 황하 문명 속의 수메르 어

중국의 삼황 시대는 수메르 인의 통치 시대였습니다.

 

황하를 다스린 삼황(三皇)에 대한 설이 몇 개 있지만, ()의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에다 당()의 사마정(司馬貞)이 보필한 <삼황본기(三皇本紀)>에 나오는 '수인씨(燧人氏)', '복희씨(伏羲氏,  )', '여희씨(女希氏)'가 가장 역사성이 있습니다.

 

'수인씨(燧人氏)'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황제의 이름입니다. 출신지인 성기(成紀)는 지금의 감숙성(甘肅省)입니다. 출신지가 황하 문명의 중심지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황하의 상류 지역이라는 사실은 수인씨가 서쪽에서 이주한 종족이라는 뜻입니다.

 

'수인씨''수메르 인'이라는 말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수인씨는, '부싯돌 수[]'자가 뜻하는 바와 같이, 불을 만드는 방법과 여러 가지 조리법을 전했다고 전해집니다.

 

'복희씨(伏羲氏,  )'에서 '복희(伏羲)'의 뜻은 '엎드려 숨을 쉬다', '포희( )'의 뜻은 '주방에서 희생의 제물을 준비하다'로 볼 수 있습니다. '복희''포희'를 하나로 연결하여 의역하면, '신에게 엎드려 희생의 제물을 바치는 제사를 지내다'라는 뜻이 됩니다. 신에게 엎드려 절하는 풍습이 이때 있었고, 이러한 모습이 몹시 인상적이어서 뒷날 황제의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엎드릴 '()'자를 쓰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 대신 ''자를 쓰기도 했습니다. ''자의 음은 '' 또는 ''입니다. '복희씨(伏羲氏)''밀희씨(宓羲氏)'라고도 했다면, '수인씨''밀희씨''수밀희씨' '수메르 인'이라는 뜻입니다.

 

여희씨(女希氏) 또는 여와씨()는 수메르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의 갈데아(Chaldea) 우르(Ur)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한 이스라엘 족의 신인 여호와(Jehovah, Yahweh)와 소리가 비슷하다. 한자의 뜻은 여신(女神)을 섬겼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사성은 이스라엘 족이 수메르 인이라는 증거들 중의 하나입니다. '사마리아·히브리·이스라엘'이라는 말들은 '수메르·해를 부르는·아랄의 태양신 엘'로 해석됩니다.

 

황하 유역으로 이주한 수메르 인이 남긴 어휘들은 한자로 표기되면서 원래의 소리를 잃었기 때문에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산동 반도 일대에 있는 고인돌들이 수메르 인들의 이동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뒤에 이주한 아리아 인들은 한자를 만들면서 한자의 소리에 아리아 어의 흔적을 많이 남겼습니다.

Copyright 2001 도서출판 씨와 알 ssi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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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적 고찰 ]

[3]인류 역사의 회고 1 : 이집트인, 수메르인, 바벨론인들

한국창조과학회 이사

초기 인류의 역사를 상고해보면 우리는 인간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설명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로 인간에 대하여 씌어진 기록들은 겨우 BC 3,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뿐이다. 그리고 BC 3,500에서 BC 2,300년 사이에 존재했던 애굽(이집트)의 첫 번째 왕조 중에서 재위했던 왕들의 목록이 어느 정도 과장됐을 가능성을 감안하면 그보다 짧을 수도 있다. 만일 인류의 역사가 수백만 년이라고 하면 왜 BC 3,500년 이전의 역사기록이 없는 것인가? 그리고 어째서 이 무렵부터의 기록들이 전 세계에 걸쳐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많은 언어로 동시에 나타나는가? 기록은 BC 4,000-3,000년에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인더스 계곡과 기타 지역에서 동시에 시작되었다. 이런 기록들은 인간이 그때에 이미 고도로 발달되고 문명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초기 이집트인과 다른 지역 사람들의 많은 성취(문명도)들은 오늘날보다도 결코 열등하지 않다. 이렇게 고도로 발달된 사람들이 그 이전의 어떤 곳의 어떤 문명으로부터의 전수도 없이 한꺼번에 갑자기 도약했다는 말인가? 그것은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경 말고는 BC 3,000년 이전의 문명 기록은 없다.

 

(1) 이집트인들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이와 같은 몇몇 문명들이 푸른 하늘에서 갑자기 역사에 나타났다고 생각해 보자. 갑자기 나타났던 문명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문명은 고대 이집트 문명이다. 나는 인간이 수백만 년에 걸쳐 매우 느리게 발달했다는 진화론적 가정을 무시하는 바이며,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 갑자기 온 지구상에 문명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19756월호 86쪽에 케네드 클라크가 방송에서 행한 '태초에: 고대 이집트의 미스터리라는 다음의 글을 실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문명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림에 있어 꼭 필요할 것으로 여겨지는데, BC 3,000년과 B.C 2,800년 사이에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나일강 계곡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 같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50만년 동안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 빠져 있다가 200년에 걸쳐서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자신과 주위를 완전히 알아보는 것과 같다. 과학은 수많은 다른 지역에 있었던 문명한 생활에 대해 흥미로운 증거의 단편들을 밝혀내었다. 이집트는 첫 번째의 위대한 문명의 본산이다.”

 

케네스 클라크가 문명이 이집트와 기타 지역에서 돌연히 출현하였다고 말했지만, 그것보다 앞섰다고 추정되는 수백만 년의 진화 기간에서 '50만년 후를 떼어낼 수는 없다.

 

진화론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작가들도 유사한 주장을 한 바 있다. 나는 리오넬 카슨이 기고한 1965년도 판 타임-라이프지 51쪽에서 한 번 더 인용코자 한다.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약 7-8,000년 전에 근동의 이곳저곳에서 문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인간들은 사냥꾼에서 정착민으로 되어갔다. 이제는 쫓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구하지 않고 그 대신 가축을 기르거나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게 되었다. 그러다가 BC 3,200년에서 3,000년 기간의 일이백년 동안에 갑자기 그동안 나일강 유역에 흩어져 살던 부족들이 공식적인 정부를 지배하던 한 강력한 지도자 밑에 통합되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계속해서 경이로운 이집트 문명에 관하여 쓰고 있다. 이집트 문명들 즉 여러 왕들, 왕조들, 피라미드, 고도로 발달된 건축술, 스핑크스, 오늘날도 따를 수 없을 정도의 공학적 업적들, 도구들, 기술들, 예술, 과학, 의학, 행정조직 기타 등이 마치 지구의 다른 지역에서 수입해 들여온 것처럼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더욱 가소로운 것은 그 모든 문명들이 먼 혹성이나 외계에서 왔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차차로 설명하는 바와 같이 그 문명들은 바벨탑 사건 때 흩어졌던 고도로 문명된 노아의 후손들에게서 수입되었거나 이입해 온 것들이었다. 그러나 많은 문명들은 대략 BC 1,900년 이후에 시간이 지나면서 이집트 자체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에게, 암흑시대의 유럽에서, 중남미의 초기 사람들 등에게서 일어났던 바와 같이 퇴보했다는 것은 매우 슬픈 역사적 사실이다. 발달된 문명은 이집트에서 진화된 것이 아니라, 다만 발생했을 뿐이라고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은 미개인들이나 원시인들의 어떤 유물도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집트의 역사는 BC 3,400년경에서 3,200년경에 시작된다. BC 250년경에 살았던 이집트의 승려 매니토(Manetho)의 기록에 따르면, 이집트의 첫 번째 왕은 BC 3,000년경 하부 이집트와 상부 이집트를 하나로 통일한 메네스왕일 것으로 믿어진다. 독일의 사학자들은 메네스의 통치 년대가 BC 5,702~3,623년 기간의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본다. 우리는 이집트 초기 역사 때의 것인 저술과 보존된 기록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세계 최초로 파피루스 갈대로 종이를 만들고 그것에 쓸 잉크를 발명했다. 그들은 표준 자()와 저울로 거리와 무게를 재고, 시간을 계산하고, 땅을 측량하고, 세금을 산정할 수 있었다.

 

그들은 운하를 건설하고, 관개사업을 일으켜서 나일강 홍수를 인간의 편의를 위하여 활용했다. 기가 막히도록 갑자기 이 사람들은 금, , , , 터키석, 청금석과 같은 귀금속, 금 세공품, 희귀목 조각품, 상아와 보석, 타조의 깃털장식, 희귀 동물의 가죽, 몰약과 향신료 등을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의약품은 그들의 역사 초기부터 사용했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사람들은 햇볕에 말린 벽돌을 사용했으나, 이집트인들은 놀라우리만큼 갑작스럽게 머나먼 나일강 상류에서 화강암을 켜서 운반해 오기도 했다. 그들의 건축술은 후기의 어느 시대나 다른 지역의 어느 것보다 가장 고상하며 예술적이고 웅장한 왕의 묘와, 피라미드와 기념비석들을 세웠다. 어떤 것들은 비록 선사시대의 구조물들이거나 역사 기록이 보존되기 이전의 것이긴 하지만, 그들의 예술, 미술, 건축물, 예술적인 기념주들과 스핑크스 등은 고대 그리스의 미술가나 조각가들보다 수세기나 앞섰다.

 

초기시대의 조각가들은 미국 남다코타 주의 블랙 힐스에 있는 대통령들의 얼굴들과 비견될 만큼 거대하게 자기들의 왕의 두상을 바위에다 새겼다. 자기들의 중요한 건축물에는 화려하게 채색하기도 했다. 이들은 그들의 조상들을 통하지 않고 순식간에 역사에 출현한 기술적이고 지능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의 도구들도 고도로 발달된 것들이었다. 많은 역사 기록들을 보면 이 사람들이 거의 맨손으로 화강암과 다른 돌들로 피라미드와 구조물들을 건축했다는 인상을 준다. 그들은 분명코 매우 놀랍도록 발달된 도구들을 사용했다. 이집트인들은 존재하기 시작한 초기부터 그들이 켜 온 돌들을 자르기 위해 코란덤(鋼玉)이나 젬스톤(貴石)을 이빨처럼 고정시켜서 톱이나 관상(管狀)의 크라운 드릴을 제작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들의 기술은 오늘날의 가장 숙련된 사람들 정도로 발달된 것이었다. 오늘날의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지식이 축적되어 왔음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들보다 우수하거나 정교하다고 감히 주장할 수가 없다. 1913년 스미소니언 연구소가 발표한 '공구 발달의 역사라는 보고서 566쪽에 따르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진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과학 지식의 퇴보 내지 일실이 생겼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수백 년이 지나면 발달된 노하우나 지식은 완전히 망각 또는 소멸되어 버리고 만다. 석영석을 자르던 지식과 기술은 20세기에 들어 터널 구축물이 발달될 때까지 망각되어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경이로운 능력들은 우리가 그들이 축조한 거대한 파라미드를 바라보았을 때 아주 분명히 드러났다. 그것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수천 년 동안 많은 학자들을 당혹케 했다.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들조차도 맨 처음 그것들을 목격하는 순간 그 앞에 선채로 두려움에 떨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도대체 어떻게 피라미드를 지었단 말인가? 모든 시대의 수학자들은 피타고라스가 생존하기 수천 년 전에 이집트인들이 피타고라스의 기하학의 모든 요소들을 이미 사용하였다는데 대하여 경탄했다.

 

기자에 있는 대형 피라미드는 바닥 면적이 13에이커나 되는데, 이는 도시에서 3블록에 해당되는 면적이다. 그 정점은 지상에서 481피트(145m) 높이 또는 40층의 건물 높이에 해당한다. 그것은 한 개의 무게가 2-70톤짜리 석회암이나 화강암 2백만 개를 사용하여 201층의 계단을 쌓은 구조로 마무리 되어 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 이래 영국에 건설된 모든 사원과 교회와 예배당에 들어간 석재보다도 더 많은 양이다. 나폴레옹은 기자에 있는 대형 피라미드 3기는 프랑스의 국경을 따라 높이 10피트(3m) 3피트(0.9m)의 성을 쌓기에 충분하고 만일 일렬로 쌓을 경우에는 미국 대륙을 한번 반 횡단할 수 있는 분량이라고 계산했다. 20년 이내에 2백만 개 이상의 돌덩어리를 켜서 500마일 이상 운반해오고 다듬어서 있어야할 자리에 올려놓았다고 한다면, 매주 7일 매일 12시간씩 하루에 315덩어리씩, 시간당으로는 26덩어리씩을 480피트까지 쌓은 셈이 된다. 이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작업량이며 작업 능률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최첨단 건설 장비를 갖춘 10만 명의 건설인력을 가지고도 같은 기간 동안에 이런 위업을 달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진화론자들의 말대로 한다면 소위 선사시대로부터 어떠한 기술의 전수도 없이 갑자기 역사의 무대에 나타난 사람들이 아닌가?

 

돌덩어리의 양과 작업의 양도 놀라울 뿐만 아니라, 그들의 비범한 건축기술 능력의 정밀성도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그 돌덩어리들이 어찌나 정밀하게 절단되고 연마되었는지 돌 틈에 종이 한 장도 끼울 수 없을 정도이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4면이 정상(頂上)을 향하여 일정한 경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업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는 기준점이 없기 때문에 작업이 진행되어감에 따른 이 각도를 실측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만일 피라미드의 한쪽 면이 조금만 더 경사져도 다른 면은 어긋나 버릴 것이다. 그 솜씨를 어디에서 점검해 봐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정밀하다. 이 이집트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짧은 기간에 그렇게도 정확하게 거대한 돌덩어리들을 자르고 연마해서 쌓았을까? 어떤 연구원들은 그레이트 피라미드는 컴퓨터를 사용하거나 돌을 자를 때는 레이저 광선을 사용하고 돌을 쌓아올릴 때에는 반-중력 장치(anti-gravity devices)를 사용하는 외계에서 온 초능력자의 도움을 받음으로써만 건축이 가능할 정도라고 아주 신중하게 추정하기도 한다. 1986124일자 미니애폴리스 트리뷴지는 '전문가들, 지능을 측정하는 새로운 방법을 행사하다라는 한 사설을 실었다. 그 사설의 첫째 번 질문은 '누가 그 피라미드들을 건축했는가? 고대 이집트인들인가? 아니면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들인가?” 설령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들이 존재한다 해도 만일 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가 아니라면, 왜 현재의 우리 인간들보다 더 명석(明晳)해야만 하는가? 그러나 그것은 진화론에 부합되지는 않는다.

 

그레이트 피라미드 건축의 또 하나의 놀라운 위업은 그 구조의 설계와 건설공정의 감독과 필요한 노동력의 공급이다. 모든 노동자의 숙식문제, 부상자와 질병자의 치료 등은 지금까지 생존했던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능력 있는 기획자의 능력과 생각을 총동원해야만 가능했을 것이다. 피라미드와 관련된 또 다른 위업은 고인의 사체를 길이 보존하기 위하여 사용된 방부(防腐)기술이다. 이들의 것을 능가할 수 있는 기술은 아직까지는 없다.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자면, 위와 같은 모든 탁월한 위업들과 위대한 성취들을 이룩한 초기 이집트인들이 '원시적인(?)” 조상들의 후예들이라고는 볼 수 없다. 나는 이들이, 우리가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게 될, 바벨탑 사건 때의 고도로 발달된 사람들 중에서 흩어진 조상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 여기에 한 가지 관찰이 더 있어야만 한다. 즉 만일 인간이 진화되었다면 이보다 십만 년 전에 일만 명의 인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빌딩이나 구조물이 어디에 있는가? 최소한 이집트에 몇 채의 선재(先在) 빌딩들이 있어야만 할 것이 아닌가?

 

(2) 수메르인과 바벨론인들

우리가 고려해보아야 할 다음 차례의 현저한 문명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계곡(유역)의 수메르 문명이다. 그들의 역사는 이집트의 역사와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19779월호, 131)는 다음과 같이 썼다.

 

'왕들의 명단을 살펴보면 제1대 왕조는 대홍수 후에 출범했다.......우울리(영국의 고고학자)는 고도로 발달된 어떤 문명이 제1대 왕조 이전에 이미 존재했음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홍수 전 왕조에 대해서 언급된 왕들의 명단 이외에는, 수메르 인들은 마치 비가 온 후에 싹이 돋아나오는 씨앗과 같이 사막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오지는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는 물리적 증거가 없다.”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되었는가? 마치 이집트인들이 했던 것과 같이! 수메르인들도 약 BC 3,500년경에 발흥했다. 그들의 문명이 혈거인 또는 적어도 원숭이로부터 점진적으로 진화되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 문명의 시작은 홍수가 난지 수백 년 후에 있었던 바벨탑 사건 후의 어느 때에 발생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들 수메르 인들은 메소포타미아평원(강들 사이라는 의미)에 있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서 현란한 문명을 발전시키며 갑자기 출현했다. 그들은 수많은 수로들을 갖춘 관개(灌漑) 체계를 발전시켰고, 수많은 종류의 채소류, 과일류, 곡식류, 대추야자 등을 재배했다. 그들은 당나귀, 염소, 양들과 같은 가축들을 사육했다.

 

그들은 상인들, 그리고 도시와 도시 사이를 다니거나 타 지방까지 왕래하는 무역상들, 군인들, 승려들, 통치자들, 자유민과 노예들로 구성된 복합사회를 발전시켰다. 그들은 바벨탑 사건으로 언어가 혼잡케 된 직후인 BC 3,000년 전에 이미 언어를 문자로 기록할 수 있었다. 수천 개의 토판과 비문들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서는 그들의 상거래 내역, 행정, 법률 그리고 종교 등을 다루고 있다. 이 토판들은 그들이 의학, 수학 및 천문학의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들은 태양의 운행에 기초한 달력을 창안했다. 그들은 원을 360도로 분할하는 방법도 고안했는데, 오늘날 우리가 그것을 원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신화, 서사시, 설화시(說話, narrative poem), 자기들의 신과 영웅에 대한 찬양 등을 포함한 수천 가지의 문학작품들을 저술했다. 그들은 또한 수많은 주제로 잠언, 우화, 수필 등도 썼다. 그들의 작품 중 흥미있는 것 하나는 길가메쉬 서사시인데, 성경에도 기술되어 있고 세계 수많은 민족들이 그런 것처럼 대홍수에 관해서 읊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창조주로부터, 관련된 지식과 기술을 부여받지 않고는 이런 모든 일들을 몇 년 이내에 이룰 수는 없다. 대영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박물관이 우르의 폐허에서 1919년부터 1929년 사이에 생 땅(virgin soil)까지 파내려가며 3개의 다른 문명대(文明帶)를 발굴해 보았는데, 우르의 초기 역사로부터 우르의 전 역사를 관류(貫流)하여 사람들은 고도의 문화, 재능, 능력, 그리고 문명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장인(匠人)들은 금, , , 청동, 그리고 석재를 가지고 제품을 만들어내는 데 능숙했다. 그들은 금은과 보석들을 가지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예술작품들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구리와 주석을 가지고 어떻게 청동을 만드는지를 알았는데, 청동은 그들에게 더욱 강인한 금속재료가 되었다. 그들은 청동으로 컵, 항아리, , 헬멧, 전쟁용 도끼, , , 방패, 전차, 여러 장식물, 주방용품 및 가재도구, 악기 등을 만들었다. 그들은 또한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물레바퀴를 고안했다. 그들은 큰 물건을 이동하기 위해 수레바퀴를 사용했고, 전차에 바퀴를 달아 사용했다. 그들은 섬세한 옷감을 짰고, 석영모래로 유리를 만들었다. 고고학자들은 4,000년 이상이나 오래된 유약을 바른 석 공예품을 발굴해 내었다.

 

수메르인들과 그들의 후손인 바벨론인들은 그 다음 세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천문학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들이 많이 있다. 이 사람들의 초기 문명을 연구해 온 사람들은 바벨론인들이 행성들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이 학자들은 바벨론 인들이 4개의 목성(Jupiter) 위성들과 7개의 토성(Saturn) 위성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들이 망원경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하나, 만일 어떤 종류의 확대경이 없이는 이런 위성들을 알아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수메르 인들이 번영의 정점에 있을 때에는 그들의 사회는 부유하고 강력하고 복합적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최대 작품은 신전이라 부르는 거대한 사원이었다. 그것은 정 사각 기둥과 열주(列柱)들로 장식되었다. 그 사원의 전면은 적, , 백색의 기하학적 모형으로 된 모자이크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이 신전은 여러 층으로 되어있고 500,000평방피트의 넓이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폭 600피트(180m) 800피트(240m)의 넓이로서 도시에서 3블록 넓이에 해당하거나 미국 국회의사당만큼의 면적이다. 이것은 워싱턴 DC에 있는 아름답고 잘 건축되고 가장 큰 정부 건물 중의 하나만큼 크고 놀라운 걸작품 건물이다.

 

이 주인공들이 BC 4,000-3,000년 전에 원숭이 나라에서 별안간 인류의 역사의 무대로 튀어나왔고, 구석기-중석기-신석기 시대를 거치면서도 아무런 기록된 역사도 남기지 않고, 1-2백년의 짧은 기간에 기적 같은 창조물들을 만들어내고, 기록된 언어를 발전시키지도 않은 채 거대한 건축물들을 지었다고, 진화론자들이 그들의 역사책을 통해 우리의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대로 믿는 것은 전적으로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하고 비역사적이다. 만약에 진화론적 추정처럼 수십만 년 또는 수백만 년이라는 연대가 사실이라면, 이 사람들은 그 전의 수만 년 동안에 문학, 수학, 과학, 그리고 발명품들의 발달 없이 1-2백년 사이에 갑자기 이런 성취를 이룰 수는 결단코 없다. 10,00020,00030,000년 혹은 50,000년 전에 이들이 살았던 어떤 증거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그 증거를 확보하려고) 리키(Leakeys) 일당과 인간의 화석 사냥꾼들이 아프리카와 세계 도처에서 수백만 년 전에 살았다고 추정되는 인간의 화석을 찾아 땅 속을 뒤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오직 사냥꾼이나 이삭꾼들과 같이 지구의 여러 곳에 흩어져서 찾아내는 것들은 노아 홍수 때의 석회암으로 덮여 있는 원숭이와 다른 짐승들과 사람들의 화석들뿐이다.

 

일반적으로 역사책은 지구의 4대 문명이 각기 다른 4곳의 지구 온난 기후대 지역에서 BC 4,000-3,000 경에 발생했다고 말한다. 4대 문명발상지는 식량과 쉼터가 쉽게 확보되는 강 유역의 계곡이었다. 즉 이집트의 나일 강 유역, 메소포타미아유역인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계곡, 서북부 인도(메소포타미아의 동쪽)의 인더스 강 유역, 그리고 중국 북부에 위치한 황하유역 등이다. 괄목할만한 또 다른 지역으로는 팔레스타인 평원의 요단강 유역이 거론된다.

 

*참조 : The antediluvian patriarchs and the Sumerian King List

http://creationontheweb.com/content/view/1853

출처 : 앨버트 시퍼트의 [진화론의 비과학성 : 32가지 이유들] 번역

jarney S kim / 2012-05-10 게시

-출처

http://bitly.kr/?i=asOTr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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