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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말갈

2019.11.05 06:43

관리자 조회 수:5

말갈족은 고구려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중국의 수·vs 고구려 전쟁 기록을 보면 유독 말갈족 전사들이 눈에 띈다.

고구려군으로 참전한 이들은 어찌나 용맹했던지 중국 역사서에서는 '동쪽 오랑캐 중 최강'이라는 표현까지 할 정도다.

 

특히 당 태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온 645년의 침략 전쟁에서 말갈족 병사들이 눈부신 활약을 보이자, 후에 유독 말갈족 병사들만 3,300명을 집단 생매장시키기도 했다.

황제가 속해 있는 부대를 직접 공격했다는 죄목 때문이었다.

 

실학자 정약용은 "이때의 충격으로 말갈족이 발해의 건국을 직접 도왔다."라고까지 해석을 할 정도다.

 

고구려가 망한 뒤로도 말갈족은 고구려 부흥 운동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이들이었다.

고구려가 망한지 9년 뒤에 고구려의 옛 땅에 남아 있던 유민들의 저항이 드세지자, 당나라는 인질로 끌고 갔던 보장왕을 다시 고구려 옛 영토인 '안동도호부'로 보내서 그를 통해 유민들을 통치하고자 했다. 그러나 보장왕은 당나라의 의도와 달리, 속말말갈족과 내통하여

고구려 복국을 도모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모의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보장왕과 고구려 유민들은 다시 강제로 중국 오지로 끌려가게 됐다.

 

그러던 중 696년 요서의 영주에 끌려가 있던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들은 거란인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혼란을 틈타 집단 탈출하여 고구려의 옛 땅인 지금의 길림성 연변 부근에 발해를 세우게 된다. 이때 대조영과 그의 아버지인 걸걸중상, 그리고 말갈족의 추장 걸사비우가 이들을 이끌었다. 이후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들을 고구려를 계승한 후계국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말갈족은 뒤에 여진족으로 불리게 된 종족으로 만주족의 선조이다. 그들은 금나라를 세웠고 뒤에 청나라를 건국했다. 여진족이나 만주족이나 우리와 깉은 종족들이다

 

말갈족의 족보

삼국사기에 보면 무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생겨날 때부터 말갈족들은 한반도 곳곳을 휘젓고 다닌다.

1세기 경에 백제를 치더니, 2세기 경에는 신라를 치고, 3세기에는 다시 백제를 친다.

 

중국 사서에서는 말갈이라는 명칭은 563년에 처음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초반에 나오는 말갈은 그 말갈이 아니다.

 

흔히 '짝퉁말갈'이라고 해서 위()말갈이라고 하는데, 학계에서는 동예를 가르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강원도에 살던 동예족이 삼국사기 초반에 나왔던 말갈족이다. 그러나 6세기 이후 등장하는 말갈은 이른바 '진짜말갈'이라고 해서 진()말갈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거주하던 곳은 짝퉁말갈이 거주하던 강원도 산골짜기가 아니라, 백두산과 송화강, 흑룡강, 연해주의 삼림지대였다. , 유목민이 아니었다.

 

만주 동쪽은 대부분 타이가 숲의 삼림지대다.

우리는 흔히 말갈족, 여진족을 유목민으로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수렵-농경민족에 가까웠다.

 

말갈족의 계보에 대해서는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상고시대 숙신 5세기까지 읍루 6세기까지 물길 12세기까지 말갈 16세기까지 여진 오늘날 만주로 족보를 정리하고 있음이다.

 

말갈족들은 어떻게 살았었나?

실제로 시기 차이가 큰 여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숙신, 읍루, 물길, 말갈은 몇 가지 특징인 공통 문화가 있었다.

사서에 따르면, 이들은 예맥족 등의 농경족과 달리 반농 반수렵의 삼림족이었다.

(만주의 종족은 : 유목민인 동호, 농경민인 예맥, 삼림족인 숙신으로 나눠진다)

 

중국 사서에 나오는 이들의 주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부여인들과 생김새는 비슷했으나 언어가 달랐다. 언어가 달랐다는 것은 곧 문화가 달랐다는 의미다.

만주족은 유전적으로 한국인과 가장 닮았다. 다만, 언어적으로는 한국어보다는 몽골어에 가깝다.

삼림 속에 살고 땅을 파서 토굴을 짓고 살았다. 특히 이들은 반지하식 수혈주거를 하였는데 이는 겨울철 추위가 무척이나 혹독했기 때문이다.

집을 지을 때 지하로 얼마나 깊이 파고 들어가는가 하는 것이 부와 권력의 척도였다. 그래서 족장의 경우에는 사다리를 아홉 개나 놓고 내려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군장은 없고 읍락 수준의 촌장이 있었다. 인구가 만 명 이상으로 규합되지 않고 수천 명 정도의 읍락 부족들이 이합집산을 하고 있었다.

국가발달 수준으로 보면 초기 삼한의 소국들보다 못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더럽고 냄새가 많이 나고 변소를 집안 가운데 짓고 산다. 기록에 보면 집안 가운데에 변소을 두고 살았고, 오줌으로 세수를 했다고 한다.

대략 엄청나게 더럽게 살았던 것이다.

중국 사서에서도 말갈족들을 대단히 지저분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고구려인들은 위생 상태가 좋았다고 하니 이웃끼리 사뭇 달랐던 것이다.

문화적인 발달 수준은 매우 낙후됐다.

문화적인 발달 수준도 상당히 낙후되었는데 그 이유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변방에 있어서 중국의 선진문물이 들어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지역은 청동기, 철기 도입 시기가 상당히 느렸고 석기를 오랜동안 사용했다. 그래서 이 지역의 특산물로는 화살과 돌로 만든 화살촉이 유명했다. 중국에 대한 조공물도 돌화살촉과 화살이 주된 물품이었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이 많았다.

다만 이들의 사냥 솜씨는 상당했던 모양이다.

중국 사서에는 이들은 독을 바른 화살을 잘 쏘았으며 쏘면 백발백중이고 맞으면 즉시 독이 퍼져 죽는다고 적어 놓았다.

돼지는 매우 중요한 가축이었다. 돼지고기를 주요한 식량으로 삼았고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다. 혹독하게 추운 겨울철이 되면 모두 지하로 들어갔는데, 이때 돼지기름을 온몸에 발랐다. 일종의 방한용 크림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돼지는 말갈족들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재산이었다.

실제로 말갈족의 거주지를 발굴하면 당시 이들이 먹었을 돼지뼈가 다량 출토되곤 한다.

여름철이 되면 지하에서 밖으로 나와 숲 속에서 사냥을 했다.

그러다 추위가 닥치면 다시 지하 주거지로 들어갔다.

이들은 농경민과 달리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동하면서 살았지만, 일정한 범위 안에서

계절에 따라 이동을 했다는 점에서 목초지를 찾아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유목민과는 성격이 달랐다.

도둑질을 잘해 주위 나라에 근심거리다.

자연 환경이 원체 열악했기 때문에 이들 역시 유목민족들처럼 이웃한 농경민족을 약탈했는데, 고구려, 부여, 고려, 조선시대까지 농사를 짓고 살던 우리 민족은 내내 이들의 약탈을 당하곤 했었다. 이 때문에 사서에는 말갈족들은 상당히 호전적이라고 쓰여져 있다.

법과 풍속의 기강이 없다.

힘이 지배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경로사상이나 장유유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경험과 연륜을 중요시하여 노인들이 존중받는 농경사회와는 달리 말갈족들은 힘이 센자가 우선시 되었으므로 젊은이를 더 귀하게 취급한 사회였다.

 

오곡, , 담비 털을 생산했다.

만주 지역은 겨울철에는 기후가 매우 낮았지만 여름에는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고온 다습한 지역이다. 때문에 이곳의 식생은 스텝이 아니라 대부분 침엽수림이 드넓게 펼쳐진 티이가 지대로 주로 숲을 태워 화전을 하는 방식으로 경작지를 넓혀나갔다.

이곳에서는 오곡(기장, 보리, , , ) 생산이 모두 가능했고

베를 재배하여 여름철에는 삼베 옷을 입었고 겨울철에는 짐승의 털가죽을 입었다.

특히 담비가죽은 이들의 주요한 특산물이었다.

부여족과는 달리 음식을 먹을 때 그릇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략 손으로 먹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고대시대에 음식을 먹을때 도구를 사용했던 민족은 별로 없었다.

당시 일본도 손으로 음식을 먹었고 유럽은 무려 17세기까지도 대부분 그랬다.

지금도 전세계 인구 중 40%는 손으로 식사를 한다.

그런데 부여족이나 삼한 사람들은 옛부터 그릇과 도구를 사용하여 음식을 먹었다.

이들은 부여족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실제로 부여와 고구려 영토 안에는 여러 말갈 부족들이 살았다. 고려 시대에도 많은 여진족들이 고려 영토 내에 살았었다.

말갈인들이 보기에 부여인들은 자신들보다 문화수준이 높고 선진적인 생활을 하던 집단들이었다.

때로는 힘으로서 이들의 물건을 강탈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스스로 복속하면서 높은 문화 수준을 영유하고자 했던 게 전통적인 말갈족이었다.

그래서 발해라는 국가를 세우면서도 고구려 유민들은 인구의 소수를 차지했지만 지배적인 위치에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련의 기록들은 숙신, 읍루, 물길, 말갈족들에 나오는 몇가지 공통점들이다.

 

과연 이들의 족보가 맞을까?

숙신 읍루 물길 말갈 여진 만주

이 족보가 과연 맞을까?

일반적으로 쭉 그렇게 믿어왔었다.

그런데 최근 학계의 연구결과는 꼭 그렇지가 않다.

 

특히 숙신 읍루 물길로 이어지는 족보에는 각자 살고 있었던 위치도 틀리고 같은 시대에 공존하던 때도 있어서 과연 누가 누구의 조상이라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발굴, 보고된 자료들을 보면 한 개의 종족 집단이 시대에 따라 숙신, 읍루, 물길, 말갈 등의 명칭으로 달리 불렸던 것 같지는 않다.

1세기부터 6세기까지 숙신과 읍루, 물길이 거주하던 곳은 대략 이렇다.

 

그러나 7세기 이후 등장한 말갈은 이들 지역을 모두 포함하되, 북쪽 지역으로 더 확대되는

지역 범위를 지칭한다.

 

, 말갈은 숙신, 읍루, 물길 등의 후손이 중심을 이루되, 그 주변에 거주하던 사람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말갈은 아래와 같이 크게 7개 부락으로 이뤄졌었는데 아래와 같았다.

 

물론 이걸 다 알 필요는 없다. 다만 속말, 백산, 흑수말갈 정도는 알고 있는 게 좋다. 여기서 백돌과 속말은 물길+부여의 혼혈 후손이고 백산은 읍루+옥저의 혼혈 후손이다. 즉 이들은 단순한 말갈족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피도 어느 정도 섞인 말갈족이라는 뜻이다. 때문에 말갈은 숙신계 민족만을 지칭하기보다는 일종의 범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을 편의상 말갈계 종족이라 칭하기도 한다.

 

고구려가 말갈 부족을 흡수하는 과정

7세기 이전까지 동쪽 만주 일대에는 중국의 세력이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말갈계 종족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선진 문물을 전파해 준 세력은 부여와 고구려였다.

특히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인연이 깊었다.

3세기 이래 말갈의 거주지와 고구려의 영역은 만주 일원에서 일정 기간 동안 서로 겹치고 있었다. 고구려가 말갈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직·간접적으로 통치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말갈족은 단순히 지배를 받던 세력은 결코 아니었다.

 

고구려가 망하자 대부분의 말갈족도 구심점을 잃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7개 말갈 부족 중 고구려가 망하자 6개 부족이 동시에 사라져버린다.

 

고구려 시절부터 독자적인 노선이 강했던 북쪽의 흑수말갈만 따로 세력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가 흔히 생각하는 지배-종속 관계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말갈인들은 스스로를 고구려의 일원으로 생각했고 토착 고구려인들 역시 이민족들에게 배타적이지 않고 개방적이었다는 의미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가 망한 뒤에도 고구려의 피 점령지였던 낙랑지역에서 통일신라 시대 내내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말갈인들 스스로도 고구려 부흥운동에 주도적으로 발 벗고 나서게 된 것이리라.

이는 말갈족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얼마나 오랫동안 고구려라는 나라 안에서 살아왔는지 살펴보면 대충 감이 잡힌다.

 

백산말갈

백산말갈은 백두산 일대에 터를 잡고 살던 말갈족들이다.

이 백산말갈족은 고구려 건국시기 때부터 고구려인들과 마찰이 잦았다.

초기에 압록강 중류에 살고 있던 토착 고구려인들은 이들 백두산의 사나운 말갈족을 두려워했지만, 말갈족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이후로는더 이상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말갈족들도 다시는 고구려를 침범하지 않았다.

이후 고구려는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들 백산말갈족을 세력 하에 두게 되는데 이때가 1세기 후반 무렵이었다.

 

1세기 후반 고구려 영역 : 백산말갈은 이때부터 복속되었다.

이후 이곳은 600년간 고구려의 영토로 유지되면서 고구려의 영토 중 어느 곳보다 더

안정적인 영역으로 운영되게 된다. 사실 민족이라는 것은 100년만 같이 섞여 살아도

대부분은 완벽히 동화를 하기 마련인데, 600년의 시간이라면 백산말갈족은 그냥 고구려인들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속말말갈

옛 부여의 영토였던 곳에 부여의 힘이 약해지자 말갈족이 하나 둘씩 들어와 살게되는데,

4세기 이후 부여가 망하자 고구려가 이 일대를 편입하면서 자연스레 속말말갈족도 고구려의 지배를 받게된다 .(이때 속말말갈족은 이미 부여+말갈의 혼혈인들이었다.)

이들도 300여년 동안을 고구려의 지배 속에 살게 되다보니 사실상 완벽히 고구려인으로 동화되게 된다.

사실 발해를 세웠던 주역들도 상당수가 속말말갈 출신들이었는데 이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 별종이다. (구당서)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속했던 이들이다. (신당서)

발해는 본래 '말갈'이라 부르며 고구려의 별종이다. (오대사)

 

신라도 발해가 건국된 후 초기 100년 동안 발해를 '속말말갈'인들이 세운 나라 쯤을 생각했던 터이다.

다만 속말말갈족들은 애초에 부여 혼혈인들로서 이후로는 고구려에 완벽히 동화되며 고구려의 직접지배를 받고, 고구려 언어를 썼던 집단들이었다. 고로 발해가 속말말갈인들이 세운 나라라고 함은 곧 고구려인들이 세운 나라라는 뜻이 된다. (참고 : 김현숙 말갈 연구 논문)

 

북부지역

고구려는 영토를 확장하면서 백돌, 안거골을 점령하는데 이곳에는 부여 유민들도 상당수 있었던 곳이다. 그래서 간접+직접을 혼용해서 통치하게 된다. 다만 가장 나중에 취하게 되는 호실, 불열은 간접통치로 영향력만을 행사하게되고 해당 말갈족에게는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하게 된다.

 

아마 이곳은 고구려 말기까지 고구려인들과 언어도 달랐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런가하면 흑수말갈은 나갔다, 들어왔다를 반복하던 세력으로 상당히 독자성이 강했고 고구려는 이곳을 한때 간접 지배 했던 적이 있었던 정도다.

 

말갈이 고구려 부흥 운동에 앞장섰던 이유는?

고구려는 말갈족을 통치함에 있어 필요에 따라 직접통치를 하기도 했지만 백산, 속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말갈족들은 기존의 생활방식을 유지할 수 있게 한 상태에서 집단적으로 간접 통치를 했다.

말갈 부족 중에는 역시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이 가장 핵심적이었다. 이 두 말갈은 고구려 영역 안에 들어와 살게 된 시기 자체도 오래 되었고 지리적으로도 가까웠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은 농경족인 토착 고구려인들과는 달린 군사적인 면으로 의무를 다했다. 쉽게 말하면 세금을 적게 내는 대신에, 유사시 몸빵에 앞장섰던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말을 잘 타고, 호전적인 이들의 기질을 잘 살려서 특수 부대원으로서 전쟁터에서 활약하게 했다. 수당 전쟁 기간 동안 활약했던 말갈군이 바로 이들이었다.

 

말갈군들이 왜 중국과 맞서 그토록 처절하게 싸웠는지, 또 고구려 멸망 후에도 왜 그토록 고구려 부흥운동에 앞장섰는지, 그리고 왜 그들이 발해를 세우면서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스스로 말했는지는 모든 이유가 바로 말갈족 역시 엄연한 고구려 사람이었던데 있었다.

 

그런데도 흔히 말갈이라고 하면 다른 종족이라고 해서 고구려와 관계 없는 존재라고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말갈은 발해 멸망 이후부터는 우리 역사와 거리가 멀어졌다.

여진이라는 이름으로 금, 청을 세우면서부터는 그들의 역사는 완전히 중국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고구려와 발해가 존재하던 당시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고구려와 발해의 주민이었다. 고구려에는 종족 계통이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생활 방식이 다른 사람들도 함께 살았다. 원래 고구려를 건국한 종족은 예맥족이었지만, 이들 외에 중국인, 낙랑인(중국-고조선혼혈), 백제인(한성백제),선비족, 거란족 등 여러 계통의 사람들이 고구려 주민으로 살았던 것이다.

이는 고구려의 성장과 발전 과정을 이해한다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중국 학자는 고구려 영토에서 순수한 고구려인은 20%밖에 안된다는 논문도 발표했던 터이다. 심지어 당시에는 서역인들도 꽤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분 벽화에 그려진 생활 풍속도에는 코가 큰 서역인들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각저총과 수박회의 서역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들

고로 고구려는 오늘날로 치면 다민족 국가였던 것이다.

현재 우리는 한반도라는 고립된 지형에 살기 때문에 다민족이라는 말에 매우 친숙하지 못하지만 고구려의 영토는 대륙과 연계되어 있어 애초에 많은 외래인들의 유출입이 있어왔던 것이다. (원래 대부분 국가들의 역사는 고구려와 비슷하다. 한반도가 예외적인 현상)

그리고 이들 다양한 구성원 가운데 단연 두드러진 존재가 말갈족이었다.

이들은 수적으로도 다수를 차지했고, 생활 풍속면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이들은 수당과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고구려 사람으로서 자기나라, 자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다.

 

4세기 이후 중국인들이 고구려로 집단 망명한 이유

4~5세기 중국의 대 분열시기 고구려 땅에는 상당수의 중국인들이 유입되게 되는데

당시 중국인들이 고구려를 택했던 까닭은 가까운 탓도 있었지만, 주변 국가들에 비해 정치적으로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고구려는 소수림왕이 집권한 이후로 내부적으로 통치력을 강화하던 시기였다.

반면에 중국 대륙은 여러 왕조가 명멸해 가는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커다란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삶은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중국인이나 선비족 정치 망명객들이 번번히 고구려로 이주했던 것이다.

우문부왕 일두귀, 북연 왕 풍홍, 사마 동수, 유주사 진 등 거물급 인사들이 당시 줄줄이 망명을 해왔다. 물론 수십만명의 중국인 유민들도 당시 집단 망명을 해왔다.

 

특히 4세기 후반 소수림왕이 집권하던 시절 고구려는 중국인 유민들을 대거 수용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 망명객들을 고구려의 관습법에 따라 지배하기는 무리가 따랐다. 따라서 모든 구성원들에게 적용시킬 보편적 율령체계가 필요했고 또 이들을 사상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해

불교라는 종교가 필요했다. 때문에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국가적으로 진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고구려의 동화 정책에 의해 유민들은 서서히 고구려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 유민들은 정치적인 배경이 다양하고 또 중국의 선진문물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발달된 제도와 문화를 보급하여 고구려의 국력향상에 기여했음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때문에 소수림왕 이후 고구려는 유례없는 전성기를 맞보게 되니 바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치세기였다.

고구려는 이들 유민들을 포용력 있게 받아들였고 또 거물급 망명자에게는 되도록 자율권을 부여하고자 했다. 특히 4세기 이후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된 낙랑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서 중국인 망명 정치가들을 자주 활용했다. 동수, 유주자사 진 등이 대표적이 인물이었다.

안악 3호분이나 덕흥리 벽화 고분에 나타나는 생생하고도 다양한 중국적 요소들은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당시 지방에 해당되던 평양 주변에서만 1천기가 넘는 중국식 묘제인 벽돌무덤도 이러한 정치, 사회적 환경 속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고로 고구려가 넓은 영토를 획득하면서 지역적 강자로 오랫동안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고구려인 특유의 개방성과 포용력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마르칸트 지역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의 고구려 사신 (맨 우측 두명)

그리고 이는 지독한 차별정책으로 일관하던 신라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출처:http://bitly.kr/xbzJ11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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