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한국어

한알회

구물 장당경 문화와 압록18성

2019.10.31 06:45

관리자 조회 수:3

구물 장당경 문화 다시 살피기

구물 장당경문화 bc425~bc238

 

구물장당경문화 bc425~bc238

44세 구물,45세 여루, 46세보을,47세고열가단군

 

bc42643세 단군 물리勿理때에 우화충의 반란으로 인하여 낙랑樂浪 도성을 포위하니 겨울에 단군 물리는 배를 타고 해두海頭로 피난하여 죽었다.

 

bc425년 백민성의 욕살 상장 구물이 장당경에서 44세 단군으로 즉위하여 압록 18의 원조로서 새 단군에 즉위하고 대부여를 세웠다.

 

백민성은 창도현昌圖縣 북쪽 팔면성八面城이다. 요나라 때 3차 한주韓州를 두었는데,금나라사람 왕적은 여기에 가서 단금상檀金像에 향을 올렸다.

 

단군 구물의 사당이 있었던 것이다.

 

상춘의 구월산 장당경은 뒤에 44세 단군 구물에 의해 대부여조선의 수도가 되었고 그 뒤에는 고주몽의 수도가 되었다.

 

고력산古歷山이라고도 했는데 고대 역사가 남겨져 있는 곳이고, 장당경은 고대 역사를 돌에 기록하여 보관하던(-) 곳으로 고려된다. <대변경大辯經>에서 44세 단군 구물의 장당경은 개원開原이고, 평양平壤으로도 불렀다고 했다. (藏唐京 今爲開原 亦稱平壤)

 

[한단고기-번한세가]에서 구월산 삼성묘를 상춘 주가성자朱家城子라고 하였다.

 

구월산은 지금의 창도현昌圖縣 하이대자향下二臺子鄕 광정자산光頂子山(532m)이다. 산 입구에 삼선묘三仙墓라는 것이 실제로 전해온다. 즉 삼성묘다. 하이대자향에는 고구려 석성도 남아 있었다.

 

[한단고기-고구려국본기]에서 고주몽의 도읍지 눌현訥見도 상춘 주가성자朱家城子라고 했다. 따라서 눌현과 장당경은 같은 곳이다. 주가성자는 지금의 천두진泉頭鎭 초가구(肖家口).

 

고두막한의 졸본성과 고주몽의 졸본성(눌현성), 그리고 고국원왕의 동황성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소수림왕의 초문사도있었다. 뒤에 발해 서경압록부가 있었다.

 

1125년에 기록된 [허항종행정록許亢宗行程錄]에서 당시 개원인 함주의 바로 북쪽에 평양이 실재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허항종이 함주를 떠나 북으로 향하는데 그곳이 평양이라면서 동쪽으로 천산을 바라보았다고 하였다.

 

離咸州 卽北行 州地平壤 居民所在成聚落 新稼始遍 地宜穄黍 東望天山, 金人云彩 此新羅山

 

즉 장당경의 별칭인 평양이 개원 북쪽에 존재한 것이 고증되는 것이다. 여기서 천산은 광정자산의 의미다.

 

한편 왕적의 [요동행부지]에서는 함주咸州(=개원開原)의 함평현 함평숙부에 이르러서 주변의 산아래에서 심대한 고구려 폐성을 발견하고 고구려의 망국 천년한을 읊어대며 함원전含元殿을 바라본다. 폐성터의 함원전은 궁전의 흔적이니 고구려 도성 자리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고 이는 고주몽의 눌현성 위치를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개원시開原市 북쪽 창도현昌圖縣의 옛이름은 몽고어로 상달常達額勒克였는데 이는 녹색 초원의 의미다.

 

한민족 고대의 상춘이 몽고시대 상춘달로 변했던 것이다. 중국발음으로는 창, , 이 모두 "chang"이다.

 

구물丘勿 단군은 해성에 이궁離宮을 지어 역시 평양이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이는 3세 단군가륵이 세웠던 평양과 가까운 곳으로서 단목국 수도가 있던 법고시에 세원진 평양으로 고려된다.

 

46세 단군 보을은 장당경 도성에 불이 나서 해성의 이궁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단군왕검 고조선문화 참조)

 

사면성 서쪽 보력진寶力鎭 장발향長發鄕에서 청동기시대, 전국시대 고묘 등의 유적지가 발굴된다.

 

장발향에서 나온 3자루의 청동검은 여러 형식이다. 하나는 비파형 청동검에서 보는 “T”자형 청동손잡이를 달았지만 검날이 비파형이 아닌 북방식 세형동검이다. 이는 중군, 즉 서요하西遼河 상류 식이다. 또 하나는 공병식 청동검으로서 가운데에 나무 자루를 박아 넣는 원형 구멍이 있다.

 

이것도 중군 형식으로서 긴 창이 된다.

 

또하나는 검날이 육릉형이며 타격석을 끼우는 것이었다.

 

청동화살도 삼릉식다. 삼릉식 청동화살은 임호林胡의 근거였던 내몽고 양성현凉城縣, 포두시包頭市 등에서도 나왔다.

 

그외 철제 기구가 많이 발굴된다.

 

이 장발향 청동검과 비교되는 것이 심양시瀋陽市 정가와자鄭家窪子의 세 곳에서 발굴된 청동검인데, 청동제 가중기는 비슷하나 거기서는 세 자루의 검날이 모두 비파형이다.

 

팔면성의 어원은 그곳 성터에서 글을 판독할 수 없는 팔면능형八面稜形의 갈석碣石(=石經幢이라고도 한다)의 발굴에 의한 것이다.

 

최근에 발견된 수성왕 천도교서 갈석, 동천왕 양위교서 갈석, 중천왕 즉위교서 갈석 등과 같은 팔면능형 갈석은 중요한 고대 유물로 추정된다.

 

팔면성은 3차 한주韓州 치소였다가 3차 한주가 이수현으로 옮겨간 뒤에는 유하현柳河縣이 되었다.

 

금나라 한주자사韓州刺史, 동경銅鏡과 유하현柳河縣의 기물器物이 팔면성에서 발굴되었었다.

 

, 한주라는 지명은 원래 고리국藁離國 고지였던 요하遼河 서쪽 창무시彰武市 1차 한주에서부터 옮겨온 것이다.

 

금나라때 [요동행부지]에서 1190년에 이 팔면성에 단금상檀金像이 있어서 제사(妙香供旃檀金像)를 드렸다.

 

단금상은 단검상檀檢像의 기록으로 고려된다. 팔면성 아래 구가둔丘家屯을 보면 단군 구물丘勿이 본래 백민성출신이라서 장당경에 도읍하고서 백민성 아래에 묻힌것으로 고려된다.

 

 

대창홀아하大創忽兒河와 소창홀아하小創忽兒河가 발원하는 사평시四平市 동쪽 탑자산塔子山(=400m)에는 연원을 알 수 없는 고대 탑이 있었다. 구월산 장당경 탑이 여기도 있었는지 알수없다.

 

45세 단군 여루 때인 bc365년에 연나라와 제나라가 쳐들어왔고 운장에서 막았다. 이 때 번조선, 막조선, 조선이 합세하여 막는데 진조선은 낙랑이다. 46세 단군초에 번조선왕이 연나라 자객에게 죽고 기후국의 기후가 번조선왕이 되었다.

 

bc304년 장당경이 불타니 해성의 평양으로 도성을 옮겼다. 해성은 단군 물리가 와서 죽은 곳이다.

bc296년 한개韓介가 객좌에 있던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도성인 해성 평양을 침범하여 단군이 되려하니 해성에 있던 단군 물리의 현손 고열가가 일어나 물리치고 47세 단군이 되었다.

 

bc 239년 북부여 해모수가 군대를 일으키더니 수유의 군대와 옛서울 백악산 아사달(진한 소밀랑 대전자 문화 참조)을 차지하였다.

 

고열가 단군이스스로 물러나 아사달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하는데 후에 영품리왕이라고도하였으니 영고탑 영주로 피신한 것으로 고려된다.

 

고열가도 낮춘 이름 고리의 추장(고리가)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그의 후손이 장당경에 다시 졸본부여를 세운 고두막한이다.

출처: https://eastpeak.tistory.com/3958

-------------------------------------------------------------------------------------------------------

서압록, 동압록, 고리국

1911년에 계연수라는 사람이 고기(古記)들을 한데 엮어서 내놓은 '환단고기'는 당시의 독립투사였던 홍범도와 오동진의 도움으로 인식되어 독립투사들에게 읽혔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연수라는 사람은 자신이 엮은 환단고기라는 책을 경신년(1980)에 가서야 세상에 널리 공개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인쇠되어 나왔던 환단고기는 독립투사들 사이에서는 읽혔지만 일반인들에겐 알려지지 않았던 책인 것이다. 일제치하였기 때문이겠지만 왜 하필 경신년에 가서야 널리 세상에 공개하라 했을까? 그때에야 해방을 맞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로 하여금 환단고기를 엮어내게 한 하늘의 계시가 있었던 것일까?

 

과연 계연수가 예상했던 대로 환단고기는 1980년대에 들어서야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정신세계사에서 두 권의 '한단고기'를 출판함에 따라 환단고기는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그렇게 우리의 소중한 고기가 널리 읽혀지게 되어 우리의 초고대사를 훤히 알 수 있게 되었는데도 왜 몽고를 한()족의 조상인양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몽고의 모국(母國)이었던 고리국(高離 혹은 古里)이 어떤 나라였는가를 알아보자.

 

서압록하는 고리의 옛 나라 땅이다...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 사람이었다.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의 땅이었다.

 

갑신원년 황제의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하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의 몽고족이 바로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위의 세 가지 기록은 고리국이 어디쯤 있었는가를 알려주고 있고, 마지막 기록은 4세 단군 오사구가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 즉 몽고의 우두머리로 봉했다는 기록이다. 은 어리다는 뜻이기 때문에 동생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몽고는 단군조선의 4대 단군 때에 갈라져나간 단군조선의 분봉국이었던 것이다. 동생 오사달이 살았던 지역이 서안평에서 서압록하 사이에 있었던 고리국이었고 단군조선의 한 분봉국이었는데 북쪽으로 이주하며 몽고리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다. 현재의 바이칼호 지역과 몽고지역의 부족들이 자신들의 조상이 고리국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고 한다.

 

그러면 몽고의 모국인 고리국이 위치했던 서압록하란 어떤 강인가?

 

압록(鴨綠)이란 지명은 단군세기에 한 번 나오고 단군조선이 망한 후 이어서 일어난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시대에 자주 거론된 지명이다. 압록하(), 즉 압록강인데, 서압록, 동압록이라 분리되어 불린 경우가 많다. 한반도의 압록강은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흐르며, 동쪽으로 흐르는 강은 두만강이라 부르고 있다. 그것이 서압록, 동압록이었을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분명한 기록들이 있다. 그러면 압록하에 관한 기록들을 찾아보자.

 

을묘 6(BC 426), 융안의 사냥꾼 우화충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 수만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켰다....이 해에 백민성의 욕살 구물이 어명을 가지고 군대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을 점령하니 구지(九地)의 군사들이 이에 따라서 동서의 압록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위의 기록은 '단군세기'의 기록으로써 43세 단군 때에 모반자 우화충에 의해 도성이 함락되었지만 동,서의 압록 18성이 모두 힘을 모아 물리쳤다는 기록이다. 현재의 압록강변에 18개의 성이 있었단 말인가? 그렇게나 많은 성이 현재의 압록강변에 있었을까? 구지(九地)의 군사들이란 구환(九桓), 구려(九黎), 구이(九夷)와 같은 뜻으로 당시의 단군조선 전 관경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단군조선의 심장부는 송화강변에 있는 아사달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압록강변에 18성이 모두 존재했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서압록하는 고리의 옛 나라 땅이다...

 

서경(西京)의 압록부는 본래 고리국이요....지금의 서요하는 곧 옛날의 서압록하였다.

 

위의 기록은 발해국의 5() 중에 서쪽에 있었던 서경이 본래는 압록부라 불리던 곳이고 발해국 시대에 서요하라 불리던 강은 본래 서압록이라 불렸다는 예기다.

 

대무신왕 20, 제는 낙랑국을 습격하여 멸망시켰으니,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 속했으나 오직 해성의 남쪽, 바다 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동압록의 황성에 광개토왕 경적비가 있다...

 

위의 두 기록은 동압록하에 관한 기록이다. 요하가 요나라 이전에는 압록하라 불렸다는 기록이 중국의 요사(遼史)에도 기록되어 있다 하니 환단고기 속의 서압록하는 현재의 요하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서압록 동압록이란 무엇인가? 동압록의 황성에 광개토왕의 비가 있다고 했는데, 광개토왕 경적비가 있는 현재의 집안 지역은 요하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그렇다면 동압록이란 현재의 압록강을 가리킨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광개토왕의 경적비가 있는 집안은 압록강변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요하는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압록이라 불렀고 지금의 압록강은 그 반대편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동압록이라 불렀던 것이다.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 속했으나 오직 해성의 남쪽 바다 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만주에 도읍지를 가졌던 고구려가 단군조선의 옛 땅이었던 한반도를 되찾기 위해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국을 쳐서 현재의 압록강 이남까지 점령했으나 오직 해성의 남쪽, 즉 평양의 남쪽지역은 정복하지 못했다는 기록인 것이다. 해성(海城)이 동압록 남쪽에 있다 했으니, 사학자들이 추정하듯이 해성이 요동에 있지 않았다는 증거도 된다.

 

혼란을 주는 또 하나의 강은 구려하(九黎河).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의 땅이었다....

 

연타발은 졸본 사람이다....은밀하게 주몽을 도와서 창업입도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더니 고주몽이 북부여를 점령할 때에 양곡 5천석을 바쳤다....

 

요동이란 단어 때문에 서안평이 지금의 요동반도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은 것이다. 그러나 고문서에서의 요동은 요동반도 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요하의 동쪽지역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지금 서평(서안평)이 있는 지역은 요하의 동쪽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리고 연타발이란 사람이 구려하에 이르러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해서 큰 돈을 벌었다고 했다. 그러면 구려하는 어디쯤 있었을까?

 

소금은 보통 강에서는 생산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사해처럼 물이 흘러들기만 하고 빠져나가지 않는 호수에서만 소금이 생산된다. 바로 그런 호수가 송화호일 것이다. 송화호는 요하와 송화강 사이 남쪽지역에 있으며 이 호수로 흘러드는 강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현재 송화호로부터 빠져나가는 강은 단 하나밖에 없다. 송화호에서 소금이 생산되었다면 과거에는 완전히 봉쇄된 호수였는지도 모른다. 구려하란 송화호로 흘러드는 강들 중에서도 남쪽 지류를 가리킨 것이 아니었나 한다. 남쪽의 구려하는 서안평에 가깝고 서안평과 구려하 모두 옛 고리국의 본거지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http://cafe.daum.net/moonsusa/4p1R/3056?q=%EC%95%95%EB%A1%9D%2018%EC%84%B1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삼성(三聖)시대계보(소씨중심) 양희춘 2018.03.22 161
공지 유라시아 대륙의 지리적 특징과 기후[펌] 양희춘 2018.03.07 52
공지 역사와 성씨 연구 관련 사이트 소개 양희춘 2018.02.10 141
공지 개천민족_이족(夷族)의 문명 발생과정 양희춘 2018.02.08 51
공지 [삼성(三聖)시대역사]한인7대한웅18대단군47대 양희춘 2018.01.23 56
167 용성국자료③ [1] 관리자 2019.12.04 4
166 용성국관련자료② file 관리자 2019.12.03 15
165 용성국관련자료①왜[倭]..용성국[龍城]..적녀국[積女國]| [1] 관리자 2019.12.01 5
164 동몽골&부여 관리자 2019.11.30 3
163 신화추적 역사 관리자 2019.11.28 4
162 평양 강동군 구빈(九賓)마을 왕림고개 전설 [1] 관리자 2019.11.12 4
161 만주족(여진족)_문수보살 관리자 2019.11.10 9
160 나나이족[허저족(赫哲族)] 관리자 2019.11.08 5
159 [역사자료]고열가단군전후시대적배경자료⑤ 관리자 2019.11.07 1
158 고구려&말갈 관리자 2019.11.05 5
157 [역사자료]고열가단군전후시대적배경자료④ 관리자 2019.11.01 3
» 구물 장당경 문화와 압록18성 관리자 2019.10.31 3
155 도산국(塗山國) 관리자 2019.10.28 3
154 말갈인 관리자 2019.10.20 3
153 [단군시대]왕수긍설화와 회맥조선 관리자 2019.10.12 3
152 단군조선 건국과 아사달 위치[펌] 관리자 2019.10.11 4
151 조이_산해경의 조이관련 외 관리자 2019.10.08 49
150 조이_인두조신 가릉빈가 file 관리자 2019.10.07 6
149 [단군시대]고열가단군전후시대적배경자료③ 관리자 2019.10.06 1
148 조이_조인(鳥人)자료 모음 관리자 2019.09.2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