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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_산해경의 조이관련 외

2019.10.08 06:13

관리자 조회 수:48

고구려 고분벽화의 신화·도교적 제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중국과 주변문

원 제목: 고구려 고분벽화의 신화·도교적 제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중국과 주변문화와의 관계성을 중심으로(정재서)

 

깃털 모양 금장식 절풍모를 쓰고

흰색 무용신을 신고 망설이다

삽시에 팔을 저으며 훨훨 춤을 추어

새처럼 나래 펼치고 요동에서 날아왔도다.

이백, [고구려]

. 왜 고구려인가?

최근 수년간에 걸쳐 일기 시작한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대중매체의 작용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미증유'라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열렬한 것이었다. 발해 등 과거 우리의 북방문화에 대한 관심도 같은 차원에서 흥기된 것이라고 보여지지만 기왕에 없었던 이러한 반응은 어떠한 국민적 심태(心態), 나아가 어떠한 문화적 동기로부터 유래하는지 한 번 성찰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실상 고구려 고분은 오늘에 이르러 새로이 발견된 것은 아니다. 대부분 이미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지만 우리는 새삼스러운 감동으로 그것을 보았고 학자들은 진지하게 다시금 설명하는 자세를 취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구려 문화에 대해 갖는 향수와도 같은 이러한 심정의 실체는 무엇인가? 고구려는 과연 한국판 시오니즘의 본향(本鄕)인가? 혹은 민족의 잠재의식 속에 자리잡아온 영원회귀의 고향 같은 존재인가?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심정과는 무관하게 발해는 중국의 한 지방정권으로서 중국사의 일부에 편입되어 있고 고구려 벽화의 허다한 신화적 제재들은 한국신화보다 중국신화의 체계 속에서 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고구려 국토의 대부분에 해당되는 만주 일대는 오랜 기간 중국과 주변민족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경합관계를 유지해왔던 지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방이 아닌 상호영향관계 속에서 각자의 문화적 특성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동안 격절되었던 대륙과의 관계가 최근 재개되면서 고구려에게 주어진 열띤 관심은 우리가 한때 공유했던 대륙문화에 대한 향수의 발현일 수도 있겠으나 이제 정치적, 문화적 교류가 정상화되어가는 시점에서 문화적 변별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의 발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문명충돌론에서도 한국문화는 변별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일본문화와 대립되는 중국문화에 내포되어 있을 뿐이며 이러한 인식이 사실상 오늘날 밖에서 보는 한국문화의 현주소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고대문화에 대한 근원적이고도 심대한 왜곡은 중국의 전통적인 중심주의적, 구심적 문화사관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은 식민지 시대 민족사학자들의 비판이 처음에는 일제 관방학자들에게로 향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중국사가들에게로 귀착되었던 사실로부터도 엿볼 수 있다. 중국의 중심주의적 문화사관은 과거 동아시아 사회의 내부질서와 중국 자체의 존립을 위해 필요한 것일 수도 있었으나 오늘날 이러한 관점은 적어도 상고사에 관한 한 성립될 수 없으며 더군다나 이 관점의 적용은 주변국에 대해 반사적으로 문화적 변별성의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기 때문에 금후의 호혜적 문화의식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의 왜 고구려인가? 라는 물음은 결국 중국과 주변문화와의 관계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필요성의 제기이며 이에 입각한 새로운 문화해석의 욕구와 상관된 질문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고 여기에서 다시금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상의 수많은 신화적 제재의 문화적 성격과 의미에 관한 문제이다. 사실 고구려 고분에 대한 검토는 그간 한··일 삼국의 유관분야 학자들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왔고 상당한 연구물량의 축적 위에 고분의 기원·성립·구조·벽화 내용 등의 문제에 대해 우리는 기본적인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의 논의 역시 고맙게도 이러한 선행의 성과를 딛고 출발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발전적인 견지에서 기존의 연구를 돌파하기 위해 종래의 주요한 연구경향들에 대해 비판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우리는 그중의 하나로 주로 중국측 학자들에 의해 강조되어온 벽화 신화에 대한 중원영향론을 들기로 한다. 우리는 고구려 고분의 기원·형성·구조·양식 등에 미친 한대(漢代) 및 위진(魏晋) 남북조(南北朝)에 걸치는 중원문화의 영향에 대해 충분히 긍정할 수 있다. 비교문화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고구려 고분이 일정한 토착성을 바탕으로 한문화의 세례를 받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양식이나 기법상의 문제는 그렇다 하더라도 토착문화의 본질적인 내용에 이르러서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정치적 혹은 문화적 세력관계로서 규정지을 수 없다. 신화란 인류의 보편적 심성의 담지체임과 동시에 종족적 특색을 가장 잘 현현한 서사물이므로 우리는 특히 벽화 신화에 대해 일방적인 영향론의 관점에서 읽는 일이 얼마나 자의적인 독해방식인지 알 것이다. 중국 학계의 이러한 관점은 원래 중원과는 별개의 문화였던 그들의 이른바 동북문화를 중원문화와의 연계선상에서 파악함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지배권을 확실히 해두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한국학계의 이에 대한 해석적 입장이다. 북한 학계는 고구려 문화의 독자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해석이 오히려 객관성을 잃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자성을 지탱할 논리적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여 선언적 명제를 반복할 뿐이다. 남한 학계는 비교적 객관 자료를 많이 확보하고 실증적인 견지에서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다 하겠으나 신화해석에 관한 한 거의 평면적으로 중국측의 견해를 답습하여 사실상 중원영향론을 묵시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으로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벽화 신화에 대한 지나친 불교적 관점에 의한 해석 경향이다. 이 점에 관해서도 실제 고구려 고분의 구조·양식·벽화 내용 등에 미친 서역(西域) 및 위진 남북조 불교의 커다란 영향을 결코 가볍게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해석의 편향성을 경계하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문제를 제기해보는 것이다. 한국 학계에서의 이러한 경향은 아마도 불교학의 농후한 분위기 속에서 성립된 일본 동양학의 관점을 여과없이 수용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가령 일본 도교학을 예로 든다면 초창기 멤버가 대부분 불교학자들로 불·도 교섭사 연구에서 도교학으로 전향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일본 도교학의 한계는 동북아의 토착종교인 도교를 도교 자체로서 보지 않고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거나 도교를 항시 불교에 대한 비교하위(比較下位)적인 입장에서 보고자 한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대한 해석에서 불교학 중심의 이러한 도식주의는 거칠게 말해 연꽃 문양만 있으면 다 불교로 설명하고자 하는 식의 해석 기제를 낳을 수도 있다. 그 결과 벽화에서 표현된 고구려인의 세계관·내세관 등을 다양한 층위에서 읽지 않고 불교적 취지로 쉽사리 귀결시키게 된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문제는 고구려 고분 벽화 연구 뿐만 아니라 중국학 전반에 있어서도 극복해야 할 현안이기도 하다. 불교 중심주의는 근대 초기 서구 콤플렉스에 걸렸던 지식인들 및 중국문명의 내재발전을 인정치 않으려는 서구학자들에 의해 주장된 중국문명의 인도기원설 내지 서방기원설과 맞물려 강화되어 왔으며 이러한 경향은 최근까지도 중국문명의 고유성을 위협했다. 가령 문학사 분야의 경우 최근 미국의 빅터 메어(Victor Mair)는 중국소설의 기원에 관한 논의에서 중국인은 불교 전입 이후 인도문화의 환상성과 낭만성을 접하면서 비로소 허구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고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소설을 창작할 수 있었다는 요지의 주장을 함으로써 많은 논란을 야기한 바 있었다. 결국 지나친 불교 중심주의에는 두 가지 예기치 않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 하나는 불교학 중심으로 발전해온 일본 동양학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소지이고 또 하나는 서구 학자들이 자주 시도해온 중국문명의 인도기원설 내지 서방기원설에로의 함몰 위험성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지적한 바 고구려 벽화 해석상에 있어서의 두 가지 편중된 경향중원영향론과 불교 중심주의을 극복할 수 있는 소망스러운 해석의 방향은 과연 무엇인가? 우선 중원영향론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오늘날의 영토·국가개념에 의해 중국신화를 단일한 총체로서 보는 입장을 거부하고 고대 동북아에 있어서의 다양한 신화 권역(圈域)의 존재를 상정하면서 고구려 신화와의 관계성에 유의해야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국신화를 다원적 문화론의 입장에서 다체계적으로 파악하고 고구려 지역문화를 중원문화와의 경합적 관계 속에서 이해할 때 벽화 신화에 대한 일방적인 중원영향론은 해체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여기에서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고구려 벽화상에 적지 않이 출현하고 있는 {산해경} 신화의 제재이다. 그 동안 국내 학계의 벽화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한 고찰이 전무했었다는 것은 기묘한 현상이기도 하지만 중국신화에 대한 피상적인 파악과 그로 인해 중국학계의 전반영향론을 그대로 접수할 수밖에 없었던 국내 학계의 저간(這間)의 사정을 짐작케 하기도 한다. 그러나 흔히 중국신화의 보고(寶庫)로 알려져 있는 {산해경}은 오히려 중원문화와는 거리가 먼 주변문화의 집대성이며 정통의 주(() 문화보다 비정통의 은() 및 연((() 문화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견해가 정설이다. 따라서 고구려 벽화상의 {산해경}적 제재는 이제까지의 중국신화 인식과는 좀 다른 각도에서 탐구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불교 중심주의의 편벽성은 우리가 그간 소홀히 해왔던 동북아 고유의 민간신앙 및 습속, 특히 도교를 새로운 해석기제로 활용함으로써 지양될 수 있을 것이다. 도교는 국내의 유·불 위주의 학술 풍토에서 이제껏 한 번도 주목받은 적이 없었으나 중국문화중 가장 비한족적인 성격이 강하고 동방 변경문화와의 상관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한국의 고대문화 및 기층문화 연구에 있어서 다대한 시사를 줄 것으로 사료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구려 벽화에 대한 도교적 접근은 지금껏 우리가 간과해왔던 많은 사항들을 새롭게 일깨워줄 것임에 틀림없다.

 

이 글에서의 이러한 두 가지(신화적·도교적) 방면에서의 새로운 모색은 사실상 하나의 연계적 문화의식하에 통합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산해경}을 중심으로 한 동이계 신화와 고구려 신화와의 관계라는 개념 위에 다시 동이계 신화의 도교로의 전이 혹은 도교에 의한 신화의 전유(專有, appropriation)라는 개념을 연속시킴으로써 고구려 벽화상의 {산해경}을 위시한 신화적 제재 및 도교적 제재를 일관된 문화구조 속에서 파악해 볼 여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의 논의는 바로 이러한 일련의 이론구상을 전개하고 입증해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 고구려·{산해경도교

1) 고구려 신화와 {산해경} 신화

이전복(李殿福), 동장부(董長富) 등 중국의 학자들은 고구려 벽화에 대한 논구에서 벽화의 신화적 제재 대부분이 중원신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논단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언급중에는 개념상 중대한 오류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중원신화라는 어휘로써 그들이 사용한 중원이라는 단어는 공간적으로는 중국대륙 전체를, 정치적으로는 통일된 전 중국을 막연히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와 상관되어 중원이라는 개념이 사용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황하 중·상류유역이라는 극히 제한된 지역에 한해서이다. 왜냐하면 중국대륙이라는 공간 위의 신화적 현실은 결코 단일계통적이지 않고 민족적·국가적 정체성이 주장될 수 없는 다원분립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원신화라는 어휘가 자기동일성을 지닌 중국신화 전반을 지칭할 수 없음은 물론 제한된 의미에서의 중원지역 신화일지라도 후술할 바와 같이 사실상 고구려 벽화신화와는 계통이 다르기 때문에 영향관계를 논할 수 없는 것이다. 다원분립의 신화적 상황은 그후 상고시대에 활동했던 3대 종족집단의 거주구역 및 문화적 특징에 따라 서방의 화하계(華夏系), 동방의 동이계(東夷系), 남방의 묘만계(苗蠻系)로 점차 귀납되어진다. 화하계의 최고신은 황제(黃帝)이고 동이계는 태호( 소호( 제준(帝俊( ), 묘만계는 신농(神農치우(蚩尤축융(祝融) 등이 중요한 신령들이다. 그러나 동이계와 묘만계는 동에서 남으로의 해안지역을 따라 원래는 같은 성격의 문화였던 것이 후일 분화된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결국 묘만계를 동이계에 귀속시키면 상고시대 중국대륙의 신화 및 문화계통은 크게 화하계와 동이계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 중국 상고문명을 동방민족과 서방민족의 이원대립으로 보았던 부사년(傅斯年)의 이른바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은 대체로 이러한 사실에 근거한다. 앞서 말한 바 제한된 의미에서의 중원신화는 결국 서방의 화하계 신화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고구려 신화는 어느 계통과 관련성을 갖는가? 일반적으로 동이계는 조류숭배 및 태양숭배와 샤머니즘 등의 원시신앙의 바탕 위에 산동을 중심으로 동·남부 해안 및 북부 발해만 연안 일대를 포괄하는 지역을 신화의 구역으로 삼고 있다. 고구려의 주몽(朱蒙) 신화, 은의 간적(簡狄) 신화, 서언왕(徐偃王) 신화 등은 상술한 신화적 특징들을 공유하는 동이계 신화군의 대표적 사례로 흔히 거론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정치적, 문화적 통합체로서의 중국이라는 개념 이전에 발해만·산동·동남해안 일대에 형성된 별개의 신화구역 즉 동이계 신화권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고 이에 속해 있는 고구려 신화가 앞서의 중원 신화와는 다른 계통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 신화에 대한 일방적 영향을 주장하는 중국학계의 입장은 오늘의 당위론으로서 고대의 객관현실을 왜곡하는 부당한 논법의 소산인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이 글이 취하고 있는 관점에 대해 다른 차원에서의 문제제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중 양국의 학자들이 역사 이래 사용해온 동이라는 표현이 혹 애매한 것은 아니며 과연 실제적으로 발해만으로부터 중국 동남해안 지역의 종족과 문화를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다. 아닌 게 아니라 고고학적 성과를 토대로 한 동이의 개념에 대한 최근의 논구는 산동과 요동지역의 상고문화가 묘제(墓制청동검 등에 있어서 서로 다른 독자성을 보여줌으로써 동이의 개념을 산동 이북의 지역에까지 확대할 수 없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논증은 일견 움직일 수 없는 증거에 입각하여 투명한 결론에 도달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은허(殷墟) 및 하허(夏墟)의 발굴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고학이 애초 허구의 신화로 규정했던 것을 후일 스스로 부정한 예는 수없이 많다. 최근에야 확립되어가는 중국문명의 다원적 기원론도 70년대 이후 황하 이외 지역에 대한 탐사가 본격화되면서 초창기에 수립했던 황하중심론을 고고학 스스로 부정하면서 이루어진 업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최근의 이러한 결론은 수십년 전 이미 지방문화(Local Culture)의 개념을 제창했던 독일계 신화·민속학자 에버하르트(W. Eberhard)에 의해 예견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근래 이루어진 몇 가지 탐사결과를 일반화하여 산동과 요동이 별개의 문화구이고 동이라는 개념하에 함께 포괄되지 않는다고 속단할 수 없다. 아울러 고고학에 의해 얻어진 물질근거가 반드시 종족성 및 문화의 정신내용까지 규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재고해보아야 한다. '귤이 장강 이북으로 넘어가면 탱자가 된다'는 중국 속언도 있듯이 환경조건에 따라 사물의 외형은 변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귤의 기본적인 속성까지 바뀌어 다른 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묘제에 있어서 요동과 산동의 차이를 대비시키지만 그것은 돌이 많은 요동지역과 황토대의 내륙지역의 환경적 차이에서 비롯한 소재상의 차이일 뿐 종족성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나무껍질을 재료로 너와집을 짓는 강원도 산간 주민을, 초가집을 짓는 평지 주민과 구별하여 다른 종족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비해 신화·건국전설이란 종족의 고유한 내력과 세계이해 방식을 담은 서사물로서 그것의 기본적인 정절(情節)은 비교적 엄숙하게 지켜지고 정확히 전승되어온 것이다. 앞서 예시한 난생신화·조류숭배·태양숭배·샤머니즘 등의 공통요소 이외에도 초사(楚辭)와 단군신화와의 상관성, {산해경}의 영웅 예( )와 주몽과의 상관성 등을 통해서도 고대의 연((()를 위요한 요동에서 산동을 거쳐 동남방에 이르는 지역은 고고학적으로는 몰라도 적어도 신화학적으로는 하나의 구역으로 묶일 수 있다. 이 점, 이른바 동이계 신화권의 존재는 설사 현행 고고학적 성과의 한시적 실증성을 용인한다 할지라도 말소될 수 없는 엄연한 신화학적 실존인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견지에서 동이계 신화권의 존재를 긍정한다고 할 때 우리는 고구려 신화의 문제를 결코 일방적 영향론의 관점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늘의 영토·국가 개념 이전의 동일한 신화 경역에서 함께 일구고 공유했던 당시의 호혜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같은 시각에 근거, 동이계 신화를 대표하는 {산해경}과 고구려 신화와의 상관성에 대해 논해 보기로 하겠다. {산해경}이 동이계 고서라는 주장은 일찍이 손작운(孫作雲) 등에 의해 제기되었고 이 책이 반영하는 지역은 학자들에 따라 초() 혹은 산동(山東) 등으로, 동이계 신화권의 기반과 일치한다. 이 책이 만들어진 시기는 대략 전국(戰國)시대 무렵이지만 반영된 시기는 은대 또는 그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저자는 노신(魯迅)이 무서(巫書)로서 규정한 바 있듯이 무당 계층의 인물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산해경}과 동이계 신화, 그중에서도 특히 고구려 신화와의 상관성은 {산해경}상의 고대 한국문화에 대한 명시적 혹은 상징적 표현들을 통해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산해경}에는 조선·숙신(肅愼맥국(貊國개국(蓋國) 등 명백히 고대 한국과 상관된 국명들이 등장하며 이 밖에도 [대황북경(大荒北經)]의 호불여국(胡不與國)은 부여(扶餘), [해내동경(海內東經)]의 한안( )은 삼한(三韓)을 지칭하는 듯하다. 아울러 군자국(君子國백민국(白民國) 등은 고대 한국문화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전하는 표현들이다. 군자국에 관한 기사는 [해외동경]에 보인다.

 

군자국이 그 북쪽에 있다. (그 사람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으며 짐승을 잡아먹는다. 두 마리의 무늬 호랑이를 부려 곁에 두고 있으며 그 사람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다투지 않는다. 훈화초(薰華草)라는 식물이 있는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시든다. 혹은 간유시(肝楡尸)의 북쪽에 있다고도 한다.

(君子國在其北, 衣冠帶劒, 食獸, 使二大虎在旁. 其人好讓不爭, 有薰華草, 朝生夕死. 一曰在肝楡之尸北.)

 

최남선(崔南善)'호랑이를 부려 곁에 두고 있'는 상황이 우리 고래의 산신도(山神圖)와 잘 부합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훈화(薰華)'는 곧 '근화(菫華)'로서 무궁화 꽃이다. 이 역시 고대 한국의 특유한 식생(植生)을 언급한 것이다. [대황동경(大荒東經)]에 기재된 백민국(白民國)의 정황은 어떠한가?

 

백민국이 있다. 제준(帝俊)이 제홍(帝鴻)을 낳고 제홍이 백민을 낳았다. 백민은 성이 소씨(銷氏)이고 기장을 먹고 살며 호랑이·표범··말곰 등 네 종류의 짐승을 부린다.

(有白民之國. 帝俊生帝鴻, 帝鴻生白民, 白民銷姓, 黍食, 使四鳥 …… ··· .)

 

안재홍(安在鴻)'()''()'의 가차자일 가능성을 지적했다. 그런데 백민(白民)이란 표현은 동이계 종족이 백색을 숭상했던 습속과 관련지어 해석해볼 수도 있다. 백의민족이라는 표현은 근래에 생긴 것이지만 은인(殷人)과 부여족이 모두 백색을 중시했다는 사실은 일찍이 문헌상에 근거가 있다. () 왕사정(王士禎){지북우담(池北偶談)}에도 실려 있는 조선의 선가(仙家) 정작( )의 싯구는 이러한 민족 특색을 잘 반영한다.

 

멀리 모래 위를 가는 이,

처음엔 해오라비 한 쌍인가 했네.

(遠遠沙上人, 初疑雙白鷺.)

 

아마 중국의 풍경에서는 이러한 시정(詩情)이 자연스럽게 빚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다음으로 백민은 제준(帝俊)의 후손으로 되어 있는데 제준은 누구인가? 제준은 {산해경} 내의 대표적인 신령으로 발음상 순()과 동일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은의 조상신으로서 갑골문(甲骨文)에서는, , 등의 조두인신(鳥頭人身) 혹은 후신( )의 형상으로 나타나는데 그 신체(神體)는 은의 건국신화와 관련된 현조(玄鳥) 혹은 준조( )로서 곧 태양 속의 삼족오(三足烏)이기도 하다. 태양신의 상징이기도 한 삼족오는 고구려 벽화에도 출현하며 역시 태양신격을 지닌 동명왕 주몽, 조류숭배와 상관된 난생신화, 모자에 새깃을 꽂는 조우삽관(鳥羽 )의 풍습 등과 관련하여 {산해경}의 중요한 신화소들이 고구려 신화에서도 공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의 '기장을 먹고 살며(黍食)'라는 귀절은 {맹자} [고자(告子)] 하편의 '맥땅은 오곡은 나지 않고 기장만이 난다(  不生, 唯黍生之)'라는 언급과 상관하여 이해할 때 백민국이 지역적으로 중국의 동북방 일대로서 멀리로는 고조선 그 이후로는 부여·고구려 등의 생활터전과 일치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의 '호랑이·표범··말곰 등 네 종류의 짐승을 부린다'라는 귀절은 어떻게 음미될 수 있는가? 이들은 네 종류라 했지만 기실 호랑이와 곰의 두 종류로 합치시킬 수 있고 주지하다시피 두 동물은 고조선에서 토템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산해경}과 고조선 신화와의 상관성을 고려해보면 [중산경(中山經)] 웅산(熊山)의 기록이 심상치 않게 다가온다.

 

다시 동쪽으로 150리를 가면 웅산이라는 곳이다. 이곳에 굴이 있는데 곰굴로서 늘 신인(神人)이 드나든다. 여름에는 열리고 겨울이면 닫히는데 이 굴이 겨울에 열리면 반드시 전쟁이 난다.

(又東一百五十里, 曰熊山. 有穴焉, 熊之穴, 恒出入神人. 夏啓而冬閉, 是穴也, 冬啓乃必有兵.)

 

웅산의 곰굴은 마늘·쑥만 먹으며 인간을 꿈꾸었던 웅녀(熊女)의 보금자리였으며 이곳을 드나드는 신인은 환웅(桓雄) 천왕이 아니었을까? 다시 말해서 {산해경}의 이 기록은 고조선 신화의 또 다른 반영이 아닐까?

 

지금까지는 직접적으로 {산해경} 자료를 통하여 고구려 신화 내지 고대 한국문화와의 상관 가능성을 검토해보았으나 이번에는 방계자료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양자의 친연성을 확인해보기로 한다. {산해경}에는 앞서의 제준과 더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신화적 존재로 예( )가 있다. 그는 열 개의 태양이 떠올랐을 때 아홉 개를 격추하여 가뭄을 막았고 사방의 괴물을 퇴치하여 백성을 구원하였던 영웅이었다. 중국의 신화학자 손작운, 원가(袁珂) 등은 그를 동이의 유력한 군장(君長)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이름 역시 조류숭배와 상관되며 그가 태양신이자 명궁이었다는 사실은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해모수(解慕漱주몽(朱蒙) 등을 생각케 한다. 더군다나 예의 후계자인 봉몽(逢蒙)과 주몽은 어음(語音)상의 일치점도 있다. 고구려 민족이 사전(射箭)에 능했고 좋은 활을 생산했다는 역사기록은 이와 같은 상관성을 더욱 뒷받침한다. 그런데 {회남자(淮南子)} {초사(楚辭)} [천문(天問)] 등의 다른 신화자료를 통해 보강된 예의 생애는 고구려 건국시조들의 그것과 단순한 공통점을 넘어서 구조적 상동성을 갖는다. 이인택(李仁澤) 교수는 우선 예와 해모수 신화간의 이러한 관계에 주목했다. 예는 하백(河伯)의 부인 낙빈(洛嬪)과 사통하고 하백을 활로 쏜다. 그후 제자인 봉몽에 의해 피살된다. 해모수의 경우 그는 하백과 술법을 겨루어 그의 딸 유화(柳花)를 얻고 아들 주몽을 낳게 한다. 이와 같이 양 신화는 혼외정사로 인한 하백과의 갈등을 공통의 모티프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예와 해모수 신화간의 구조적 유사성은 해모수의 아들인 주몽 신화와의 관계 속에서 또 다른 양태로 발견될 여지가 있지 않을까? 사라 앨런(Sarah Allan)은 고대 중국의 왕조교체가 요 순 우 탕 등 전설적 성군들의 선양(禪讓)의 이야기 패턴을 반복함으로써 합법성을 획득해 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 점 고구려 신화에도 충분한 시사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고구려가 부여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신화적 조정이 이루어졌다면 고구려계의 주몽신화와 부여계의 해모수 신화가 이야기 구조를 공유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모수 신화를 매개로 다시 예 신화와 주몽 신화와의 관계성을 탐색해 볼 여지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예와 주몽 양인은 궁술(弓術)로 입신했다는 공통점 위에 역시 비슷한 개인사를 보여준다. 즉 예는 하백의 부인인 낙빈과 사통하고 후일 본처인 항아(姮娥)로부터 배신당한다. 항아는 예의 불사약을 훔쳐 달로 달아나 자신만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는 제자 봉몽에게 피살된다. 그가 스승을 제치고 일인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주몽이 건국했을 때 그에게는 소서노(召西奴)라는 부인이 있었다. 그러나 후일 주몽의 부여 시절의 옛 여인 예씨(禮氏)가 낳은 유리(琉璃)가 찾아오면서 소서노는 자신의 소생인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를 데리고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게 된다. 주몽이 죽은 후 유리는 왕위를 계승한다. 여기에서 주몽의 옛 여인 예씨는 하백의 부인 낙빈과 상응된다. 왜냐하면 주몽의 여인관계에 있어서 어머니와 연인 혹은 아내는 동일한 위격(位格)으로 볼 수 있고, 예씨와 더불어 부여에 있는 주몽 모() 유화는 본래 하백의 딸이었으므로 이러한 하백과의 관련성을 고려한다면 예씨는 곧 낙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예의 제자 봉몽은 바로 주몽의 아들 유리이다. 둘 다 모두 스승이나 아버지가 죽어야 일인자가 된다는 점에서, 활의 명인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각색인 것이다. 이와 같이 혼외정사로 인한 본처와의 갈등을 공통의 모티프로 삼고 있는 예와 주몽신화의 구조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도표 1]

 

이제 우리는 예·해모수·주몽신화가 동일한 구조를 중복하고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이들이 동이계 영웅신화의 구조를 함께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동이의 군장 예가 차지하는 {산해경}내의 신화적 위상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러한 논구가 앞서의 여러 분석결과들과 더불어 {산해경} 신화와 고구려 신화와의 깊은 상관성을 한껏 예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관성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고구려 벽화상에 표현된 {산해경}적 제재들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견지에서의 해석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2) {산해경} 신화와 도교

주지하다시피 도교는 유교·불교와 더불어 중국의 3대 종교사조 중의 하나로서 동아시아 문화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특히 도교는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에 대비되어 민간 기층문화의 중요한 내용으로서 파악되어진다. 중국의 학자들은 도교의 토착적 성격을 강조하여 도교를 '토생토장(土生土長)'의 종교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중국 외부의 학자들로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시 말해서 도교는 그 기원에 있어서 결코 중국의 민족종교도, 토착종교도 아닌 것이다. 도교의 기원지에 대한 가설은 크게 서방 파촉(巴蜀)설과 동방 발해만설의 두 가지로 나뉜다. 파촉설은 장도릉(張道陵)이 오두미도(五斗米道)를 파촉지방에서 창건하였고 이 교파가 이후 도교의 모체가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오두미도는 교단 조직을 갖춘 최초의 도교일지는 몰라도 도교의 중심내용인 신선사상의 기원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교단도교 이전 원시도교의 기원은 아닌 것이다. 아울러 장도릉 집단 자체도 본래 파촉 원주민이 아니고 서남이(西南夷) 출신의 유이민(流移民)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파촉을 도교의 기원지로 볼 수는 없다. 대다수의 도교학자들이 동의하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타당성이 있는 가설은 동방 발해만설이다. 우선 발해만 연안은 전국(戰國) ·후기 이후 신선설화가 최초로 유행했던 지역이고 원시도교의 사제라 할 방사(方士)의 요람지이다. 아울러 발해만으로부터 동남부 해안에 이르는 연((()를 망라하는 지역은 고대 은 문화의 무풍(巫風), 곧 샤머니즘이 강하게 남아있던 지역으로 이러한 사실은 도교의 종교적 모체에 관한 또 하나의 유력한 가설인 샤머니즘 기원설과 상응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동방 기원설과 관련한 도교의 발생지역과 앞서 고찰한 바 있는 동이계 신화구역이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신화와 종교간의 긴밀한 관련성, 그 시기적 선후 관계 등을 고려할 때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동이계 신화의 도교로의 발전 혹은 도교에 의한 동이계 신화의 전유(專有) 등의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서방 주족(周族)이 대두하면서 몰락한 은() 및 동이계 신화는 역사의 이면으로 잠복하여 기층문화가 되었다가 지배·중심주의로 표상되는 유교에 대해 주변·다원주의로서의 반가치(反價値)적 성격을 띠는 도교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우리는 은대 신화와 후대 도교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파악해볼 수 있다. 장광직(張光直) 교수는 은대 청동기의 동물 문양이 무당의 주술적 승천을 도왔던 조력자(helper)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이러한 신화적 기능은 도교에서 비상(飛翔)의 기술인 승교술( )로 변모한다. 승교술은 동물을 부리거나 그 힘을 빌어 날아 오르는 방식으로 해당 동물에 따라 다시 용교( 호교( )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샤머니즘과 관련된 은대의 제의가 후대에 도교의 법술로 통합된 사실을 우리는 여기에서 명백히 읽을 수 있다. 동이계 신화의 도교에로의 발전, 이 사실을 신화학과 도교학의 결합하에 가장 일찍 논구한 사람은 칼텐마크(M. Kaltenmark) 교수이다. 그는 은 및 동이계 종족에게 있어서 공통적이었던 신조(神鳥) 토템이 도교의 비상하는 존재인 신선-불사 관념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에 의하면 초기 신선설화집인 {열선전(列仙傳)}은 동이계 문화요소가 지배적이다. 그가 설정하고 있는 이 동이계의 개념 속에는 고구려·부여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동이계 신화와 도교와의 긴밀한 관계를 이같이 긍정한다고 할 때 우리는 동이계 신화의 대표적 저작인 {산해경}과 도교도 역시 그러한 관계에 있음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보다 구체적으로 {산해경} 신화의 도교에로의 변천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산해경}에서 짙게 표현되고 있는 불사관념은 바로 도교의 신선사상을 연상케 한다. 불사의 존재인 불사민(不死民), 불사를 가능케 하는 선약(仙藥), 승황(乘黃길량(吉量) 등 유니콘 류()의 서수(瑞獸) 등에 대한 기록과 아울러 무엇보다도 도교의 불사약인 금단(金丹) 제조에서 가장 중시했던 단사(丹砂)의 출현이 빈번하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다음으로 낙원표상 및 산악숭배 등도 후대 도교와 계승관계가 있다. 서왕모(西王母)와 뭇 신들의 거소인 곤륜산(昆侖山)은 그대로 신선의 서식처가 되고 여러 명산들이 도교의 이상향인 동천(洞天복지(福地)로 변모한다. 서왕모가 중국 서방의 여신이 아니라 동이의 형신(刑神)이고 곤륜산도 오늘의 곤륜산이 아니라 산동 지역의 성산(聖山)인 태산(泰山)을 가리켰음은 최근의 논구에서 밝혀지고 있다. 이들 모두는 동이 지역의 산물이었는데 한대(漢代) 이후 중국이 확대되어 방위영역이 바뀌면서 중국의 서쪽끝으로 위치지워진 것이다. 다시 말해 본래 동이 지역 중심으로 세계구조가 짜여 있던 {산해경}이 한대에 중원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일어난 변화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칼텐마크 교수가 이미 동이계 신화의 특징으로 지적한 바 있는 신조 토템은 {산해경} 신화에서도 유력하게 표현되어 도교와의 계승관계에 대해 더욱 움직일 수 없는 근거가 되고 있다. 우민국(羽民國환두국( 頭國) 등의 날개 돋힌 인간 즉 조인(鳥人) 형상이 후대 도교에서의 우인(羽人우사(羽士비선(飛仙) 등 초월적 존재의 이미지로 발전해 간 것은 분명하다.

 

이상과 같이 동이계 신화가 도교에 대해, 다시 {산해경} 신화가 도교에 대해 갖는 연원적 지위를 확인해보았을 때 우리는 이같은 결과를 바탕으로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 동이계 신화 및 {산해경} 신화와 친연관계에 있는 고구려 신화와 도교와의 상관성에 대해서도 탐색해볼 여지를 갖게 될 것이다. 고구려의 도교는 공식적인 기록에 의거하면 영류왕(榮留王) 7(A.D. 624) ()으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때의 도교는 이미 관방화(官方化)된 당의 국교로서 7세기 이전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출현하고 있는 선행의 도교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벽화상의 도교는 아무래도 보다 원시도교 혹은 초기 도교의 형태에 가까우며 이에 따라 벽화공간 내에서 조화롭게 신화적 제재와 공존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고구려 신화와 도교와의 상관성은 우선 도교의 기원지에 관한 다음과 같은 전설로부터 시사되기도 한다. 후한(後漢) 시기의 위백양(魏伯陽)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는 단정파(丹鼎派) 도교의 대표적 경전이다. 이 경전의 성립에 관해 송() 증조( ){도추(道樞)}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운아자가 장백산에서 노닐 제 진인이 불사약의 이치와 음양의 비밀을 알려 주었다. 이에 18장의 책을 지어 위대한 도에 대해 말하였다.

(雲牙子游于長白之山, 而眞人告以鉛汞之理·龍虎之機焉. 遂著書十有八章, 言大道也.)

 

증조는 운아자가 위백양의 별호임을 자주(自注)에서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위백양의 {주역참동계}의 성립이 결국 장백산의 진인으로부터 비롯한다는 이야기이다. 역시 후한 환제(桓帝) 무렵 완성된 {태평경(太平經)}은 민간도교 최고(最古)의 경전으로서 도교학상 {주역참동계}와 쌍벽을 이루는 지위를 차지한다. {태평경}은 백화(帛和간길(干吉궁숭(宮崇) 등 발해만 연안의 방사들에 의해 지어졌는데 이 중 조사(祖師)격인 백화가 요동(遼東)인이다. 도교에 있어서 가장 오래 되고 대표적인 경전 둘이 장백산과 요동 등지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는 이러한 내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교의 발생이 고대 한국과 무관하지 않다는 이러한 시사는 앞서 고찰했던 동이계 및 {산해경} 신화와 도교와의 상관성을 재확인하는 것임은 물론 고구려 신화와 도교와의 계승적 관계에 대해서도 상당한 심증을 부여한다. 이밖에도 {열선전}에서의 선인 하구중(瑕邱仲)은 부여왕의 역사(驛使)를 지냈고 당말(唐末)의 도사 두광정(杜光庭)이 지은 전기(傳奇) {규염객전( 髥客傳)}에서 이인(異人)이자 협객인 규염객은 후일 부여왕이 된다. 설화 속에서의 이러한 설정 역시 고구려·부여가 도교문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방증한다.

 

이제 해모수 신화에 대한 검토를 통해 고구려 신화의 도교적 계기와 후대 도교에의 영향 관계 등을 살펴 보기로 한다. 이규보(李奎報)[동명왕편(東明王篇)] 자주(自注)에는 해모수에 관한 다음과 같은 신이담(神異譚)이 적혀 있다.

 

() 신작(神雀) 3(B.C. 59), 천제가 태자로 하여금 부여 임금의 옛 도읍에 내려가 놀게 하였는데 이름을 해모수라 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올 때 오룡거를 탔고 종자가 백여인인데 모두 흰 고니를 탔으며 채색 구름이 하늘에 떠 있고 음악이 구름 속에서 진동하였다. 웅심산에 머물기를 10여일이나 하다가 내려왔는데 머리에는 까만 깃털의 관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을 찼다. 아침에는 정사를 보고 저녁이면 하늘로 올라갔으니 세상에서는 그를 일러 천왕랑이라고 하였다.

(漢神雀三年壬戌歲, 天帝遣太子, 降遊扶餘王古都, 號解慕漱. 從天而下, 乘五龍車, 從者百餘人, 皆騎白鵠, 彩雲浮於上, 音樂動雲中. 止熊心山, 經十餘日始下, 首戴烏羽之冠, 腰帶龍光之劒. 朝則聽事, 暮卽升天, 世謂之天王郎.)

 

채색 구름과 풍악 속에서 수많은 종자의 호위를 받으며 오룡거를 타고 하강하는 해모수의 광경은 도교에서 신선이 강림할 때 즐겨 쓰는 표현과 흡사하다. 가령 위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무제내전(漢武帝內傳)}에서는 서왕모의 강림에 대해 '구름 속에서 풍악소리가 들리고, ……문득 보니 왕모가 자운연을 탔는데 아홉 빛깔의 용에게 멍에를 메웠다. 따로 50명의 신선이 옆에서 난여를 타고 있었다(聞雲中簫鼓之聲, ……唯見王母乘紫雲之輦, 駕九色斑龍. 別有五十天僊, 側近鸞輿.)'고 묘사한다. 종자들이 탔던 고니 또한 학과 더불어 신선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조류이다. 조류의 동반은 {산해경}에서부터 보였던 조인일체(鳥人一體) 신화의 한 표현이다. 해모수가 쓴 까만 깃털의 관은 곧 까마귀 깃털의 관을 의미하기도 하여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三足烏)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는 해모수가 태양신이며 동이계의 신화영웅임을 다시 한 번 암시해준다. 결국 우리는 해모수 신화 자체가 이미 후대 도교설화에로의 변모의 계기를 내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태평경}의 말미에는 신선의 비행을 묘사한 [승운가룡도(乘雲駕龍圖)]라는 그림이 부록되어 있는데 이를 해모수 신화와 관련하여 이해할 때 몇 가지 흥미로운 추리가 가능하다. 우선 우리는 [승운가룡도]에서 오룡거를 탄 신선의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모수도 오룡거를 탔지만 중국의 다른 미술 자료에서 오룡거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승운가룡도]와 해모수 신화간의 이러한 일치는 특별히 우리의 눈길을 끈다. 다음으로 수레에 타고 있는 세 명의 인물 중 주인공인 중존(中尊)은 실물 비례를 무시하고 다른 인물에 비해 크게 그려져 있다. 이러한 화법은 고대 회화에 있어서 보편적이나 고구려 벽화에서도 자주 보이는 것이다. 아울러 수레와 인물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버섯 모양의 영지운(靈芝雲)은 해모수가 하강할 때 하늘에 떠 있던 채색 구름을 연상시킨다.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승운가룡도]상의 인물들의 복식이다. 이들의 옷은 모두 옷깃에 선을 댔는데 이러한 가선( )은 중국 복식에도 없는 것은 아니나 특별히 고구려 복식에서의 현저한 표현으로 자주 학자들에 의해 거론되어온 것이다. 가선은 본래 동이계 신화 특유의 신조 토템의 반영이기도 하다. ·두루미 등처럼 날개 끝이나 목 부분에 검은 깃털이 있는 조류의 형상에 대한 모방주술적 사고로부터 비롯된 의복 양식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러한 양식은 엘리아데(M. Eliade)도 지적한 바 있는, 시베리아 및 동북아 샤만의 조형문양(鳥形紋樣) 의상과도 근원적인 관련이 있는 듯 하다. {태평경}과 같은 원시도교 자료상에서 이와 같은 복식이 등장하고 후대의 도교설화에서 학 종류의 조류가 특별히 중시되는 것은 거듭 말해온 바 동이계 신화와 도교와의 문화적 연속 관계를 입증하는 뚜렷한 사례들이다. 아닌 게 아니라 [승운가룡도]는 후대의 도교설화에서 신선의 비행 또는 하강 장면에 대한 전형적인 묘사로 정착된다. 갈홍(葛洪, A.D. 283343){신선전(神仙傳)}에서 신선 왕원(王遠)이 하계에 내리는 모습을 '머리에 원유관을 쓰고, ……칼을 차고, ……깃 일산이 있는 수레를 타고 오룡에게 멍에를 메웠는데 용들은 각기 다른 빛깔이다. 악대(樂隊)는 기린을 탔고 모두 하늘에서 내려와 뜨락 위에 모여들었다.(戴遠遊冠, ……帶劒, ……乘羽車, 駕五龍, 龍各異色, ……鼓吹皆乘麟, 從天而下, 懸集於庭.)'고 묘사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다시 해모수 신화와 [승운가룡도]와의 상관성의 문제로 돌아가서 우리는 {태평경}이 요동 등 발해만 연안의 방사들에 의해 성립된 최고(最古)의 민간 도교 경전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아울러 이미 논증해온 바 동이계 신화의 도교에로의 전이 혹은 도교에 의한 동이계 신화의 전유라는 사안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승운가룡도]{태평경}의 발생지인 요동 일대에 유행하던 해모수 신화를 바탕으로 성립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승운가룡도]는 해모수 신화의 천신하강 장면을 요동 출신의 방사들이 도교적으로 각색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나아가 [승운가룡도]의 장면이 {신선전} 등 후대 도교설화의 묘사에 미친 영향까지 고려할 때 해모수 신화의 도교에 대한 연원적 지위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으며 우리는 이제 동이계 신화, {산해경} 신화에 이어 고구려 신화에 대해서도 도교와의 발생론적 관계를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근거를 갖게 된 것이다. 결국 우리는 지금까지 여러 단계적인 논의를 통해, 고구려 벽화 공간 내의 신화·도교적 제재들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에 앞서 두 가지의 기본 시각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한 가지는 탈중원(脫中原)의 주변문화적 의식이며 또 한 가지는 신화·도교 양자를 상호연관구조하의 하나의 문화체계로 파악하는 통합적 문화관이다. 다음의 탐구는 그간의 논의 과정을 거쳐 수립된 이같은 두 가지 관점에 입각하여 진행될 것이다.

 

. 벽화의 신화·도교적 세계

1) 인면조(人面鳥)에서 신선으로

이 글의 모두(冒頭)에서 예시하였던 이백의 [고구려] 시 전편에 흐르는 이미지는 사실상 고구려 고분벽화 공간을 압도하는 분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인의 마음은 우주를 포괄한다(賦家之心, 包括宇宙)'고 한대(漢代)의 문인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일찍이 갈파한 바 있지만 시인 이백의 통찰력은 이미 한 종족의 문화적 특성을 일정한 이미지로 포착해냈던 것이다. 그 이미지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비상(飛翔)의 이미지로서, 벽화 공간을 가득 채운 비조(飛鳥비수(飛獸비선(飛仙비천(飛天) 등의 존재가 이룩해낸 분위기인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고구려 및 동이계 신화의 바탕을 이루는 종교·습속 등과 관련이 있다. 즉 샤머니즘과 조류숭배가 그것으로서 역사문헌에 의해 이러한 경향은 대체로 입증되고 있다. 가령 고구려에서 관모(冠帽)에 새깃을 꽂고 그것으로 등급을 표시했다던가, 변한(弁韓), 진한(辰韓) 등지에서 장례 때 죽은 사람이 승천할 수 있도록 큰 새깃을 함께 매장했다던가 하는 풍속이 있었다는 기록 등은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무속에서의 조류숭배와 상관된다. 진몽가(陳夢家)는 본래 '()'는 갑골문에서 춤추는 사람의 형상을 본따 만든 글자로서 '()'와 자원(字源)적으로 같다고 풀이한다. 아울러 '()'의 고자(古字)'()'은 춤소매가 펄렁거린다는 의미로서 결국 무()와 선() 즉 샤머니즘과 도교는 춤·조류·비상 등의 이미지를 매개로 발생론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고구려 벽화는 이러한 이미지들로 충만되어 있는데 그 가장 원초적인 형태는 {산해경}에서의 괴조(怪鳥)이자 신조이기도 한 인면조(人面鳥)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덕흥리(德興里) 고분에 그려진 천추(千秋만세(萬歲), 삼실총(三室塚), 무용총(舞踊塚) 벽화의 이름 미상의 인면조들이 그것이다. 이들의 형상은 모두 {산해경}에서 유래한다. {산해경}이 본래 무서(巫書)로서 동이계 신화의 중요한 내용인 신조토템을 뚜렷이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산해경}에 수없이 등장하는 비조(飛鳥비어(飛魚비수(飛獸) 등의 유익(有翼) 동물들에 의해 전서(全書)를 통해 구현되고 있는 조류 비상의 이미지로서도 확인된다. 그중에서도 인면조의 형상은 날개 돋힌 인간인 우인(羽人) 형상과 더불어 {산해경}내 조인일체(鳥人一體) 신화의 대표적 표현이다. [해외동경(海外東經)]에 등장하는 동방의 신 구망(句芒)을 비롯 [남차이경(南次二經)]의 주( ), [남차삼경]의 구여(瞿如( ), [서산경]의 탁비( ), [서차이경]의 부혜( ) [서차사경]의 인면효(人面 ), [북산경]의 송사( ), [해외남경]의 필방(畢方) 등이 인면조 부류이다. 그런데 이들은 대부분 흉조이다. 탁비의 경우만이 그 깃털을 차면 천둥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용처(用處)가 있을 뿐 구여와 송사는 무해무익하며 나머지는 가뭄(·인면효전쟁(부혜귀양(화재(필방) 등을 유발하는 상서롭지 못한 새들이다. 그러나 분명히 이들로부터 유래하였을 덕흥리 고분의 천추·만세는 이제 길조로 변신해 있다. 갈홍의 {포박

 

(抱朴子)}에서는 이 새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천세라든가 만세라든가 하는 새들은 모두 사람의 얼굴에 새의 몸체를 하고 있는데 수명 또한 그 이름과 같다.

(千歲之鳥, 萬歲之禽, 皆人面而鳥身, 壽亦如其名.)

흉조가 피장자의 내세의 평안을 보증하는 길조로 바뀐 까닭에 대해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첫째로 이른바 '독으로써 독을 제압한다(以毒制毒)'는 적극적인 주술원리에 의해 흉물(凶物)에게 '악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오는( 邪進慶)' 능력을 부여 하는 경우에서이다. 흉악한 괴물의 형상인 도철문(  귀면문(鬼面紋) 등은 이러한 상징의 실례이다. 다음으로 신화의 도교에로의 전변과 동시에 일어나는 도교에 의한 신화의 전유 현상에서이다. 기층문화로서의 도교는 스스로를 확충해나가는 과정에서 주변적 지위에 머물러 있던 동이계 신화 요소에 대해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여 자신의 체계 내에 편입시킨다. 주에 끝까지 항전하다 패사(敗死)한 은의 태사(太師) 문중(聞仲)이 모든 귀신을 쫓는 강력한 도교 신격인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으로 변신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대표적 도교이론서인 {포박자}에서의 인면조 수용은 이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인면조에서 조금 발전된 형태의 조인일체 표현은 {산해경}에서 날개 돋힌 인간의 모습인 우민(羽民환두( ) 등의 우인(羽人) 형상으로 나타난다. [해외남경]에서의 이들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우민국이 그 동남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머리가 길고 몸에 날개가 나 있다.

(羽民國在其東南, 其爲人長頭, 身生羽.)

 

환두국이 그 남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사람의 얼굴에 날개가 있고 새의 부리를 하고 있으며 지금 물고기를 잡고 있다.

( 頭國在其南, 其爲人人面有翼, 鳥喙, 方捕魚.)

 

동진(東晋)의 곽박(郭璞)은 특히 우민에 대해 '날 수는 있지만 멀리는 못 간다. 알로 낳으며 그림을 보면 마치 신선 같다(能飛不能遠, 卵生,  似仙人也.)'고 주석을 달아 이러한 존재의 신선 형상으로의 변모를 예시(豫示)하듯이 말하고 있다. 우인 형상은 마왕퇴(馬王堆) 백화( ) 및 무량사(武梁祠)를 비롯한 한대 사당의 화상석( 像石) 등에서 자주 보인다. 고구려 벽화에서는 이와 동일한 형상이 나타나지는 않으나 오회분( ) 오호묘(五號墓) 천장부 고임 부분과 사호묘(四號墓) 널방 벽 부분에 그려진 제신(諸神) 및 신선들의 우의(羽衣)를 걸친 모습이 보다 인간화된, 이에 상응하는 표현일 것으로 생각된다. 우인 형상의 또 다른 표현으로는 조류로의 완전한 변신이 있다. 신선 정령위(丁令威)는 득도해서 학이 되어 요동성으로 돌아오고 왕자교(王子喬)는 큰 새가 되기도 하고 한 쌍의 오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형상은 설화 속에서나 나타날 뿐 화상석이나 벽화에서 보이지는 않는다.

 

조인일체 형상의 마지막 단계는 아마도 학이나 봉황 종류의 조류에 올라탄 신선 형상일 것이다. 이러한 승조신선(乘鳥神仙)의 형상은 인면조와 같은 반인반수형(半人半獸形)이 자연으로부터 미분화된 인간 개념의 소산임에 비하여 이미 분화되어 자연력을 어느 정도 제어하게 된 인간존재의 개념 위에 빚어진 것이다. 아울러 동이계 신화의 도교에로의 발전적 측면을 고려할 때 샤만의 주술적 비상을 도왔던 은대 청동기상의 동물적 조력자들이 후대 도교의 승교술( )에서 신선의 조력자로서 그대로 수용되었던 사실과 관련하여 이해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원시 자료집인 {산해경}에는 아직 승조신선의 형상이 보이지 않으며 후한(後漢) 말에서 위진 무렵 편성된 가장 오랜 신선설화집인 {열선전(列仙傳)}에 이르러서야 학을 탄 왕자교나 봉황을 탄 소사(蕭史) 등의 신선이 등장한다. 특히 왕자교의 경우는 선행자료인 {초사(楚辭)} [천문(天問)]에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큰 새로 화신하고 있어 후대 자료인 {열선전}상의 묘사에로의 변모의 궤적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 고분에서는 무용총, 오회분 오호묘, 오회분 사호묘, 통구(通溝) 사신총(四神塚), 강서대묘(江西大墓), 삼실총(三室塚) 등의 벽화에서 학, 봉황 등의 조류를 탄 신선들이 다수 출현한다. 손작운은 일찍이 이들 중 오회분 사호묘 및 오호묘의 승학신선(乘鶴神仙){열선전}상의 신선인 왕자교일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그러나 중국측 자료인 {열선도(列仙圖)}상의 왕자교와 벽화상의 그것은 백학을 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분위기나 복식 등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어 동일인으로 보기 힘들다. 특히 벽화상에는 왕자교가 늘상 불었다는 생황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이러한 승학신선을 굳이 왕자교에 비정(比定)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 {산해경}으로부터 유래된 조인일체의 신화관념은 고구려의 신화 속에서도 하나의 체계를 이루어 굳이 중원 인물의 모티프를 빌려오지 않더라도 벽화 공간 내에 스스로의 인물형상을 빚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약컨대 인면조-우인-승조신선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조인일체 신화체계는 {산해경} 등 동이계 신화의 도교에로의 발전노선과 같은 궤도 위에서 수립된 것이며 우리는 고구려 벽화 위에 표현된 수많은 비상(飛翔)의 제재들을 이상과 같은 체계를 통해 다시금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2) 야금술에서 연단술(煉丹術)

통구 사신총과 집안 오회분 오호묘 및 사호묘 널방 천장 주위에는 일련의 약동하는 신화적 인물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들의 존재는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초기 문화적 행위와 관련하여 특별히 우리의 눈길을 끈다. 우선 뒤의 두 고분에서 나란히 출현하고 있는 인신우수(人身牛首)의 신상(神像)은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특히 오회분 오호묘에서의 경우 오른손에 벼이삭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부터 농업신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식별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회분 오호묘 및 사호묘의 신농 형상 주위를 살펴보면 비의(飛衣) 같은 것을 입고 무엇인가 붉은 것을 손에 쥔 신령이 그려져 있다. 붉은 것이 불씨임이 맞다면 이 신은 염제 신농을 보좌하는 축융(祝融)일 가능성이 높다. 곽박은 축융에 대해 고신씨(高辛氏)의 화정(火正)으로서 화신이라고 주를 달고 있다. 축융의 형상은 {산해경}에서 '짐승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두 마리의 용을 타고 있다(獸身人面, 乘兩龍)'고 하였으니 벽화의 그것과는 상당히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다. 다시 두 고분에서는 공통적으로 수레바퀴를 만드는 제륜신(製輪神)이 등장한다. {산해경}을 보면 제준의 후예인 길광(吉光)이 처음 나무로 수레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태고의 수레는 소박한 통나무 바퀴椎輪수레였으므로 벽화에서와 같이 바퀴통과 바퀴살을 온전히 갖춘 수레바퀴 형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벽화상에서 제륜신인 길광은 화신인 축융과 더불어 상당히 문명화되고 인간화된 형태로 표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두 고분의 축조연대가 이미 6세기 무렵인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다시 오회분 사호묘에는 숫돌에다 무엇을 가는 마석신(磨石神)과 쇠망치질을 하는 야장신(冶匠神)이 등장하고 있어 흥미롭다. 마석신의 구체적인 신명(神名)은 알 수 없으나 {산해경}에서 이미 고운 숫돌, 거친 숫돌, 검은 숫돌등을 구별하여 다수의 산출처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마석 작업이 고대인의 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 벽화에서의 마석신의 출현은 {산해경}에서의 숫돌에 대한 이례적인 강조와 상관하여 이해할 때 자연스러움을 획득한다.

 

다음으로 야장신은 신화상으로 어떠한 신에 비정될 수 있을 것인가? 중국 민간에서는 대장간의 직업신 곧 행신(行神)으로서 노자(老子)를 섬기기도 하지만 이것은 명대(明代)의 소설 {서유기(西遊記)} 중 태상노군(太上老君)이 팔괘로(八卦爐)에서 금단(金丹)을 제련하는 장면으로부터 유래된 습속이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부합되지 않는다. 우리는 우선 이 야장신적 존재를 앞서의 축융과 마찬가지로 벽화상의 주신(主神)인 신농과의 관련하에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산해경}중 종족 간의 전쟁을 반영한 내용으로는 황제(黃帝)와 신농·치우(蚩尤) 계열 간의 투쟁신화가 대표적이다. 고대의 이 전쟁은 수차에 걸쳐 대전(大戰)으로 진행되었는데 먼저 황제와 신농이 판천(版泉)에서 전쟁을 벌여 신농이 패배하자 그 신하인 치우와 과보( ) 등이 복수전을 전개하지만 이들도 탁록( 鹿)의 싸움에서 전몰하고 만다. 그후 신농의 후예인 형천(形天) 등이 다시 도전을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천하는 황제에게 돌아간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은 산해경을 비롯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회남자(淮南子)} 등에 산발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 신농의 신하인 치우의 신적 성격에 관한 것이다. 치우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들을 보자.

 

치우씨의 형제 72인은 구리의 머리에 쇠의 이마를 하고 쇠와 돌을 먹는다.……지금 기주 사람들이 땅을 파면 해골이 나오는데 마치 구리나 쇠 같은 것이 바로 치우의 뼈이다.

(有蚩尤氏兄弟七十二人, 銅頭鐵額, 食鐵石. ……今冀州人堀地得  , 如銅鐵者, 卽蚩尤之骨也.)

 

치우는……, 구리의 머리에 쇠의 이마를 하고 모래를 먹으며 다섯 가지의 무기· · · 큰 쇠뇌 등을 만들었다.

(蚩尤……, 銅頭鐵額, 食沙, 造五兵仗刀··大弩.)

 

카이즈까(貝塚茂樹)는 이에 대해 모래나 금속을 먹는다는 표현은 그것을 재료로 삼고 정련하여 무기를 만드는 야장의 행위를 의인화한 것이고 치우는 이러한 종족의 수호신이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관자(管子)} [지수편(地數篇)]에도 치우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갈려산에서 강물이 흘러 나오는데 쇠가 따라 나온다. 치우가 그것을 캐고 다듬어 칼과 창 등을 만들었다. 옹호산에서 강물이 흘러 나오는데 쇠가 따라 나온다. 치우가 그것을 캐고 다듬어 옹호의 창을 만들었다.

(葛廬之山, 發而出水, 金從之. 蚩尤受而制之, 以爲劍···. 雍狐之山, 發而出水, 金從之. 蚩尤受而制之, 以爲雍狐之戟·芮戈.)

 

무기제작자로서의 치우의 야장신적 성격은 이제 분명해진다. 그런데 고대에 있어서 무기는 농기(農器)와 상통하기도 했다. 농업신인 신농과의 상관관계는 이 점에서도 엿보인다. 그렇다면 신농의 신하로서 무기나 농기(農器)를 벼루는 치우라는 존재야말로 벽화상에 신농과 함께 출현한 야장신에 상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논리적으로 납득은 되지만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치우의 형상은 벽화상의 모습과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신화자료에서 치우는 일반적으로 잔폭한 존재로 인식되어 있으며 그 형상도 흉악한 짐승의 꼴로 묘사되고 있다. 원가는 치우가 사실상 고대의 저명한 흉신(凶神)인 도철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들은 자신들의 세계(중원)의 파괴자인 치우에 대한 후대 한족(漢族)의 편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데쯔이(鐵井慶紀)는 황제-치우의 투쟁신화를 순전히 신화학적인 측면에서 해석하여 치우의 파괴적 행위를 원초의 혼돈상태로, 황제의 진압을 세계질서의 확립으로 읽고 있다. 다시 말해서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의 이행과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전통관념의 측면에서 보면 치우·카오스는 주변부 만이(蠻夷)의 세계요 황제·코스모스야말로 문명 중원 곧 화하(華夏)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이질적이고도 적대적인 집단의 영웅에 대한 묘사가 호의적일 리는 없을 것이다. 주변문화에 대해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 {산해경}에서 치우에 대한 악의적인 표현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이러한 논리의 반증이다.

 

아울러 진가강(陳家康)은 갑골문의 자에 대한 검토를 통해 치우(蚩尤)는 곧 구요(咎繇)로서 순()의 현신(賢臣)이자 형법의 제정자였던 고요(皐陶) 혹은 백이(伯夷)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나아가 그는 {서경(書經주서(周書)} [여형(呂刑)]편의 '치우가 처음 난리를 일으켰다(蚩尤惟始作亂)'라는 구절 중 '()'자는 '다스림'의 뜻으로 읽거나 소송辭訟의 의미인 '()'자의 착오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보면 치우는 적어도 은대까지만 해도 결코 난폭한 파괴자의 형상이 아니라 훌륭한 입법자로서의 면모를 지녔을 것임을 추정해볼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흉신의 대표적 형상인 도철조차도 은대에는 토템으로서 숭배되었던 동물이거나 신성한 존재였을 것이라는 입장을 고려에 넣는다면 우리는 주변민족으로서 은 및 동이계 신화를 공유했던 고구려에서의 치우에 대한 묘사가 주(() 계통의 전통적인 편견을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서 고구려인이 인식하는 치우는 당시 중국측에서 인식했던 것과 다를 수 있으며 따라서 흉신이 아니라 선신의 이미지로 표현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같은 취지에서 고구려 벽화상의 야장신을 치우 혹은 그에 상당하는 신화적인 영웅으로 비정하고자 한다. 물론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축융·길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벽화상의 치우도 상당히 문명화되고 인간화된 표현의 세례를 받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결국 우리는 이상의 논의를 토대로 신농-축융(혹은 그에 상당하는 신)-치우(혹은 그에 상당하는 신)-길광 등으로 나열되는 벽화공간 내의 신보(神譜)를 상정해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이러한 신보는 일반적으로, 혹은 벽화의 신화체계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우선 우리는 이들이 각각 농업신·화신·야장신·제륜신·마석신으로서의 기능적 성격을 띤 문화영웅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다. 문화영웅은 신화에서 창조신 다음에 출현하는 2차적 신격이다. 우리가 이들 신령의 이면에 깔려 있는 얼마간의 종족적 배경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들의 신성이 이처럼 신화와 역사가 겹치는 부분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들은 각기 직업의 유래를 설명하는 직업신으로서의 성격도 띠고 있다. 따라서 경철화(耿鐵華)가 이들을 고구려 수공업의 분화와 발전의 지표로서 파악한 것은 설득력을 지닌다. 마지막으로 신농·축융·치우·길광 등은 모두 동이계 신화상의 중요한 존재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길광은 {산해경}내 동이의 대신(大神)인 제준(帝俊) 곧 순()의 후예이며 치우는 앞서 고찰한 바 순의 재상이었던 고요, 혹은 백이일 수 있겠으나 일반적으로는 황제의 강력한 적수였던 동이의 대군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신농·축융 등을 치우와 아울러 남방 묘만계(苗蠻系) 종족의 대신으로 보는 견해도 없지 않으나 앞서 말했듯이 이들은 동이계 신화로부터 분화된 존재이다. 오늘날의 신화연구에 의하면 초사(楚辭)를 중심으로 한 남방신화의 제신(諸神)2/3 이상이 동이계 신령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초 문화의 형성에도 은 등 북방문화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초사에서 발견되고 있는 돌궐어(突厥語)의 흔적이라든가 시베리아 문화요소 등은 이러한 사실을 지지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울러 우리는 벽화상의 이들의 복식이 조류숭배의 한 표현인 비의(飛衣)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도 이들이 동이계 신화상의 인물로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우리는 벽화상의 신농·축융·치우·길광 등을 고구려 신화와 친연성이 있는 동이계 신화의 제신으로 파악할 것이다. 이러한 파악을 전제로 한 후 이들이 벽화상에 이룩하고 있는 신화적 의미체계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우리는 우선 이들 중 염제(炎帝) 신농·축융·치우 등 3명의 주요 신령들이 모두 불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동이계 신화의 유력한 종교적 바탕인 샤머니즘에서 불은 샤만의 능력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엘리아데는 샤만이 스스로를 보증할 수 있는 장기로서 두 가지를 들었다. 그 두 가지란 주술적 비상(magical flight)과 불의 통어(mastery of fire)이다. 우리가 앞 절에서 이미 다루었던 내용은 사실상 전자인 주술적 비상의 취지가 벽화상의 신화·도교적 제재들을 통하여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상관된 것이기도 하였다. 다시 샤만의 장기인 불의 통어의 테크닉과 관련하여 벽화상의 신농·축융·치우 제신의 근원적 지위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동이계 신화의 샤머니즘적 기반을 염두에 둘 때, 본래 동이계 종족의 군장이었던 이들이 샤만이거나 은대의 임금들처럼 무군(巫君, Shaman King)적 존재이었을 것으로 추정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주술적 비상에 능숙할 뿐 아니라 불의 탁월한 운용자라는 가정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오늘날 도교학자들은 도교의 기원을 논할 때 대부분 샤머니즘을 가장 핵심적인 근거로서 거론한다. 앞 절의 논의에서도 밝혀졌지만 주술적 비상의 취지가 후대 도교에서 승교( )의 법술로 발전해간 것은 하나의 뚜렷한 실례이다. 우리는 신농·축융·치우와 같은 초기 무군들의 불의 통어술이 야금술적 단계를 거쳐 단약(丹藥) 합성을 위한 연금술적 단계로 이행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이후의 도교에서 수련의 비중이 외단(外丹)에서 내단(內丹)으로 바뀌었다 하더라도 불의 통어, 즉 신체 내부 불기운火候의 조절은 득선(得仙)을 위해 여전히 중요한 과제였다. 이 점에서 그라네(Marcel Granet)가 일찍이 야장집단과 도교와의 기원적 상관성에 주목했던 것은 놀라운 착상이었다. 신선가들이 옛날의 야장이 금속을 정련해냈던 것과 똑같은 정신으로 갖가지 광물질 약재를 가열하여 불사의 단약을 추출해내려 했다는 유비(類比)는 여기에서 가능해진다.

 

우리는 {열선전}상에 기록된 초기 신선 중의 일부가 야장 출신이거나 최소한 불의 탁월한 운용자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적송자(赤松子)'불 속에 들어가 제 몸을 태우는(能入火自燒)' 능력을 지녔고 영봉자( 封子)는 도공(陶工)의 우두머리陶正였으며 양모(梁母), 사문(師門) 등도 모두 불을 다루는 기술을 터득한 인물들이었다. 특히 다음의 도안공(陶安公) 설화에서는 야장으로서 득선을 달성하는 과정이 선명히 표현되어 있다.

 

도안공이라는 사람은 육안의 대장장이였다. 자주 불을 지폈는데 어느 날 아침 (불이) 흩어져 위로 올라가더니 자줏빛이 하늘에까지 뻗혔다. 안공은 대장간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조금 있다가 주작이 대장간 위에 날아와 앉아 말하기를 '안공이여, 안공이여, 대장간과 하늘이 통하였다. 칠월 칠석날 너를 붉은 용으로 맞이해 가마'고 하였다. 그날이 되자 붉은 용이 오고 큰 비가 내렸으며 안공은 그것을 타고 동남쪽 하늘로 올라갔다. 온 성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전송하였고 (그는) 모든 사람들과 작별을 했다고 한다.

(陶安公者, 六安鑄冶師也. 數行火, 火一旦散上行, 紫色衝天, 安公伏冶求哀. 須臾, 朱雀止冶上曰, 安公安公, 冶與天通, 七月七日, 迎汝以赤龍. 至期, 赤龍到, 大雨, 而安公騎之東南上. 一城邑數萬人, 衆共送視之, 皆與辭決云.)

      

샤만이면서 야장의 성격을 지니기도 한 원시 신선가의 형상이 이처럼 확실하게 제시된 예도 드물다. 불의 통어가 주술적 비상의 능력으로 직결된다는 이러한 사유는 앞서 말한 바 있듯이 후대에 이르면 용광로가 아닌 화로 속에서의 단약의 제련이라는 시도를 낳게 된다. 이와 같은, 신화에서 도교로의 전이 과정을 염두에 두고 벽화상의 야장신 및 화신 모티프를 해석할 때 고구려 도교에 대한 이제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이 부각되어 온다. 그것은 다름아닌 단약제련을 중심으로 하는 금단도교(金丹道敎)의 존재이다. 이미 예시(例示)한 바 있듯이 송인(宋人) 증조( )가 지은 {도추(道樞)}에서는 금단도교의 기본서인 {주역참동계}의 성립에 대해 논하면서 이 책이 후한인(後漢人) 위백양이 장백산의 진인으로부터 금단의 비결을 전수받아 이루어진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설화를 전술한 내용과의 상관하에 고려해보면 고구려·만주 지역에도 금단도교가 실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증류본초(證類本草)}금설(金屑) ()에는 양()의 저명한 도사 도홍경(陶弘景, A.D. 456536)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자연산 금은 벽사의 효능이 있으나 유독하여 제련하지 않고 복용하면 사람이 죽는다.…… 고구려·부남 및 서역 등 외국에서는 기물을 만들 때 모두 (금을) 잘 제련하여 복용이 가능하다. {선경}에서는 꿀·비게·식초 등으로 약재인 금을 다듬어 부드럽게 해서 복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신선가들은 또한 수은을 합성해서 단사를 만드는데, 다른 의학 처방으로는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은 당연히 그 유독함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선약의 처방에서는 금을 태진이라 한다.

(生金 惡而有毒, 不鍊服之殺人, …… 高麗·扶南及西域外國成器, 皆鍊熟可服. 仙經以醯密及猪肪牝荊酒輩, 鍊餌柔服之. 神仙亦以合水銀作丹砂, 外醫方都無用者, 當是慮其有毒故也. 仙方名金爲太眞.)

 

도홍경의 이러한 언급은 고구려가 자연산 금을 약재로서 복용할 수 있도록 처리하는 기술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의미함으로써 고구려의 야금술, 나아가 주로 광물질 조제작업인 연단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을 것이라는 심증을 우리에게 준다. 미키(三木榮)는 이 대목을 근거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 금단도교의 존재를 추정했고 전상운(全相運) 교수는 이 내용을 발해만의 삼신산 전설 등과 연관시켜 오히려 고구려의 연단술이 중국에 전해졌을 가능성까지 과감하게 추리하였다. 이러한 추리는 앞서의 {주역참동계}의 성립설화와 상관지워 볼 때 전혀 무리한 것은 아니다. 다만 전교수가 주로 근거하고 있는 {증류본초}상의 언급이 특별히 고구려산 금의 우수성 만을 지칭한 것은 아니어서 확실한 논거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런데 연단술의 기원에 대해서는 일찍이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상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소군이 임금께 아뢰었다. '부뚜막신께 제사드리면 귓것을 불러올 수 있고 귓것을 불러올 수 있게 되면 단사를 황금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황금을 이루어 그것으로 음식그릇을 만들면 오래 살 수 있습니다.

(少君言上曰,  則致物, 致物而丹砂可化爲黃金, 黃金成, 以爲飮食器則益壽.)

 

이소군은 한무제 시기에 활약했던 제() 출신의 유명한 방사(方士)이다. 방사란 샤만에서 도사(道士)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존재로 원시 신선가라 말할 수 있다. 다소 종교화된 표현을 취하고 있으나 윗 글에서도 화신, 야장신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부뚜막 신이 연단에 있어서 결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벽화상의 야장신에 대한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아울러 같은 책에서 이소군은 득선을 달성하기 위해 산동 지역의 팔신(八神)께 제사를 드릴 것을 무제에게 권유하는데 이중 유일한 인격신으로 치우가 제시되고 있다. 연단술의 기원에 관한 이러한 내용들은 우리가 앞서 고찰한 벽화상의 야장신적 모티프에 대해, 최소한 고구려 문화와 연단술과의 상관성 나아가 발생론적 관계의 측면에서까지 다시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예상해온 바 벽화공간 내의 야장-신선, 야금술-연단술의 신화·도교적 체계를 검증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앞서의 신화적 자료에 대한 검토에 이어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문헌이 아닌 벽화상에 도교 즉 연단술에로의 연속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실재하여 과연 우리가 추론한 바 있는 문화체계를 구성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이병도(李丙燾) 교수의 강서(江西) 대묘(大墓) 벽화에 대한 이른 탐구가 적절한 시사를 줄 것으로 생각된다. 이교수는 천장부 제1층 개석(蓋石) 북쪽 면에 그려진 비선(飛仙)에 대한 분석에서 이 비선의 왼손에 들려 있는 것을 약그릇藥器으로, 오른손에 들려 있는 것을 영지(靈芝)로 논정(論定)하였다. 영지는 {포박자} [선약(仙藥)]편에서 중요하게 거론되고 있는 약재로서 단사(丹砂)만은 못하지만 초목성의 약재중 유일하게 상층의 선약으로 분류되어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단약이 담겨있는 약그릇의 존재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금단 즉 단약을 빚어내는 연단술의 존재를 무리없이 상정할 수 있다. 약그릇과 연단술간의 이같은 자연스러운 연상관계는 다음의 글귀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한의 회남왕 유안은 신선과 연금술에 관한 일을 말하여 {홍보만필} 3권이라 이름지었는데 여기에서 그는 변화의 도술을 논하였다. 이때에 8공이 왕에게 나아가 {단경} {36수방}을 전수하였다. 항간에서 전하기로는 유안이 신선이 되어갈 무렵에 먹고 남은 약그릇이 뜨락에 있었는데 닭·개가 이것을 핥아먹고 모두 날아서 올라갔다 한다.

(漢淮南王劉安, 言神仙黃白之事, 名爲鴻寶萬畢三卷, 論變化之道. 於是八公乃詣王授丹經及三十六水方. 俗傳安之臨仙去, 餘藥器在庭中, 鷄犬 , 皆得飛升.)

 

고구려 금단도교의 존재를 추정케 하는 약그릇은 사실상 강서대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논해 온 야장신의 공간인 오회분 사호묘에서도 출현하여 바야흐로 일련의 신화-도교적 체계를 웅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널방 천장부 고임 앞면에 그려진 공작을 탄 신선 형상이 그것으로 그는 다름아닌 약그릇을 두 손에 받쳐들고 있다. 이 그림은 강서대묘의 그것이 비천의 형상에 가까운 신선이었음에 비해 완연한 도교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약그릇이 함축하는 의미를 더욱 정확히 표명해 주고 있다. 결국 우리는 앞서의 '조인일체의 세계'에 대한 탐색에 이어 벽화 공간 내의 동이계 화신 및 야장신의 계보가 수많은 여타의 도교적 제재들과 더불어 또 하나의 연속적 문화체계 속에서 읽혀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 에필로그

이제 우리는 기나긴 논의의 여정을 마치고 왜 고구려인가? 라는 애초의 물음이 함축하였던 근본적인 문제의식에 대해 납득할 만한 답안을 마련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그 문제의식이란 고구려 벽화상에 표현된 문화내용에 대한 변별적 인식의 필요성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하는 독법의 문제와 상관된 것이었다. 우리는 우선 탈중원의 신화론적 시각과 주변문화에 뿌리를 둔 도교적 관점을 이러한 문제의식을 해결하기 위한 유력한 해석기제로서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는 {산해경} 신화를 중심으로 한 동이계 신화의 도교에로의 전이과정을 상정하면서 고구려 벽화상에 다수 출현하고 있는 {산해경}적 제재에 대해 주목한 바 있었다. 우리의 논의는 벽화상의 조인일체 형상과 야장신이 표현하는 두 개의 문화체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이들 체계는 각기 인면조-우인-승조신선과 야장·야금술-신선·연단술로 이어지는 일련의 신화·도교적 문화구조로서 파악되었다. 그런데 고구려 고분의 가장 이른 성립시기는 기원 4세기 중엽이고 동이계 신화의 핵심적인 내용의 도교에로의 전이가 일단 완료된 시점은 대략 2세기 후반, 오두미도 성립 무렵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분 벽화상의 신화·도교적 제재들이 사실상 순차적으로 출현한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당시에 이르는 일련의 문화내용들이 한 공간 내에 동시에 표출된 문화적 정체(整體)임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벽화 내의 이러한 문화체계들이 근대 이래의 단순한 진화론적, 과학적 도식처럼 읽혀져서는 안될 것이라는 점이다. 신화·주술적 세계에서의 패러다임은 뒤의 것이 앞의 것을 대체하고 폐기시키는 관계가 아니라 감싸안고 나아가는 포월적(包越的)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임을 이해할 때 우리는 동일 벽화상의 전·후 제재들의 무수한 공존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 글을 통해 우리는 고구려 벽화의 내용 하나 하나에 대한 지나친 분절적(分節的) 이해를 지양하고 벽화 전공간에 대해 신화·도교적 전망과 관련한 일련의 문화적 체계성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도가 서론에서 제기하였던 문제의식의 해결을 위해 얼마만큼 유효성을 지니는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충분한 검토를 기다려야 할 것이지만 이 글의 소임은 다만 향후의 현안이 될 수도 있는 중국과 주변문화와의 관계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예증하는 데에 있다 할 것이다.

. 정재서

출처:http://pasj.egloos.com/1137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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