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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삼성혈 신화 형성에 관한 논문입니다.

제주도 三乙那 신화의 형성에 관하여

박종성(국어국문학과 교수)

 

1. 머리말

제주도 삼을나 전승과 관련하여 김석익의 탐라기년에 부기된 기록을 가지고 논의를 시작한다.

 

우암 송시열이 이르기를, 세 신인이 탐라의 한라산에 내려왔다고 한다.

宋尤菴時烈曰 三神人降于耽羅之漢拏山 ????耽羅紀年????

 

땅에서 솟아난 삼을나가 탐라의 세 시조가 되었다고 하는 것과 전혀 별개의 전승이다. 제주의 담수계가 편찬한 ????탐라지????에서는 세 신인이 모흥혈에 탄강했다고 전하고, ????담수지????에서는 고을나가 한라산에서 생했다고 하는 기록이 계속 전한다. 제주 본래의 신화소가 아닌 탄강형 신화소가 전승된다고 하는 것은 특별한 필요가 있어 후대에 부회된 것일 수 있고, 한편으로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 이런 전승을 배제하지 못하고 부기하여 그 내력을 전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본토에서 창세서사시와 건국 시조 전승이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판단되므로 이 신화소가 이 지역 창세서사시의 변천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하늘옥황 천지왕의 인세 탄강과 지상 여인과의 결연, 그리고 인간 영웅 형제이면서 신이기도 한 대별왕과 소별왕의 출생 따위는, 그 실상을 알기 어려우나 삼을나의 탄강 전승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창세서사시와 삼을나 시조 전승은 별개의 내용으로 전승되므로 김석익이 부기한 탄강형 시조 전승을 신빙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1918년 경에 간행된 탐라기년에 부기된 내용은 삼을나 전승의 가장 이른 기록인 ????고려사지리지????의 그것과 다를 뿐 아니라 현재 제주에서 삼을나의 탄강형 전승을 확인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탄강형 시조 전승을 부기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살펴야 할 것이고, 이것이 제주의 삼을나 시조 전승에 연결되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해야 할 것이다.

 

2. 을나(乙那)의 계통과 의미

 

<삼성신화><을나신화(乙那(乙羅)神話)>로 명명하자는 견해가 있는데 이 을나(乙那,乙羅)’의 의미에 대해서도 자세히 규명해 볼 필요가 있다. 대체로 을나어린아이라고 보는 입장이 무난하게 통용되고 있으나, ‘··부씨 성을 가진 어린아이라고 해서 신화의 내용과 연결하면 뭔가 석연치 않다. 따라서 장성한 남성으로 땅에서 솟아나서 화살을 쏘아 자리를 잡은 세 신인을 삼을나라 칭한 것은 을나에 어린아이라고 하는 의미 이전에 을나(乙羅)’가 지닌 본래적 의미가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고대어를 재구하는 방법론에 기대어 을나의 계통을 확인하기로 한다.

 

백제는 그 선대가 대개 마한의 속국으로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仇台)라는 자가 있어 대방에 나라를 열었다. 왕의 성은 부여씨이며 호를 어라하(於羅瑕)라 하고 백성들이 부르기를 건길지라 한다. 중국말로 왕이란 뜻이다. 또한 매년 네 번에 걸쳐 그 시조인 구태(仇台)의 사당에 제사지낸다.(百濟者 其先蓋馬韓之屬國 夫餘之別種 有仇台者 始國於帶方···王姓夫餘氏 號於羅瑕 民呼爲鞬吉支 夏言幷王也···又每歲四其始祖仇台之廟 <????周書????, 이역전 백제전>)

 

왕의 성()은 부여씨(夫餘氏)이고 이름은 어라하(於羅暇)이니, 백성들이 부르기를 건길지(鞬吉支)라고 하는데 이것은 중국말로 왕()이라는 뜻이다. 또 왕의 아내는 어륙(於陸)이라 하는데, 이것은 중국말로 비()라는 말이다. (王姓餘氏 號於羅瑕 百姓號爲鞬吉支 夏言並王也 王妻號於陸 夏言妃也 <????北史???? 94 백제전>)

 

백제는 부여의 별종으로, 왕은 부여씨로 성을 삼고, 왕호가 어라하(於羅瑕())’라 했다는 기록이다. ‘어라하라는 명칭에 관한 해석은 다양하나, ‘(,)’의 표기로서 원래 대()를 뜻하는 어사이나 어라와 결합하여서는 관직명의 접미사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 어사는 부여나 고구려에서는 ()로 표기되어 용례를 남기고 있다.

 

모두 여섯 가축의 이름을 딴 관직명이 있는데,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가 있으니 (皆有六畜官名 有馬加 牛加 猪加 狗加 <????삼국지???? 부여전>)

 

왕의 종족에 대가는 모두 칭하여 대추가라 하고 능히 고추가라 칭하니(王之宗族 其大加 皆稱 大鄒加 得稱古鄒加 <????삼국지???? 고구려전>)

 

한편 어라는 존장자 내지는 수장에게 붙여지는 존칭이므로 어라에 본래 의미가 있다 이도학, 앞의 책, 32-36면에 於羅瑕의 의미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잘 정리했으나, 국어학의 입장에서 보면 체계적이지 못하다. ‘於羅瑕()’에 관해서는 千素英, ????古代國語語彙硏究????, 고대 민족문화연구소, 1990, 118-119면과 류렬, ????세나라시기의 리두에 관한 연구????, 과학, 백과사전출판사, 1983, 340면을 참고한다.. ‘어라존귀하고 신성한 것을 지칭하는 존장자의 호칭으로, 인명에서 알지(閼智), 알영부인(閼英夫人), 아루부인(阿婁夫人), 을지문덕(乙支文德), 알평(閼平) 등의 용례를 보이며 閼智가 신라의 왕명임으로 하여 부여계 언어가 아니라고 할수 있으나, 金氏 왕통의 무덤 양식이나 금관 양식으로 볼 때, 북방 유이민 집단으로 볼 충분한 근거가 있다. , 지명에서는 알야산(閼也山), 어라산(於羅山), 어을외령(於乙外嶺), 어래산(魚來山) 등의 용례가 있다. 고대어의 한자음 표기 방식에서도 을나혹은 을나의 중첩된 음과 어라의 문제가 쉽게 해결되어 둘 사이의 친연성은 거듭 확인된다.

한자 표기로 음이 중첩되어 있으나 하나가 발음되지 않는 현상은 우리말의 한자(漢字) 차자표기(借字表記)의 여러 사례 가운데 (乙以)’에서 보듯이 표기는 을로로 되어 있으나 실제 발음은 으로이므로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로 읽히는 것은 의 훈독인 ‘-으로를 가져다 썼기 때문이다. . 또한 ()’는 고구려 지명에서 어을(於乙)’로 표기되기도 하고, 신라 지명에서는 다시 ()‘로 표기되기 하여 ()’로 발음되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그렇다면 어라(於羅)’는 실제 발음이 얼라로 되어 <삼성신화>을나(乙那())’와 같은 음으로 읽히게 된다. ‘어라을나의 친연성은 김석익이 탐라기년에서 을나를 아래와 같이 해석한 대목에서도 다시 거듭 확인 된다.

 

혹 이르기를 을()은 을두(乙豆), 을파(乙巴)와 같은 종류요, ()는 거서나(居西那)와 같은 종류로서 임금을 높여 부르는 칭호라 한다. 또 이르기를, 을나는 신라의 혁거세의 칭호와 같은 것이라 하니, 모두 방언으로 임금이라는 말이다.(或曰乙如乙豆乙巴之類 那如居西那之類 尊君之稱 又曰乙那如新羅赫居世之稱 蓋鄕言王也

 

김석익의 진술은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 당시에 널리 인식되었던 을나의 의미를 옮겨 적은 것이어서 신빙성이 있다. 당대의 사람들이 을나를 임금의 칭호로 알았다는 사실은 을나와 어라가 같은 의미를 지닌 단어임을 입증한다. 을나가 곧 임금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이는 부여어인 어라이외에는 형태와 의미상 친연성을 갖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기에, ‘을나는 곧 어라의 다른 이름임이 분명해진다. 한강의 옛 이름이 阿利水혹은 郁里河였고 이곳에 위치한 백제국의 도성이 慰禮였던 점을 연결하면, ‘어라 = 욱리 = 위례존귀하고 신성한 곳크다는 의미를 근간으로 한 명칭임을 알게 된다.

김석익의 이해대로 을()과 나()를 분리시켜 이해해 보는 경우에도, ‘어라(於羅)’()’이 같은 계통의 말이라 한 천소영의 논지를 받아들이면, 이 둘이 동음동의(同音同意)의 차자이표기(借字異表記)로 볼 수 있다. 알야산, 어라산, 어을외령의 지명에서처럼 어라(於羅)’어을(於乙)’과 같아 에 근사한 음으로 읽힐 수 있고, ‘을지문덕어라(於羅)’와 같은 음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문도 일찍이 어을(於乙)’로 읽혔을 것이라 한 바 있다 李基文, 高句麗言語特徵, ????白山學報???? 4, 1968, 33-5.. 그에 논지를 이으면, ‘어라하어라역시 어을혹은 로 읽힐 수 있으니, ‘을나과 통하는 음이라 하겠다. 이기문은 혹은 어을이 정천(井泉) 곧 물을 뜻하는 말이라 하였는데 위와 같음. 이기문은 淵蓋蘇文????日本書紀????이리가수미로 읽혔다 하고 이리가 곧 이므로 井泉을 뜻하는 고대어의 於乙과 통하는 것이라 했다. , <삼성신화>와 관련하여 혼인지라 하는 못이 온평리에 있어 삼을나가 이곳에서 목욕하고 벽랑국(碧浪國)에서 온 세 처녀와 혼인한 내용이 전한다. 물이 지닌 상징적 의미를 드러내면서 존장자 혹은 왕의 의미를 지니는 계통에 이어져 있다고 하겠다 정경희. ????韓國古代社會文化硏究????, 일지사, 1990, 148면에서 이기문의 논지를 받아들여 乙那於羅’·‘於乙과 같은 계통일 것이라고 한 바 있다.

 

다음으로 ()’를 살핀다. ‘()’()’와 혼용되기도 하나 ()’과 분리시켜 ()’의 의미에 접근하면, 이는 곧 집단 혹은 부족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국사학계에서는 ()’가 노(()와 그 음이 통하는 같은 의미의 이표기라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고구려의 다섯 부족의 명칭이 ????삼국지(三國志)???? 고구려전(高句麗傳)에서는 연노부(涓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계루부(桂婁部)라 하기도 하고,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는 고구려에 통합된 조나(藻那)와 주나(朱那)를 비롯하여 비류나부(沸流那部환나부(桓那部관나부(貫那部연나부(椽那部) 등이라 했다. 곧 노()와 나()는 같은 말이다. 나부(那部)는 단순한 지역정치집단을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나국(那國)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기 이전의 나()는 지역적 정치집단의 의미에서 나집단(那集團)’이라 할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5, 1996, 20-21면 참고.. 고구려는 나집단이 성장하여 연합한 국가인 것이다. 여기에서 ()’가 고구려 연합 집단을 의미하므로 삼을나의 ()’와 함께 견줄 수 있다. ‘의 의미를 함께 묶어 이해하면, 이는 곧 고((()라고 하는 세 우두머리가 분립하여 연합하면서 탐라를 건국했다는 것이 되고, 그 형태가 고구려의 지역 정치집단의 이름인 나집단형태라고 하는 가설이 성립할 수 있다. 곧 고씨와 양씨와 부씨를 우두머리로 하는 나집단의 연합이 탐라의 개국인 셈이 된다. 부여·고구려계의 칭호인 어라(於羅)’, ‘어을(於乙)’이 같은 계통이고 보면, 어느 쪽이든 을나(乙那)’어라(於羅)’ 어을(於乙)’의 관련성은 제기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 칭호가 탐라 본래의 고유어가 아님은 인정된다고 하겠다 참고로 ????高麗史???? 世家 卷 4 인종 98월조 기사에 女眞의 추장 이름에 徐乙那가 보인다. 그외에 여진의 酋長에 해당하는 이름에 要乙乃, 閼那 따위가 보이는데,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흥미롭다.

 

제주도 개국신화에 나타나고 있는 칭호는, 곧 삼성의 시조신으로 숭앙되던 세 신인 가운데 하나가 고구려에서 출자한 집단을 표방하고 있다는 추정을 해볼 수 있게 한다. 백제왕의 호를 어라하라 한 기록을 고려하여 을나에 접근하면 본고의 관점에 따라 신화의 내용과도 어긋남이 없이 그 의미가 풀이된다.

 

3. 묘제 양식과 철기 유물의 계통과 시기

제주시 용담동 유적에서 발굴된 묘제는 석곽묘 양식이다. 이 양식은 제주도와 가까운 한반도 남해안 지역의 같은 시기의 묘제 양식과 전혀 다르다. 토광을 파서 목관(木棺)을 묻거나 목곽(木槨)을 짠 형식과 완전히 별개이며, 오히려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 지방에서 기원후 1-3세기경에 축조된 무덤들의 양식이 용담동의 그것처럼 적석묘역을 하고 무기단(無基壇) 적석(積石)의 수혈(竪穴) 석곽(石槨)의 형태를 보이므로 이쪽에 가깝다. 이청규, ????濟州道 考古學 硏究????, 학연문화사, 1995, 254-255면 참고. 묘제란 가장 보수적이면서 오랜 기간 유지되는 문화적 관습이므로 대단히 멀리 떨어진 고구려와 탐라 사이에 묘제의 공통점이 발견되는 것은 이 시기에 고구려 출자 집단이 탐라에 입도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제주지역에는 청동기문화의 유입 없이 곧바로 철기문화, 그것도 초기철기문화가 아니라 한식철기문화가 유입되었다는 고고학계의 발굴 보고가 있다. 한식철기문화는 한반도와 제주시 용담동 석곽묘에서 부장된 유물을 통해볼 때, 원삼국시기 혹은 삼국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대개 1-3세기경으로 무기단 적석의 횡혈식 석곽묘의 시기와 일치한다. 묘제와 철기유물의 시기적 일치를 우연한 것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고구려는 일찍이 철()에 대한 특별한 신앙을 지니고 있을 정도로 철기문화의 꽃을 피웠던 국가였는데 이 사실과 어떤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滿洲 집안현 통구의 5괴분 4호분과 제 5호분의 벽화에서 을 다루는 대장장이 신(鍛冶神)과 수레바퀴를 만드는 製輪神의 그림이 발견되었는데, 鍛冶神의 벽화가 그려진 예는 東方에서 高句麗를 제외하고는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이는 高句麗에서 鍛冶神에 대한 특별한 信仰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고 더불어 鐵器文化와의 깊은 관련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李亨求, ????韓國 古代文化起源????, 까치, 1991, 214-9면 참고. .

 

4. 입도 시기 비정

문헌기록이나 구비전승에서 고··부 세 신인이 용출한 때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택리지에 이르기를 한명제 영평 팔년 을축에 붉은 기운이 남쪽 바다에서 떠올랐으니, 삼성의 출생이 혹 그때가 아닌가 한다고 했다. (擇里志曰 漢明帝永平八年乙丑 紫氣浮於南溟 三姓之出疑其時歟 <金錫翼, ????耽羅紀年????>)

 

2) 대개 삼성이 출생한 것은 구한 때가 맞다. 후한의 명제 영평 8년에 붉은 기운이 남쪽 바다에서 떠올랐으니 삼성의 출생이 혹 그 때인 듯하다. (蓋三姓之出正當九韓之時 後漢明帝永平八年 紫氣浮於南海 三姓之出疑其時 <編禮抄>)

 

3) 영평 팔년(永平八年) 을축(乙丑) 삼월 열사을날 시 셍천 고의왕(高爲王) 축시 셍천 양의왕(良爲王) 인시 셍천 부의왕(夫爲王) 고량부 삼성 모은공(毛興穴)로 솟아나 도업 던 국이웨다 <安仕仁, 초감제>

 

4) 영평 팔년 을축 삼월 열사을날 시에는 고의왕 축시에는 양의신충(良爲臣忠) 인시에는 북의면(夫爲民) 설립던 섬이우다. <男巫 金氏, 초감제>

 

5) 고량부 삼성왕이 무운굴로 솟아지면 연평 팔년(永平八年) 을축 삼월 열 사흘날은 시에는 고위왕 축시에는 양위왕 인시에는 부위왕 삼성왕이 도업던 섬이우다.<강태욱, 초감제> 이상의 자료는 ????耽羅文化???? 14, 濟州大 耽羅文化硏究所, 1994에 수록된 <三姓神話> 관련 기사 부록과, 김헌선, ????한국의 창세신화????, 길벗, 1994에 수록된 자료를 재인용한다.

 

????탐라기년(耽羅紀年)????1)에 이어 高氏家譜曰 三神湧出在漢宣帝五鳳二年乙丑이라 하는 다른 설도 기재하고 있어서 1)의 기록을 김석익이 편의상 취택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있었던 두 가기 이설을 함께 옮겨 놓은 것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구비전승되는 삼성신화에서는 대개가 1)의 내용을 말하고 있어 전하(前漢) 선제(宣帝) 때에 비해 후한 명제 시기라고 하는 쪽이 강한 전승력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문헌과 구전에서 분명하지는 않으나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영평(永平) 8년이라고 삼성의 출현 시기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는 기원후 1세기에 해당하므로 앞서 살핀 묘제 양식과 철기 유물의 시기와 크게 차이를 두지 않는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 11 탐라현조(耽羅縣條)에 고씨 집단의 입도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15대손 고후(高厚고청(高淸) 형제 세 사람이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닿았는데, 이때는 신라가 융성하던 시기였다. 이때에 객성(客星)이 남방에 보였는데, 태사가 이렇게 아뢰었다. “다른 나라 사람이 와서 조회할 징조입니다.” 후의 무리가 이르매, 왕이 가상하게 여겨서 맏이를 성주(星主)(성상이 동하였기 때문이다) 칭하고, 둘째는 왕자라 하고(왕은 청()을 자신의 가랑이 아래로 지나가게 하는 등 사랑하기를 자기 자식같이 하였다), 막내를 도내(都內)라 하였다. 뒤에 양()을 고쳐 량()이라 하였다고 한다. 至十五代孫 高厚高淸昆弟三人 造舟渡海至于耽津 盖新羅盛時也 于時客星見于南方 太史奏曰 異國人來朝之象也 遂朝新羅王嘉之 稱長子曰星主(以其動星象也) 二子曰王子(王令淸出胯下愛如己子故名之) 季子曰都內 後又改良爲梁

 

고씨 형제가 고을나의 15대손이라 했으니 이 기록을 신빙한다면, 고을나가 탐라에 터를 닦은 지가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어지는 기록에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백제 동성왕의 탐라 친정 기사를 소개하면서 이후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했다.

 

왕이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아 친히 정벌에 나서 무진주까지 이르자,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죄를 빌었다. (王以耽羅不修貢賦 親征至武珍州 耽羅聞之 遣使乞罪乃之<????三國史記???? 26 백제본기 4, 동성왕208월조>)

 

동성왕 20년은 498년에 해당하니 앞의 기록에서 15대를 인하(引下)하면 삼을나 출현시기를 1세기경으로 볼 수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하면 기원 후 1세기경에 고구려계 출자 집단의 탐라 입도가 인정되고 이 세력이 곧 탐라의 시조 가운데 하나인 고을나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고구려계통의 묘제나 철기 유물의 존재 시기는 인정될 수 있으나 한 명제 영평 8년이라 확정한 시기는 모두가 후대의 기록이어서 완전히 신빙하기는 어렵다. 곧 이시기에 고구려게 집단의 탐라 입도는 인정되나, 이들이 곧 탐라의 시조 가운데 하나라고 단언하기에는 신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삼을나 출현 시기를 확정한 후대의 기록과 구비 전승이 역사적으로 있었던 고구려게 탐라 입도를 견인하여 생긴 결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함께 연결해서 전승하고 기록해야 했던 어떤 사정이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5. 탐라의 고대사 기록과 고구려와의 관계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한 결과를 통해, 고대 탐라에는 기원후 1세기경에 고구려 출자 집단의 입도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결국 탐라에는 고구려계통의 집단이 입도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판단되는데, 이 추정이 타당한지의 여부를 탐라 고대사 관련 기록을 통해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삼성신화>의 형성에 고구려계 집단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은 탐라의 고대사를 살피는 과정에서 재확인할 수 있다. 한국 고대사에서 탐라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본토와 지리적으로 격리된 것이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여기서는 탐라의 고대사를 사서의 기록을 통해 가능한 한 검토하여, 탐라에 입도한 본토 집단의 성격을 추정해 본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관련 기사를 소개한다.

 

탐라국에서 방물을 바치니 왕이 기뻐하며 사신을 은솔로 삼았다.(耽羅國獻方物 王喜拜使者爲恩率 <????三國史記???? 26 백제본기 4, 문주왕 2년 하4월조>)

 

왕이 탐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아 친히 정벌에 나서 무진주까지 이르자,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죄를 빌었다. (王以耽羅不修貢賦 親征至武珍州 耽羅聞之 遣使乞罪乃之<????三國史記???? 26 백제본기 4, 동성왕208월조>)

 

사신을 위로 보내어 조공하니, 세종은 그 사신 예실불을 동당에서 인견하였다. 예실불은 나아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정성껏 대국과 관계하여 여러 번 정성을 다해 토지의 산물을 허물없이 조공하였으나, 다만 황금은 부여로부터 나오고, 가옥(珂玉)은 섭라(涉羅;耽羅)에서 생산되는바, 부여는 물길의 쫓는 바가 되고, 섭라는 백제가 아우른 바가 되어 이 둘을 왕부에 올리지 못하는 소이는 실로 양적(兩賊)이 이러하기 때문입니다.”(遣使入魏朝貢 世宗引見其使芮悉弗於東堂 悉弗進曰 小國係誠天極 累葉純誠地産土毛 無愆王貢 但黃金出自夫餘 珂則涉羅所産 夫餘爲勿吉所逐 涉羅爲百濟所幷 二品所以不登王府 實兩賊是爲 <????三國史記???? 19 고구려본기 7, 문자왕13년 하4월조>)

 

세 기록을 보면, 탐라가 백제에 조공하였다는 최초의 시기는 문주왕 2년인 476년이고, 조공을 중단하다가 동성왕의 친정 소식에 놀라 조공을 재개하는 것은 동성왕 20년인 498년이며, 고구려에서 탐라의 조공을 받지 못한 것은 문자왕 13년인 504년이다. 탐라가 백제에 조공을 개시한 시기로부터 중단된 시기까지는 불과 22, 그러니까 20년이 못되어 조공을 중단하다가 22년에 이르러 조공을 재개한 셈이 되는데, 이는 고구려와의 조공관계 때문으로 이해된다. 탐라는 어느 시기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고구려에 조공하기 시작하다가 504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 조공을 중단했다는 것이다. 고구려에 조공을 중단한 이유는 동성왕의 탐라 병합 때문으로 보이며, 그 이전까지 백제가 아닌 고구려와 조공관계를 맺으면서 교통한 사실이 인정된다. 탐라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백제를 마다하고 원거리의 고구려에 가옥 따위를 조공한 이유는 탐라의 지배세력 가운데 고구려와 관련한 세력이 존재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탐라가 지리적으로 백제와 가야를 넘어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고 있다가 중단하는 기록이 그 증거이다. 조공을 바친다는 것은 나라 간의 우열관계를 인정하는 표지인 만큼 탐라가 백제와 인접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으면서도 조공하지 않고 고구려에 조공한 이유는 고구려와 탐라의 특별한 관계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신공(神功) 49년 즉 A.D.227년에 신라정벌을 위해 제·왜 연합군이 출병한 사실과 이를 백제의 장군인 목라근자(木羅斤資)가 통솔하도록 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남해안 7국을 평정하고 이어 침미다례(忱彌多禮)를 정벌하여 백제에 바쳤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日本書紀???? 신공 49년조. 성은구 역주, ????日本書紀????, 정음사, 1987, 222.. 일련의 대외 정벌 기사는 길어야 4세기를 넘지 않는다. 침미다례를 탐라로 비정하여 이 시기에 탐라가 백제에 귀속되었다고 하나, 이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관련 기사를 검토하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 더욱이 침미다례는 탐라가 아니라 현재의 전라남도 해남의 소국으로 비정되는 것이 정설이어서 ????일본서기????의 침미다례는 탐라가 아님이 분명하다. 따라서 탐라가 백제에 복속된 시기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5세기말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탐라가 백제에 복속되기 이전까지 원거리의 고구려와 활발하게 통교하고 근거리의 백제와는 조공관계를 맺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된다. 근거리의 백제를 마다하고 원거리의 고구려와 통교하고자 한 탐라의 사정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앞서 제시한 고구려 문자왕 13년 조의 기사는 탐라가 지속적으로 고구려와 통교한 사실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탐라의 세력 가운데 백제를 멀리하고 고구려와 통교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지닌 세력집단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는데, 앞서 <삼성신화>의 외재적 조건들을 검토한 결과를 고려하면, 그 이유의 일단이 해명될 수 있다. <삼성신화>의 형성 세력 가운데 고구려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쪽이 있어서 백제가 아닌 고구려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6. 삼을나 전승의 재편에 관하여

이상에서 살펴 본 결과 고대 탐라국에는 고구려계 입도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현전 <삼성신화>의 삼을나 가운데 고을나가 있어 이쪽이 고구려계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 판단을 유보해야 할 것이며, 전체적인 상황을 해명할 수 있는 차원에서 다시 접근해야 할 것이다.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三國遺事???? 1, 고구려조 / ????三國史記???? 13, 고구려조>

始祖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 <????三國史記????, 13, 고구려조>

 

옛 기록에 고구려의 왕성(王姓)이 고()라고 했다. 고씨가 지금과 같이 온전한 성씨일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을 유보하더라도 이것이 고구려계통 집단의 표지임은 분명하다. 탐라의 시조에 고구려계 성씨 혹은 취한 시조가 등장하는 사정은 역시 의문으로 남는다. 제주도 <초감제>의 배포도업 가운데 일부분에서도 이런 표지가 등장한다.

 

우리나라 고구려 신() 베포도업 제이르자. 왕이 나사 국입고, 국이 나 왕입네다.

<정주병, 천지왕본풀이>

 

한반도 남쪽의 섬에서 배포도업을 치는 내용(치국잡기)에 고구려가 강조되는 사실은 고구려계통의 제주 입도 집단과 특별한 관련을 지닌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 가지 측면에서 고대 탐라에는 1세기경에 고구려계 집단이 입도하여 묘제와 철기를 남겼고, 그런 사정이 있어 원거리의 고구려와 지속적인 교역과 조공무역을 강행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일단 고구려계 출자 세력이 제주에 입도한 점은 인정될 수 있다고 생각되며, 특별한 사정이 있어 <초감제>의 한 부분으로 전승된다고 본다. 그 특별한 사정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이런 사실만으로 그 집단이 탐라 시조 전승에 등장하는 시조들 가운데 하나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탐라 시조 전승이 제주 본래의 당본풀이에서 확대되어 형성된 것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며, 고구려계 집단의 신화가 어디에도 탐라 시조 전승에 반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 지역에서 전승하던 <괴내깃도서사시>가 탐라국 전체의 <문곡성서사시>로 확대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한 추정이다. 그렇다면 탐라국의 가장 유력한 지배자는 구좌면 쪽에서 일어났을 수 있다. 다른 통치자들 둘과 연합하고 그 내력을 서사시 자체를 개작해서 밝힌 <삼성서사시>를 만들어내고서, 시조들이 땅 속에서 솟아났다는 자리를 옮겨 한 곳으로 모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괴내깃도서사시>의 확대판이 <삼성서사시>였을 수 있다. 그러다가 탐라국이 망하자 <삼성서사시>는 서사시로 구전되지 못하고 서두 부분만 문헌에 기록된 신화로 남아 있기만 한다 조동일, ????동아시아 구비서사시의 양상과 변천????, 문학과지성사, 1997, 89..

 

조동일이 <괴내깃당본풀이>의 확대판이 <삼성서사시>일 것이라고 추정한 것은, 신화의 구조와 등장 주체의 기능의 측면에서 볼 때 타당하다. 그렇다면, 탐라기년과 담수계, 그리고 담수지의 기록은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이다.

고을나를 고구려계 집단으로 인정하고 그에 관한 여러 가지 근거들이 대단히 정합적으로 일치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신화의 본래 내용과 관련지어 볼 때 해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엄연히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제주에 입도한 고구려계 집단이 고을나로 이해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근거들이 갖추어졌다고 하더라도, 삼을나 가운데 가장 우위에 있었던 고을나 집단의 신화가 땅에서 솟아나는 형태의 신화로 이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고구려계통의 신화가 널리 전승되어 자랑스런 자기네 역사를 노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겠는데, 이런 사정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따라서 고구려 입도 집단의 유물과 시기 등이 너무도 일치하는 점에서 오히려 이면에 감추어진, 현전 <삼성신화>의 재편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살펴 본 몇 가지 사항들로 볼 때, 고구려계 출자 집단의 제주 입도는 사실로 인정된다. 그러나 그 집단이 곧 현전 <삼성신화>의 가장 우월한 세력이라고 전승되는 고을나 집단이라고 단언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제주도 당본풀이에서 <삼성서사시>로 확대되어 제주의 자랑스런 역사를 노래하는 내용과 연관지어 볼 때, 고구려계 집단의 제주 입도 사실과 현전 <삼성신화>가 특별한 이유에 의해 후대에 결합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잠정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삼을나 시조 전승의 고을나가 고구려계 집단이라면 해모수 신화나 해부루 신화와 같은 자기네 신화를 마다하고 제주 특유의 신화를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은 성립하기 어려운 가설이다. 성씨와 유물, 시기가 일치하는 집단이 있다고 인정되더라도 이를 삼을나 시조 전승에 곧바로 연결할 만한 근거는 찾기 어렵다. 여기에서 세 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고구려계 출자 집단의 제주 입도, 이 집단이 곧 탐라의 시조 가운데 하나인가 하는 점 현전 <삼성신화>의 고을나가 고구려계라면 삼성신화의 구조와 내용에 고구려계 신화적 성격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은 점이 그것이다. 은 분명한 사실이고, 은 앞서 고찰한 결과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는 분명하게 단언하기 어려우나 이 분명한 사실로 인정되기에 의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희박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을나라고 하는 부여·고구려계 칭호가 결부되어 있고 아울러 고구려의 왕성 혹은 표지로 인정되는 고씨가 결부되어 있는 점과 탐라기년의 부기 내용이 존재하므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로 제기된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가장 분명한 사실인 을 기지수(旣知數)로 하여 사실 가능성이 있는 을 거쳐 분명하지 않은 미지수(未知數)로 순서를 잡는 것이 합리적인 접근 태도라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전제하면 현전 <삼성신화>의 형성이 제주 본래의 <삼성서사시>가 어떤 사정이 있어서 재편된 결과일 것이라는 관점을 마련할 수 있다. 여러 층위의 건국신화를 형성과 재편으로 이해한 것은 조현설, 건국신화의 형성과 재편에 관한 연구, 동국대 박사논문, 1997이다. 이 논문의 관점을 가져와서 현전 三乙那 시조 전승에 접근한다.

 

지금까지 문헌으로 남아있는 제주의 삼을나 시조 전승은 본래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본래의 것이 아닐 것이라고 하는 것은 고··부와 같은 성씨와 을나라고 하는 명칭을 지칭하는 것이고 신화의 내용은 제주 본래의 것으로 인정된다. 역사적으로 탐라가 고려에 탐라군으로 복속된 시기가 1105년이니 문헌기록에서 삼을나 출현시기라고 전하는 한 명제 영평 8년과는 시간적 거리가 상당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을나 시조 전승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고려사지리지에 수록되었으니 1454년이 된다. 이후 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 1653년의 이원진의 탐라지, 1702년의 이형상의 남환박물지고조(誌古條) 등이 뒤를 잇는다 할 것이다.

조동일은 현전 <삼성신화><괴내깃당본플이>가 확대되어 <삼성서사시>로 전승되다가 전승이 중단되고 그 서두만 문헌에 기록으로 남아 지금까지 전한다고 했는데, 이는 현전 <삼성신화>가 후대에 와서 재편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제주의 당본풀이를 보면, 삼을나 전승이 제주 본래의 신화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양을나라는 성씨가 어디서 온 것인지 알기 어려운 것임에 반해 고을나의 성을 고라 하여 고구려계 출자 세력이라는 표지로 읽힐 가능성이 있다. 부을나는 ????삼국유사???? 남부여전에 백제왕의 성이 부씨이므로 이렇게 부른다(百濟王姓扶氏故稱之)”라는 기록이 있어 부여족의 근원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을나와 같은 부여·고구려계 칭호를 탐라 시조의 칭호로 결합시킴으로써 이런 가능성을 더욱 높여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을나가 제주 고유의 칭호라 하기 어렵고 부여·고구려계통의 것이 인정된다면, 이는 현전 <삼성신화>가 특별히 고구려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재편된 결과로 풀이된다. 본래의 <삼성서사시> 혹은 <삼성신화>에는 고대 탐라에 선주 토착의 세 시조가 세력을 형성하여 서로 연합하는 과정에서 탐라의 역사를 열었다고 하는 사실이 자랑스럽게 전승되었다고 보는데, 어느 시기에 와서 특별한 이유에 의해 현전 <삼성신화>와 같은 재편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신화의 내용이 고씨 성이나 을나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어서 신화의 본래적 형태에 특별한 표지를 결부시켜 제주 본래의 신화에 고구려계 출자 집단이 주도적 세력임을 드러내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전 <삼성신화>가 재편의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선 고대 탐라 관계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고대 탐라에 고구려계 출자 세력이 입도한 것만은 인정된다고 생각하는데, <삼성신화>의 재편은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판단된다. 탐라가 고려에 의해 탐라군으로 복속된 이후 멀리 떨어진 남단의 섬에 독자적으로 형성되어 널리 전승되던 탐라의 시조 전승인 <삼성서사시>가 더 이상 존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정에 관해서는 조동일, 앞의 책, 134-138면에서 논의했다. . 그러나 탐라는 지리적으로 본토와 격리되어 있고, 각 마을마다 당신(堂神)이 있고 당본풀이가 있어서 탐라 고유의 정체성을 특별하게 지속시키고 있었으므로, 본토에서와 같이 탐라의 시조 전승을 억누르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탐라의 시조 전승을 유지시키면서 중앙 정부의 지배체제 아래에 탐라를 포용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편은 <삼성서사시>의 재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동일의 주장대로 탐라의 역사를 연 주도 세력은 구좌면 쪽에서 일어나 이런 내력이 <삼성서사시>에 널리 자랑스럽게 불리어졌겠는데, 중앙 정부의 입장에서 이런 사실을 수용하기에는 통치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정이다.

고구려계 출자 집단의 탐라 입도는 역사적으로 사실로 인정되기에 이를 <삼성서사시>에 끌어와 고구려계 출자 집단인 고을나가 탐라 개국의 주도 세력이라고 하는 형태로 재편했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여서 이전의 역사적 사실을 이렇게 부회하여 <삼성서사시>를 재편하면, 탐라의 개국 역시 고려의 건국 정신과 이어지게 되어 탐라 본래의 시조 전승은 유지시키면서 한편으로 고려의 지배 이념에 순응할 수 있는 신화를 어렵지 않게 마련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려사의 곳곳에서 확인되는 동명왕에 대한 관련 기록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분명히 한다.

 

고려 태조가 고구려의 땅에서 일어나 신라에 항복받고 후백제를 멸하여 개경에 도읍하고 삼한의 땅을 통일하게 되었다. (高麗太祖興高句麗之地 降羅滅濟 定都開京 三韓之地 歸于一統 ????高麗史???? 56 10)

 

우리 태조께서는 즉위한 후에 아직 김부가 복종하지 않고 견훤이 포로가 되기 전인데도 자주 서도에 행차하여 친히 북방의 변지를 순수하였다. 그 뜻이 또한 동명의 옛 땅을 내 집에서 쓰던 청전같이 생각하고 반드시 석권하여 이를 차지하려 하였으니 (我太祖卽位之後 金傅未賓 甄萱未虜 而屢幸西都 親巡北鄙 其意亦以東明舊壤爲吾家靑氈 必席卷而有之 ????高麗史???? 2 世家 太祖 2)

 

정해에 평양의 목멱 교연 도지암 동명왕 등 신에게 훈호를 가증하였다. (丁亥 加平壤 木覓 橋淵 道知岩 東明王等神勳號 ????高麗史???? 4 世家 顯宗 1)

 

술신에 혜성이 대미성의 좌액문에 나타났다. 왕이 서경에 이르러 성용전에 배알하고 사람을 분견하여 평양군사와 동명왕 및 목멱묘에 제하였다. (戌申 彗星見于大微左掖門 王至西京 謁聖容殿 分遣人 祭平壤君祠 東明王及木覓廟 ????高麗史???? 30 世家 忠烈王 3)

 

을유에 동지추밀원사 허경을 보내어 평양의 목멱 동명신사에 제하게 하고 (乙酉 遣同知樞密院事許慶 祭平壤木覓東明神祠 ????高麗史???? 13 世家 睿宗 2)

 

팔월 갑신에 사신을 보내어 동명성제사에 제사하고 의폐를 드렸다. (八月甲申 遣使 祭東明聖帝祠 獻衣幣 ????高麗史???? 17 5)

 

고려의 왕이 친히 혹은 사람을 보내 동명왕묘에 제사한 기록이 곳곳에 있는데 이는 고려 태조가 건국 초기에 이미 고구려 동명왕의 옛 터전을 차지하여 그 뒤를 이으려는 의지를 드러낼 정도로 고려의 고구려 계승 의식은 특별한 것이었다. 고구려의 동명왕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것은 고려의 정통성을 고구려에서 찾았다는 의미이고 따라서 고려에서는 동명왕 신화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널리 전승되었다고 인정할 수 있다. 고려의 백성이면 누구나 동명왕의 후예라는 인식을 통해 새로운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했다고 할 것이다. 탐라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탐라의 백성도 고구려 동명왕의 후손이라는 인식을, <삼성서사시>의 재편을 통해 공식화함으로써 지배층의 의도를 드러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고전문학회 정례 학술발표회에서 지정 토론자로 나선 경기대학교의 김헌선 교수가, 현전 <삼성신화>가 지배층의 특별한 의도에 의해 생성되었을 것이라는 지적을 했다. 이런 사정을 검토해야 제주의 시조 전승이 온당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하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런데 고려 건국신화에서 우선 주목할 것은 선조들만 신화의 주인공으로 삼았을 따름이지, 왕건 자신은 등장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견훤이나 궁예를 전면에 내세웠던 경우와는 아주 딴판이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1(3), 지식산업사, 1994, 291.”이라고 한 조동일의 이런 지적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왕건은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데에 궁예나 견훤이 견인한 고대신화를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았다. 이미 그 시대는 고대가 아니고 중세 전기였기 때문에 고대의 신화를 건국시조에게 옮겨 놓는 것은 시대상황에 역행하는 착오적 발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선조의 행적을 신화적인 상징을 통해서 돋보이게 하는 것도 오랜 연원을 말하기에는 합당하지 않아 고구려의 고토에서 발흥한 자신이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고구려 동명왕묘에 제사하는 전통을 세우고, 그 과정에서 동명왕 신화를 그대로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랜 연원을 가진 고구려의 동명신화를 가져와 국가의 오랜 내력을 드러내고, 가까이는 선조들의 신이한 행적을 통해 그런 사정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 고려라고 하는 나라가 세워질 수밖에 없었다는 당위성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동명왕묘 혹은 동명신사에 왕이 친사하거나 신하를 시켜 제사하게 한 사실을 통해 볼 때, 고려에 동명왕 전승이 공식화될 수 있는 여건이 어느 정도는 마련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작제건설화>에서 작제건이 왕자의 아들로 태어나 장성한 후에 그 부왕을 찾아 활과 화살을 가지고 당나라로 떠난다는 내용의 심부담(尋父譚)이 고구려 유리왕 전승과 일치하는 점이 있어 고구려계 신화의 수용 양상을 짐작케 한다 張德順, ????韓國說話文學硏究????, 박이정, 1995, 59-60면 참고.. 장덕순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작제건은 동명왕설화에 나오는 유리의 경우와 비슷하다. 주몽이 남분할 때에 복중에 있는 아이를 위해 신물을 남기고 간 것이나, 후일 유리가 어머니에게서 아버지가 비상인(非常人)이라는 말을 듣고 부의 신물인 단검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나섰다는 대목이 있다. 작제건도 그 아비가 누구인지 몰랐다가 어머니에게서 당부(唐父)라는 말을 듣고, 아버지의 신물인 弓矢를 가지고 아버지를 찾아 당나라로 향했다는 것은 부분적이나마 연관성이 깊다. 뿐만 아니라, 작제건이 백발백중의 신궁(神弓)이었다는 것은 주몽의 선사(善射)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다. 선사의 영웅을 만들려 할 때에, 고구려의 건국영웅이 그 의식 세계에 작용하였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더욱 고구려의 계승을 자부하는 고려국조신화에 있어서는 극히 당연한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각주 186)과 같음. 그 다음에 이런 지적을 하여 신라의 영웅인 거타지 설화가 필요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유리가 아버지를 찾아서 그 나라를 계승하는 것과 같은 경로로 작제건의 설화를 이끌어 나가다가는 계획된 의도에서 탈선하게 되겠기에, 이 설화는 또 다른 줄거리와 접목할 운명에 있는 것이다. 만일 작제건이 渡唐하여 父王을 찾았다면, 고려 건국과는 관계가 없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입당 도중 풍랑을 만나는 것을 계기로 작제건은 악마 퇴치의 영웅으로 화하는 것이다. 이제 작제건을 영웅으로 만들어야 하고, 국모가 될 그의 아내를 용녀로 하기 위해 신라의 영웅 설화인 居陀知說話가 필요했던 것이다.” 용녀의 측면에서 본다면 신라의 閼英에 비길 수 있다. 그런데 모계가 수신계임을 더욱 명확히 드러내는 것은 高句麗 朱蒙母親柳花와 용녀가 상통한다 할 수 있다.(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6 고려편, 1975, 470면 참고.) .

 

한편으로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를 모신 사당으로 동신사(東神祠)가 있어서 왕실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숭산신(崧山神)과 같은 격식으로 제사했다는 기록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전한다. 고려도경이나 송사(宋史)등 중국문헌이 전하는 바를 참고하면, 고려의 팔관회(八關會)가 고구려 수신제(隧神祭)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도 이해된다.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6 고려편, 1975, 470면 참고.

탐라가 고려에 완전히 복속된 1105년을 기점으로 한 어느 시기에 탐라의 본래적인 시조 전승이었던 <삼성서사시>가 공식적으로 전승될 수 없어서, 고려 지배층의 특별한 의도에 따라 고구려계 출자 집단이 탐라의 세 시조 가운데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는 방식으로 재편되었다고 보면, 고씨라고 하는 고구려계통의 성씨와 을나라는 고구려계통의 호칭이 시조 전승에 등장하면서도 시조 전승의 내용과 어긋나는 양상을 해명할 수 있는 관점이 마련될 수 있다. 고려 건국주의 선조가 곧 탐라의 시조 가운데 하나였다고 하는 식으로 재편하기는 시기적으로 불가능하였기에 고구려쪽의 것을 가져와 탐라 시조 전승과 결부시켰음을 알 수 있는데 그 과정은 기록에 근거하여 추론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탐라에 고구려계 집단이 입도한 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세력이 창세서사시를 전승하면서, 완전하지는 않지만 고대서사시로의 변천을 모색할 수준까지는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세력이 당본풀이에서 확대된 탐라의 본래적인 시조 전승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 세력의 입도시기를 기원후 1세기경으로 추정한 결과를 이으면, 탐라의 고려 복속까지는 10세기의 시간적 경과가 있다. 그 동안 탐라의 본래적인 시조 전승은 서사시의 형태로 지속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현전하는 <삼성신화>에 이르기까지 신화의 구조와 내용에는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고려사세가편의 기록들을 일람하면, 고려에 조공한 탐라 성주의 관련 기사가 빈번하게 확인된다. 최초의 조공 기사는 태조 21(938)에 탐라국 태자 말노(末老)가 내조(來朝)하니 성주(星主)와 왕자의 작위를 주었다고 하는 것이다. 冬十二月 耽羅國 太子末老來朝賜星主王子爵 ????高麗史???? 世家 第 2 太祖 21. 탐라가 계속해서 고려 조정에 조공한 기록이 이어지고, 고려 숙종 10년 곧 1105년에 탐라가 탐라군으로 개칭되어 고려의 한 군으로 편입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938년의 조공 기사에서 탐라국이라는 국호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탐라는 고려에 복속되기 이전에 어떤 형태로든지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고려 조정에 인정되었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는데, 1105년에 국가가 아닌 고려의 일개 군으로 편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고대 탐라의 시조 전승은 건국서사시로서의 성격을 갖추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탐라에서 고려의 조정에 와서 조공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직위와 더불어 여러 이름이 등장하는데 아래와 같다.

 

耽羅國 太子 末老(938)

耽羅國 振尉校尉 夫乙仍(1049)

耽羅國 王子 殊雲那와 그 아들 古物(1052)

耽羅國 首領 高漢(1055)

耽羅星主 高逸(1062)

耽羅星主 懿仁(1092)

乇羅人 高物(1095)

乇羅星主(1096)

乇羅 新星主 陪戎副尉 具代(1101)

 

탐라가 고려의 일개 군으로 편입되기 이전에는 탐라국으로 인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태조 21년에 탐라에서 자발적으로 고려 왕실에 조공하여 작위를 받은 것은 본토를 통일한 새 왕조와의 관계 개선을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태자 말로의 아버지인 왕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으나 부을잉(夫乙仍)의 부씨계와 고한(高漢고일(高逸) 등의 고씨계, 그 외의 다른 계통이 있어 탐라의 성주(星主), 수령으로 등장하므로 탐라의 고려 복속 이전의 국가 형태는 특정 집단의 왕위 혹은 성주 세습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전 <삼성신화>가 세 집단의 연합으로 탐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전하므로 이럴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탐라 성주의 이름에서 부을잉의 부씨계, 고한-수운나-고물의 고씨계, 고일 및 고물의 고씨계와 의인, 구대 등 성씨를 알기 어려운 세력이 등장하므로 부을잉을 부씨계로 보는 것은 부씨를 온전한 성씨의 하나로 인정한다는 판단은 유보하고 부을나에서와 같은 계열이어서 이렇게 이름한다. 삼성신화 재편 이전에 이미 고씨계와 부씨계, 그리고 다른 한 세력(양을나라고 할 수 있는)이 연합하여 탐라의 역사를 열었고, 따라서 탐라 성주의 지위를 어느 한 쪽이 세습하는 양상은 아니었다고 하는 점이, 위의 인명에서 볼 때, 추정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탐라 성주 고한과 왕자 수운나, 그리고 손자인 고물의 3대에서 각각 일정한 성씨를 취하지 않고 있는 점이 확인된다. 말로 및 의인이나 구대 등도 일정한 성씨를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점이 인정되면 당시 탐라에서는 성씨 개념이 확립되지 않아서 이름에 가까운 한자를 차자표기한 것이 고려사의 인명으로 나타났다고 이해할 수 있다. 1052년 탐라 성주 고한의 손자 고물과 1095년의 탐라인 고물이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는데, 성씨가 고()와 고()로 통용되고 있어 우리말의 음에 가까운 한자를 편의적으로 취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고려에서는 고씨(高氏)가 하나의 성씨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탐라의 고한이나 고물, 고일 등의 이름을 표기하는 데에 있어 고()를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앞서 고찰하고 추론한 것처럼, 1세기경에 탐라에 입도한 세력이 곧 고한, 고일, 고물 등과 이어진다고 단언할 수 없다.

앞서 고찰하고 추론한 결과에서, 본래의 탐라 삼성서사시에는 고구려계 입도 집단이 별다른 관련을 갖지 못하다가 재편의 과정에서 견인되었다고 추정했다. 고려 복속 이전에 고려로부터 탐라국으로 인정되었던 탐라에 건국과 관련한 서사시나 신화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정이라 할 수 있다. 탐라가 하나의 나라로 고려 조정에 의해 인정되다가 1105년에 탐라군으로 편입되면서 탐라국의 건국신화(서사시)가 일개 군의 시조 신화(서사시)로 재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경수도 이런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서기 1105년 탐라국이 고려의 탐라군으로 복속된 이후에, 탐라국이란 용어나 개념이 금기시되었을 것은 당연하다. 이후 조선시대를 경유하면서도 탐라국의 분리 독립을 종용할 수 있는 분위기는 엄격히 통제되었을 것이고, 이 신화를 대하는 입장에 있어서도 을나를 내세우기 보다는 삼성을 내세우는 전략, 즉 정치사회적인 측면의 내용보다는 집안과 성씨중심사상의 내용으로 축소되도록 하였다고 생각된다. 전경수, 乙那神話文化傳統脫傳統, ????耽羅文化???? 14, 1994, 123.

 

삼성(三姓)을 내세우는 전략은 곧 건국신화를 성씨시조신화로 재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전 <삼성신화>, 당시의 탐라에 엄격히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성씨가 구체화되어 고··부의 삼성으로 확정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으로 풀이된다.

건국신화가 성씨시조신화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고려의 지배층은 탐라국의 세 지배 세력 가운데,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는 고려의 건국 정신을 함께 드러내기 위하여 고구려계 성씨인 고씨(高氏)와 유사한 음을 지닌 한 세력(고한·고일·고물 등)을 고씨로 확정하고, 성씨인지 분명하지 않은 부을잉과 같은 성주의 이름에서 부씨를 확정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결과적으로 탐라국의 건국신화(서사시)는 성씨시조신화로 격하될 수 있고, 아울러 탐라의 지배 세력들 가운데 고구려의 계통을 잇는 고씨를 성씨로 확정함으로써 고려와 탐라가 하나의 근원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논리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역사적으로 이른 시기(1세기경)에 고구려계 출자 집단이 탐라에 입도한 사실을 함께 고려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려사???? 지리지 탐라현조에 고후·고청 형제가 15대손이라 한 것은 이때에 이미 1세기 경에 제주에 입도했다고 추정되는 고구려계 집단을, 탐라 시조의 하나로 견인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생각된다. 당시 탐라에는 성씨가 분명하지 않았던 고한·고일·고물 등의 세력을 고구려계 성씨인 로 확정하려 한 것과 아울러 탐라 건국신화를 재편하면서 탐라 성씨 시조 가운데 당시의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던 고한 등을 고구려 입도 세력의 후예라고 하는 논리를 마련하려 했다고 판단된다. .

 

원래의 탐라국 시조 전승인 <삼성서사시>에서 그 서두만 남아 현전 <삼성신화>와 같은 짧은 형태의 신화로 재편되어, 성씨가 등장하고 시조의 호칭이 을나로 나타나고 출현시기가 영평 8년으로 고정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乙那에 관해서는 앞서 이 호칭이 부여·고구려계통일 뿐 아니라 ????高麗史???? 세가편의 곳곳에서 당시에 고려에 조공하던 여진족의 추장 이름에 乙那 및 동일 게통의 호칭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탐라의 시조가 고구려와 연결되면서 동시에 탐라가 지리적으로 본토와 떨어져 있으나 고려에 복속되어 조공하는 신하의 지위를 신화를 통해 확정하고자 연진족 추장 이름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乙那를 사용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여진족은 만주족이고, 한국어와 만주어는 같은 알타이어계통에 속하므로, 부여·고구려어와 만주어 사이에는 친연성이 있다고할 수 있다. ????高麗史???? 世家 卷 4 인종 98월조 기사에 女眞의 추장 이름에 徐乙那가 보인다. 그외에 女眞酋長에 해당하는 자의 이름에 要乙乃, 閼那 따위가 등장한다. . 재편된 <삼성신화>450년이 지나는 동안 탐라의 시조 전승으로 자리 잡아 1454년에 이르러 ????고려사???? 지리지에 그 내용이 기록되었다고 생각한다. 문헌 기록에 삼을나의 출현 시기를 후한 명제 영평 팔년으로 부기될 수 있게 한 것은 재편의 과정에서 탐라와 고구려계 집단과의 관련성이 고려된 결과를 시기적으로 확정한 결과로 판단되며, 조선에 와서도 문헌 기록을 중시하는 유학자들의 사고에 이런 사정이 계속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현전 <삼성신화>의 문헌 기록과 전승, 그리고 성씨와 유물에 집착하게 되면 누구나 탐라의 개국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쪽은 탐라 토착 세력이 아니라 본토에서 입도한 세력이라고 하는 결과에 이르게 되고, 이는 다시 탐라의 주도 세력과 삼을나 시조 전승의 내용 사이에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단층을 설명하기 어렵게 된다. 제주 본래의 <삼성서사시>가 특별한 이유에 의해 현전 <삼성신화>로 재편된 이후의 기록을 좇아가면 일관성 있는 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으나 탐라 시조 전승의 본질을 해명할 수는 없다.

김석익의 탐라기년의 탄강형 <삼성신화>는 탐라국 본래의 건국 시조 전승인 <삼성서사시> 재편의 결과가 후대에 이어진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본래 탐라국의 시조 전승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고구려계 입도 집단을 <삼성서사시>에 견인하여 재편한 결과, ··부라 하는 성씨 시조가 등장하는 현전<삼성신화>가 형성될 수 있었고, 재편의 과정에서 개입한 고구려계 집단과의 관련성을 김석익 스스로가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차원에서 탄강형 시조 전승이 부기되었던 것이다. <삼성신화>의 내용은 제주 본래의 것임을 인정하면서, 재편된 <삼성신화> 이면에 개재해 있는 고구려계 입도 집단의 견인 현상을 하나의 사실로 인정하여, 이를 배제하지 않고 부기한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계 집단이기에 천상강림형의 시조 전승이 있었다고 하는 내용을 우암(尤菴)을 빌어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김석익이 박혁거세의 예를 들어 을나의 의미를 해석한 대목에서, 을나가 제주 본래의 명칭이 아니라 박혁거세 신화와 같이 천상강림형 신화를 전승하는 집단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 측면에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담수계의 기록이나 담수지의 기록은 탐라기년의 것을 옮겨 놓은 것이어서 함께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할 때, 제주도의 <초감제>에서 전승되는 우리나라 고구려 신() 배포도업 제이르자하는 부분은 고구려계 집단을 견인하여 재편된 <삼성신화>가 오랜 동안 지속되어 <초감제> 속에 유입된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천게왕 백제왕 고려왕 신라왕 청고려 백고려 구고려라 하여 고구려와 고려를 유독 강조하고 있는 것도 탐라가 고려에 처음으로 복속되어 탐라군이 된 역사적 내력을 노래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여서 고구려가 아울러 부각되었다고 볼 수 있다.

 

7. 맺음말

제주지역 창세서사시와 탐라의 시조 전승과의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대 탐라에 고구려계 출자 집단이 입도한 것은 사실로 인정될 수 있으나 이 집단은 창세서사시를 가져와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고대서사시로의 변천을 시도했고, 그 양상이 부여·고구려계통의 신화로 인정되는 <제석본풀이>형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둘째, 탐라의 시조 전승은 제주의 당본풀이에서 확대되어 탐라의 역사를 연 시조들의 오랜 내력을 노래하던 것이었는데 현전 <삼성신화>에 그 내용은 그대로 이어졌다.

 

셋째, 현전 <삼성신화>는 탐라 본래의 시조 전승에서 서두만 남아 문헌에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신화의 재편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넷째, 재편의 동인(動因)은 탐라국이 고려의 一個 군으로 편입된 역사적 사실에 있다고 판단되며, 국가의 중앙 통치가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있는 탐라에까지 효과적으로 미치기 위해서는 탐라국의 시조 전승을 재편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별도의 시조 전승을 자랑스럽게 노래하는 전승을 없애기에는 당본풀이를 근간으로 탐라의 특별한 신앙 체계로 인해 불가능했기에 신화의 구조와 내용은 남겨두면서 재편하는방식을 택했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여서 국가의 오랜 내력을 동명왕에게서 찾았고 따라서 탐라의 시조 전승에 이전의 고구려계 출자 집단의 탐라 입도를 견인하여 고씨로 구체화하고 을나라고 하는 부여·고구려계통의 호칭을 결합시켰다고 보며, 이를 통해 고려에 편입된 탐라가 독자적인 신화 구조와 내용을 지니면서도 시조는 고구려계임을 부각시켜 고려와 탐라는 하나의 근원에서 시작했다고 하는 점을 공식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사정이 있어 제주의 <초감제>에 고구려와 고려가 유독 강조되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판단된다.

 

여섯째, 신화가 이런 방식으로 재편됨으로써 탐라국의 건국신화(서사시)는 탐라군의 성씨시조신화(서사시)로 격하되었다고 생각한다.

 

일곱째, 김석익의 탐라기년이나 담수지의 기록은 신화 재편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신화의 구조와 내용은 제주 본래의 것인데, 재편되어 전하던 <삼성신화>의 전승에 탐라의 시조 가운데 고구려계통의 시조가 결합되어 있는 점을 사실로 받아들여 그쪽의 신화인 탄강형 신화를 삼을나 시조 전승의 하나로 부기하기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신화의 재편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면, 창세서사시에서 탐라 본래의 시조 전승을 거쳐 현전하는 <삼성신화>에 이르기까지 발생하는 여러 가지 의문을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특히 현전 <삼성신화>에서 발생하는 토착적 요소와 외래적 요소의 혼란, 곧 고씨와 을나에서 연유한 탄강형 신화와 종지용출형 신화 사이의 급격한 단층을 해명할 수 있다고 판단되며, 신화 재편에 의해 창세서사시 전승 세력이 탐라 시조 전승으로 견인되어 일어난 해석상의 혼란도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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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bitly.kr/7dn8rQ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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