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9 06:44
【박혁거세 어머니 파소여왕의 실체
김부식이 송(宋)에 사신으로 갔다가 우신관(객관)에 걸려있는 여성의 화상(畵像)을 보고 관반학사 왕보로부터 전해들은 내용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와 그녀가 낳은 해동의 첫 왕에 관한 이야기이다. 훗날 김부식은 선도산 성모는 알게 되나 해동의 첫 왕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한다. (#1[삼국사기]기록)
이에 반해 일연은 [삼국유사]를 통해 해동의 첫 왕이 박혁거세이며, 박혁거세를 낳은 선도산 성모가 파소(婆蘇)라는 사실을 밝힌다. 또한 파소를 중국황실의 딸로 소개한다. 박혁거세 후손가문인 밀양박씨(규정공파)의 족보는 파소를 중국의 전한(前漢) 선제(宣帝-10대)의 딸로 설명한다.
파소는 부여황실의 딸, 섭라국 여왕
[태백일사](저자 이맥)는 파소의 출신을 전혀 다르게 설명한다. 중국황실이 아닌 부여황실의 딸로 소개한다. 특히 파소는 지아비 없이 박혁거세를 잉태하여 주변의 의심을 받자, 눈수(嫩水)로 도망하여 동옥저에 이르고, 또 남쪽으로 내려가 진한6촌과 결합하며 박혁거세가 13세가 되던 서기전57년 신라를 건국한다. 이때 나라이름은 진한(또는 사로)이며, 도읍은 서라벌이다. (#2[태백일사]기록)
참고로 남당필사본 중에 신라 화랑의 기원과 계보를 정리한 [위화진경](저자 미상)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박혁거세의 아버지는 혁서거(奕西居)이다. 천왕(天王) 파소가 천신(天神) 혁서거와 합환하여 대일광명(大日光明-혁거세)를 낳는다. (#3[위화진경]기록)
그런데 [유기추모경](저자 황주량)에 박혁거세의 아버지 혁서거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나온다. 서기전24년(추모왕14년) 섭라국(涉羅國) 여왕 혁거지(奕居知)가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한 기록이다. 특히 기록은 섭라국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섭라국은 환나국(桓那國)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산을 의지하며 큰 물가에 있고 여왕이 세습한다. 또한 여왕은 지혜와 풍체가 빼어난 남자를 폐신(嬖臣)으로 두고, 딸을 낳으면 무녀(巫女)로 삼으며, 그 중 가장 나이어린 여성이 여왕을 계승한다. (#4[유기추모경]기록)
섭라국은 고구려 건국이전에 존재한 북부여 제후국(열국) 중의 하나이다. 지금의 요동반도 남안에 위치한 모계중심의 여왕국이다. 파소는 바로 섭라국 여왕 출신이다. 섭라와 서라(벌)는 어원적으로 맥을 같이한다. 참고로 [유기추모경] 기록의 혁거지여왕은 파소여왕의 뒤를 이은 인물이다. 박혁거세의 아버지 혁서거의 딸로 추정된다.
결론적으로 섭라국이 북부여 제후국인 점을 감안하면 파소는 중국황실이 아닌 (북)부여황실의 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당시 북부여왕은 5대 천제 고두막한이다. 파소는 바로 고두막한의 딸이다. 다만 [삼국유사]가 파소를 중국황실의 딸로 기록한 이유는 삼국통합(*통일)이후 신라사회에 만연한 모화주의의 영향과 관계가 깊다. [삼국유사]는 신라역사를 재정립과정에서 새롭게 정리된 기록을 차용한다.
종합하면, 파소는 북부여 천제 고두막한의 딸로 서기전70년 이전 섭라국 여왕에 봉함을 받고 섭라국을 다스리다 폐신 혁서거와 인연을 맺어 박혁거세를 임신한다. 그리고 어떤 사유가 발생하여 파소는 일부 무리를 이끌고 섭라국을 떠나 함경남도 함흥지역의 동옥저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경기도 북부지역으로 들어온다. 서기전70년 박혁거세를 출산하며 소벌도리가 이끄는 진한6촌과 결합하며 진한왕이 된다. 이어 서기전57년 박혁거세 13세에 공식적으로 신라를 출범시킨다.
신라사회의 정신적 지주 선도산 성모
파소는 신라건국의 모체이자 핵심이다. 특히 신라건국이 박혁거세 나이 13세에 이루어진 점을 감안하면 파소는 실질적으로 진한6촌과의 결합을 주도한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백제시조는 비류와 온조이나 실질적으로 백제건국을 이끈 사람은 어머니 소서노이다. 신라의 파소는 백제의 소서노와 위상이 같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파소의 존재는 역사기록에서 대부분 사라진다. 이유는 신라지배층이 건국(시조)신화를 박혁거세의 ‘난생(卵生)’으로 재구성하면서 의도적으로 지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파소는 신라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남는다. 여산신(女山神) 신앙을 대표하는 ‘선도성 성모(치술성모)’가 바로 파소이다.
박혁거세 어머니 선도산 성모 파소는 부여황실 출신이다.
【참고기록】
#1 [三國史記]<新羅本紀> 敬順王. 詣佑神舘 見一堂設女仙像 舘伴學士王黼曰 此貴國之神 公等知之乎 遂言曰 古有帝室之女 不夫而孕 爲人所疑 乃泛海抵辰韓生子 爲海東始主 帝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臣又見大宋國信使王襄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之句 乃知東神則仙桃山神聖者也 然而不知其子王於何時
#2 [太白逸史]<高句麗國本紀>. 斯盧始王仙桃山聖母之子也 昔有夫餘帝室之女婆蘇不夫而孕 爲人所疑 自嫩水逃至東沃沮又泛舟而南下 抵至辰韓奈乙村 時 有蘇伐都利者聞之往收養於家 而及年十三 岐嶷夙成 有聖德 於是 辰韓六部共尊爲居西干 立都徐羅伐 稱國辰韓 亦曰斯盧
#3 [魏華眞經]. 昔者 仙桃山 元始聖母 波穌天王 頭戴絳色金冠 身被銀色錦神衣內着紫黃綠四十九彩 率大瓢碧海加耶三仙姑乘彩雲 而下降 于仙桃山 千年老桃 梪王之宮 以爲六部之神 天神 乃率雷火風三神而下降 與聖母合歡 而娠大日光明 天神 是爲奕西居 於是 眞花發於吾土仙骨大昌
#4 [芻牟鏡]. 東明十四年丁酉 九月 涉羅女主奕居知遣使入貢 涉羅在於桓那之東南 依山傍海世襲女主 山多野少民以魚獵為生 冡冢居岩伏 好歌舞鬼神 囯之俊秀者為女主之嬖臣 生女為巫 其最少者継之其俗淳實不草[華] 能為其主而盡忠 上賜奕居知綾緞 命親自入朝
글. 박찬우/horizon1011@hanmail.net/2019.08.27. 게시
】-출처: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3826
【섭라(涉羅)는 흑룡강성 치치하얼에 있었나?
청나라 말기 도기 선생이 편찬한 『흑룡강여도설』에 섭라국이 흑룡강 치치하얼에 있다가 백제에 합병되었다는 기록을 발견하였다.
黑龙江舆图说(흑룡강여도설) (清)屠寄(도기) 撰(찬)
●齐齐哈尔城图说(치치하얼성 도설)
齐齐哈尔城周秦汉濊貊之地后汉三国魏属夫余国北境晋寇漫汗国后魏北齐豆莫娄国地西南本属涉罗国始光中涉罗为百济所并当属百济国寻属勿吉隋靺鞨黑水部唐黑水靺鞨地嫩江以西属室韦五代辽属乌隈于厥部嫩江以西属长春州北境金上京路肇州北境蒲与路西南境其西属泰州元初乃颜大王分地至元中属浦峪路屯田万户府明置拜苦衞又於境内错置可吉河纳穆河阮里河牙鲁阿伦葛称哥古鲁兀刺忽兀讨温诸衞及兀讨温所国初达呼尔锡伯卦勒察诸部弋猎游牧之地康熙二十三年设火器营参领暂守三十年赏打牲总管副都统衔暂守旋额设城守尉三十七年裁城守尉移墨尔根副都统来镇三十八年黑龙江将军亦自墨尔根来镇守
치치하얼성: 주․진․한 시대에는 예맥의 땅이었다. 후한 삼국 위나라 때에는 부여국 북쪽 지경에 속했다. 진나라 때에는 구만칸국에, 후위․북제 때에는 두막루국 땅인데, 서남은 본래 섭라국에 속했다. 시광(始光: 424年正月-428年正月, 北魏 太武帝 拓跋 연호)중에 섭라는 백제에 병합되었으니 당연히 백제국에 속했다. 이윽고 물길에 속했다. 수나라 때에는 말갈 흑수부, 당나라 때에는 흑수말갈 땅이었는데, 눈강 서쪽은 실위에 속했다. 5대․요나라 때에는 오외우궐부에 속했는데, 눈강 서쪽은 장춘주 북쪽 지경에 속했다. 금나라 때에는 상경로 조주 북쪽 지경과 포여로 서남 지경이다. 그 서쪽은 태주에 속했다. 원나라 초에는 내안대왕 분봉지였다. 지원(至元 : 1264年~1294年, 세조 홀필열 연호) 중에 포욕로 둔전만호부에 속했다. 명나라 때에 배고위를 설치하였다. 그 경내에 가길하 납목하 완리하 아로 가윤 갈칭가 고로 올라홀 토온저위와 올토온소를 두었다. 국(청나라)초에는 달호이 석백 괘륵찰 제부의 사냥 유목하는 땅이었다. 강희 23년, 화기영참령에 잠깐 속하여 지켜졌다. 30년, 상으로 타생총관 부도통위를 잠깐 두어 지키다가 성수위에 속했다. 37년 재가에 따라 성수위는 묵이근으로 옮겨가고 부도통이 와서 지켰다. 38년, 흑룡강 장군이 또한 묵이근에서 와서 진수하였다.
위의 『흑룡강여도설』은 어느 개인이 편찬한 것이 아니라 청 정부차원에서 당대의 역사가, 지리가인 도기선생을 총책임자로 하여 편찬된 공식 지리서이다. 따라서 그 권위는 개인이 쓴 것과 신뢰도에서 차이가 있으므로 대단히 믿을만하다고 하겠다. 당대의 사학자 지리가인 도기 선생이 5년간 현지에 머물면서 주도하여 편찬한 흑룡강여도설에서 섭라국이 흑룡강 서북부 치치하얼 일대에 있다가 백제에 병합되었다는 기록은 충격적인 것이므로 요서 백제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어려운 문제를 던져준다.
백제 멸망후 “그 땅이 신라와 발해말갈에 편입되고, 백성들 일부가 돌궐과 말갈로 망명하였다”는 종래의 사서(태평환우기, 통고)의 기록과도 부합이 된다. 이 부분은 상당히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흠정만주원류고에도 위서 고려전이 인용되어 있는데, 섭라는 백제에 합병되었다고 기록이 일치한다.
아래는 내가 번역한 흠정만주원류고(권3 백제)에 나오는 위서 고구려전 섭라국 관련기록이다.
魏書髙麗傳 髙麗王釗 烈帝時 與慕容氏相攻 建國 四年慕容元真伐之 釗單騎奔竄 後為百濟所殺 (按 烈帝為道武帝之伯祖 隋書以昭列帝 三字相連 為髙麗王之名 殊誤)涉羅國 為百濟所併
「위서魏書」고구려전에는 “고구려왕 쇠釗[고국원왕]가 열제烈帝때에 모용씨와 서로 싸웠다. 건국建國 4년[342년] 모용원진[前燕의 慕容皝]이 고구려를 공격하자 쇠釗[고국원왕]는 단기로 도망을 가서 숨었는데 뒤에 백제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살피건대 열제는 도무제의 큰 할아버지인데 수서에서는 소열제 세자가 서로 붙어있어서 고구려왕의 이름처럼 되어 있으나 이것은 틀린 것이다.) 섭라국涉羅國이 백제에 병합되었다.
아래는 도기선생의 간단한 약력이다.
※ 屠寄(1856—1921)清末史学家。字敬山,강소성 무진출생. 1888년 장지동 막하에서 광동여도국총찬에 임명되어 광동여지도 제작을 주수(主修)함. 1892년 진사가 되어 한림원 서길사(庶吉士)에 제수됨. 1895년 흠차대신 延茂의 요청에 따라 그를 수행하여 흑룡강에 부임, 같은 해 10월 치치하얼에 도착. 1896년 연무가 북경에 돌아갈 때에 청 정부는 흑룡강방면의 지도제작 등 연구를 위해 도기를 흑룡강여도총찬에 임명하여 흑룡강에 남도록 조치한다. 1990년 흑룡강을 떠날 때까지 흑룡강 6성의 지도, 『흑룡강여도』 『흑룡강도설』 등을 찬수하였다.(백도백과 발췌)
2011.11.12. 게시/작성자 백송
】-출처:http://m.blog.daum.net/surpura/14137430?tp_nil_a=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