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한국어

한알회

가설-박혁거세의 아버지

신라新羅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아버지에 대한 가설

1. 서설

본 글은 박혁거세의 아버지가 고우루의 자손인 고사로高斯盧라는 필자의 추정 하에 쓰여진 글입니다. -이하 생략-

 

2.본설

신라新羅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어머니는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이니 곧 파소婆蘇. 파소는 고두막한高豆莫汗의 딸로서 남편이 없이 임신한 여인이다. 그런 파소는 몰래 진한辰韓 나을촌那乙村으로 도망을 가서 박혁거세를 낳았다.

 

부여夫餘 제실帝室의 딸 파소는 왜 결혼을 하지 않고 임신을 하였을까? 또 왜 도망을 쳤을까? 그것도 수 천리 머나먼 길을 혈혈단신으로 도망을 쳤을까?

 

황실皇室의 딸이 혼전 임신을 하고 도망가야 하는 경우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황실의 명예를 크게 더럽힌 경우와, 왕권에 위협적인 아이를 잉태한 경우다.

 

훗날의 일이지만 고구려 평강열제平康烈帝의 딸 평강공주는 가난한 평민의 아들 온달溫達과 결혼을 했고, 훗날 사위는 실력으로 평강열제에게 인정을 받았다.

 

이 경우 혼전 임신이랄 수는 없지만, 평강공주가 생면부지의 바보 온달溫達과의 결혼을 고집하자, 황제가 공주를 쫓아 낸 경우의 일이며, 이것은 정권유지에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던 일이었다.

 

이것은 오히려 유력 귀족과의 유대를 강화하고자 평강공주를 유력 가문에 시집보내려 하였는데, 평강 공주의 고집으로 좌절되자, 상대 가문의 체면을 생각해서, 평강 공주를 쫓아낸 형식을 취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파소는 몰래 도망갔다. 고두막한이 황녀皇女를 위해 쫓아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혹시 있을지 모를 위험에 대비하여, 자신과 더불어 복중의 아이를 살리기 위한 가장 확실한 선택이었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고주몽高朱蒙이 동부여의 태자 금와金蛙를 비롯한 귀족들로부터 모진 견제와 냉대 그리고 살해 위협을 끊임없이 당한 일이 있었다.

 

본래 고주몽은 해부루解夫婁의 태자太子 금와金蛙 보다 2살이 위였는데, 동부여 사람들이 동부여東夫餘에 이롭지 못하다 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에 주몽은 어쩔 수 없이 동부여를 탈출하여 북부여로 도망갔다.

 

이 때 고주몽은 동부여 군사들에게 쫓기어 엄리대수에서 거의 죽을 뻔 한 적이 있다. 이 때 고주몽을 죽이려 했던 것은 다름 아닌 두 살 아래로서 경쟁관계였던 금와로 봄이 타당하다. 그 경쟁관계는 훗날 금와의 아들 제3대 동부여왕 대소帶素의 고구려 침략으로 이어진다.

 

금와가 해부루의 아들이라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대저 해부루는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이 마주 대한 것을 보고 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목격하였다. 왕은 하도 괴이하여 돌을 굴리게 하자, 그 속에 금빛 개구리를 닮은 사내아이가 나오자, 이내 기뻐 소리쳐 외치며 이는 하늘이 나로 하여금 대를 이을 아들을 주었다.”하며 거두어 길러 태자로 삼은 아들이다.

 

이상을 보면 해부루는 압록 변실을 지나던 중, 자신의 조카인 불리지의 아이를 밴 유화를 동부여로 데려와 거둔 이래, 그 이 삼년 후에 다시 곤연에서 금와를 얻었으니, 이는 해부루에게 아들이 없었음을 뜻한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연로한 해부루의 핏줄인 아들이 없었음으로, 고두막한은 해부루의 청을 받아들여 해모수의 종묘사직을 보존하는데 쉬이 동의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해부루의 선택은 비슷한 연배인 고주몽과 금와에게 있어서는 피말리는 왕권 경쟁을 불러왔던 것이다.

 

대저 고주몽은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차남인 고진의 손자인 옥저후沃沮侯 불리지弗離支의 아들이다. 더불어 배달, 조선, 북부여 시대 유력 황후족皇后族이었던 하백河伯의 외손이다.

 

결국 고주몽은 동부여에서 그 혈통과 재능으로 인해 끊임없이 살해 위협에 시달렸고, 드디어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상황에서 동부여군의 추격을 피해 탈출에 성공하여, 단숨에 후북부여後北夫餘의 제7대 단군이 된 인물이다. 모름지기 해부루왕의 입장에서는 고두막한의 의심을 피하여 종묘사직을 보존하여야 함으로, 부여 일대에서 활 잘 쏘는 자를 일러 주몽이라 한다.”고 크게 소문난, 너무나도 탁월한 주몽의 혈통과 재능은 불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 동부여에서의 고주몽의 왕권 경쟁에서의 패배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하겠다. 모름지기 동부여는 제후국이요, 북부여는 황제국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고주몽은 동부여를 탈출함으로써 북부여의 황제가 되었다.

 

각설하고 박혁거세가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점에 있어서는 고주몽과 비슷했다. 그리고 태어나서 받을 수많은 견제와 의심 그리고 살해 위협은 고주몽과 비슷하였다 할 것이다. 그런데 이는 파소의 선택에 의하여 일순간에 해소된다. 이는 어머니 파소가 박혁거세를 임신한 채 북부여 황실皇室을 도망쳤기 때문이다.

 

대저 고주몽이 엄리대수를 건너 살길을 얻고, 파소가 눈수를 도망쳐 살길을 얻은 점은 비슷하다 하겠다. 그리고 고주몽은 엄리대수淹利大水를 건너 북부여北夫餘의 단군檀君이 되었고, 파소는 눈수嫩水를 도망쳐 그 아들이 진왕辰王인 거서간居西干이 되었다.

 

삼신오제본기에는 북부여는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문화가 있어, 어린 생명을 죽이지 않고, 임신한 생명을 죽이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그리고 삼신에게 받은 성, , 을 온전히 태아의 몸에 발현시키는 태교胎敎 문화가 체계적으로 시행되었으니, 이가 바로 북부여 초기 해모수 단군 때 시작된 공양公養 태모지법胎母之法이다.

 

또 살생에도 법이 있는데 위로는 국왕에서 아래로는 서민에게 이르기까지 때와 대상을 가려 한 생명이라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자고로 부여에서는 말이 있어도 타지 않았고, 죽이는 것을 금하여 방생하였다.”하는 것이 바로 그 뜻이다. 고로 잠든 것을 죽이지 않고, 알 낳는 것을 죽이지 않는 것은, 곧 때를 가림이요, 어린 것을 죽이지 않고, 유익한 것을 죽이지 않는 것은, 곧 대상을 가림이니, 생물을 소중히 여김이 지극하다 할 만하다. 삼신오제본기>

 

아무튼 파소는 이런 문화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도망을 쳤다. 왜 그랬을까? 부여에서 어린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전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을 쳤다. 왜 그랬을까?

 

그 의문에 대한 가정으로 먼저 황실의 명예에 누를 끼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와 비슷한 경우로 하백녀河伯女 유화柳花가 있다. 비서갑의 하백 가문은 배달倍達 이래 황후皇后를 가장 많이 배출한 황후족皇后族으로 황실皇室에 버금가는 존귀함이 있었다. 대저 배달의 시조 거발환 환웅의 부인인 바로 웅씨왕녀熊氏王女이며, 단군성조의 어머니 또한 웅씨왕녀다. 그리고 단군 왕검 또한 비서갑 하백녀를 황후로 삼았으니, 비서갑菲西岬이란 배달국 초대 거발환居發桓 환웅桓雄이 봉한 웅녀군熊女君의 나라를 뜻하며, 하백河伯이란 그 나라를 다스리는 대감大監인 왕검王儉의 다른 말이다.

 

그런데 모든 하백의 여식이 황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비 황후皇后로서의 품격을 지녀야 할 하백녀 유화는, 그만 옥저후 고모수와 처음 눈이 맞아 압록강鴨綠江의 변실邊室에서 사통을 하고, 그 날 그만 고주몽을 잉태하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훗날 상제上帝에 천명天命에 의하여 천하天河의 용궁龍宮에 들어가 사해용왕四海龍王이 되는 아버지 하백은 압록 변실 중에 가두었다. 죽이지는 않았지만 가문의 명예를 위해 잠시 가두어 둔 것이다.

 

가문의 명예를 생각해서는 백번 죽여야 하지만, 자신의 사랑하는 딸이자 임신한 생명을 당시의 풍속에 따라 절대 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훗날 유화는 동부여로 가서 고모수와 함께 살며, 불리지 고모수와 처음 만나 사랑의 결실을 맺은 이듬해인 동부여 해부루 8년 임인壬寅 55일에 고주몽을 낳는다.

 

돌이켜보면 하백이 불같이 노하였던 까닭은 당대 새로운 삼한三韓의 주인이 된 고두막한 때문이다. 훗날 고모수의 소생인 소서노와 유화의 소생인 고주몽이 결혼한 것을 보면, 고모수와 유화는 그 나이차가 그리 크지 않았다 할 것임으로, 후북부여의 태자 고모수의 태자비太子妃로 하백의 딸인 유화가 간택되었을 가능성 내지 태자비로 선택될 가능성은 농후했다 하겠다.

 

또는 하백의 딸들 중에 한 명은 태자비로 간택될 가능성은 충분했다 하겠다. 그런 하백의 입장에서 딸의 탈선은 이미 엎지러진 물임으로 가문도 살리고, 딸도 살리고, 사위도 살리려면 하백은 사위를 죽일 듯이 뒤쫓는 척하며 놓아 주고 딸은 유폐시켜는 척하며 살려줘야 했을 것이다.

 

훗날 해부루가 압록 변실 중에 유폐되어 있던 유화를 불리지의 청탁에 의하여 동부여로 데려간 것을 하백이 묵인했던 것은, 표면적으로는 전실 황실의 최고 어른인 해부루解夫婁에 대한 친분 때문이며, 딸을 아끼는 아버지 하백의 너무도 자애로운 마음에 의한 것이다.

 

아무튼 가문의 명예를 크게 훼손했던 유화를 생각해보면 파소婆蘇의 도주는 지나친 감이 있다. 본래 여인의 정숙한 품행이 더욱 요구받는 것은 황족皇族보다는 황후족皇后族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파소가 제실帝室도 예기치 못한 필사의 도주를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의심 때문이다. 그것을 고구려국본기에서는 아비 없이 임신하였음으로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았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깊이 생각해볼 것은 아비 없이 임신하였으면 황실의 망신이요, 나라 망신인데, 역사의 기록에 황실의 망신이란 말 대신 의심을 받았다.”고 표현 하였으니, 이 의심은 바로 역모에 대한 의심이다.

 

이 정권 도전에 대한 의심은, 곧 그 뱃속 아이의 혈통에 대한 의심이다. 파소가 임신한 아이가 만일 평강공자가 임신한 온달의 아들과 같았다면 정권에는 전혀 도전이 되지 못한다. 그 신분이 원래 비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도 파소가 도망갈 이유가 되지 못한다. 파소가 임신한 아이가 개국 공신 또는 유력 가문의 자제라면 적극 혼인시켜 황권을 강화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옛날 평강열제는 원래 유력 귀족의 가문 자제와 결혼 시키려 하였다. 그리고 훗날 고려 태조 왕건의 경우만 하더라도 왕권 강화를 위해 귀부한 신라 경순왕敬順王에게 자신의 딸을 주었다.

 

그렇다면 이 파소가 임신한 아이가 의심 받아야 할 유일한 이유는 적국의 혈통血統이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적국은 어느 나라인가? 그것은 이미 망한 북부여 황실이다. 본래 북부여 제4대 고우루高于婁 단군은 전북부여의 마지막 황제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민이 병을 이루어 급서한 인물이다. 동명국 고두막한이 갑오년甲午年(BCE 87) 10월에 병력을 앞세워 나라를 내 놓으라고 위협하니 그만 그 달에 붕어를 하고 말았다.

 

그런데 고우루 단군은 재위년在位年이 총 34년이니 그 장성한 아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리고 고우루의 전대인 제3대 고해사高奚斯 단군 또한 그 재위년이 49년이었음으로, 고우루 단군의 임종년臨終年 또한 적지 않았을 것임으로, 고우루 단군 34년 갑오에 그 자녀들 또한 그리 어리지 않은 셈이 된다.

 

이 시대는 또한 강적인 도만 위적 그리고 한나라 등과의 전쟁 속에서 황실의 보존을 위해 혼인과 출산이 전대에 비하여 비교적 빨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강력한 적과의 전쟁이 많을 경우에는 동서양의 왕조가 왕이 비명횡사하는 경우를 대비해 반드시 태자를 정하는 일이 많았으니, 고우루 단군 또한 비상시를 위해 태자太子들 두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고우루가 갑자가 죽는 상황에 있어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을 비롯한 국인들은 연륜이 지극한 황제의 동생 해부루를 맞아들여 그 후사로 옹립하였고, 이듬해인 을미乙未(BCE 86)에 해부루는 스스로를 낮추어 왕이라 하고 동부여로 옮겨갔으니, 이 때 만일 고우루의 후손이 있었다면 졸지에 황제는 고사하고 왕은 물론이며 왕권王權이나 황권皇權을 회복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놓쳐 버린 꼴이 된다.

 

이제 전부여 왕실이 항복하고 동부여로 떠나간 이후 그 빈 도성에는 고두막한이 들어왔으니, 그곳은 바로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 혹은 난빈蘭濱이다.

 

이 때에 파소도 전북부여의 도성都城에 들어갔을 것임으로, 이 때 망한 황실의 후예와 파소가 점차 인연을 맺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북부여로서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일이 된다. 훗날 드러나는 일이지만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는 북부여 제6대 단군이 되었지만 아들이 없었다. 삼국사기와는 달리 시집가지 않은 자신의 딸인 소서노를 고주몽와 결혼시켜 제위를 물려주었던 것이다.

 

파소가 임신한 아이가 고우루의 혈통이더라도 굳이 도망갈 필요가 없을 유일한 경우라면, 고두막한의 아들과 손자들이 많아야 한다. 하지만 파소가 도주하였음은 역설적으로 고두막한의 후손 중에 남성男性이 극히 드물었음을 반증한다. 그 결과가 파소의 도주와 고주몽의 단군 계승이다.

 

그럼 파소가 박혁거세를 임신했던 때는 언제였을까?

 

삼국사기에 의하면 혁거세의 즉위 원년은 갑자년(BCE 57)이다. 이 때 혁거세의 나이 13세였으니, 임신했던 때는 신해년(BCE 70) 무렵이다. 이때는 고두막 재제위在帝位 17년이니, 전북부여가 동부여로 밀려난 지 17년째가 된다.

 

그런 점에 있어 파소는 고우루의 아들 보다는 고우루의 손자와 사랑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부여에 망국의 후손을 죽이지 않고, 어느 정도 황실의 가문에 준하여 예우하는 전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제국 부여의 시작은 제3기 단군 조선의 시조인 제44대 구물丘勿 단군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단군 조선은 47대 고열가高列加 단군을 끝으로 막을 내리니 고열가는 제43대 물리勿理 단군의 현손이다. 이 고열가 단군을 결과적으로 몰아낸 것은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解慕漱 단군이니, 해모수는 구물 단군의 후손일 가능성이 큰 인물이다. 고열가 단군 시대에 해모수는 종실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구물 단군의 아들은 제 45대 여루余婁 단군이며, 여루 단군의 아들은 제46대 보을普乙 단군이다.

 

이제 동명국東明國 고두막한高豆莫汗이 해모수의 혈통인 제2대 모수리慕漱離, 3대 고해사高奚斯, 4세 고우루高于婁로 이어지는 북부여의 제위를 빼앗았음으로, 고두막한은 이제 마찬가지로 상대를 죽이지 않고 상대방이 민족을 위해 헌신하며 제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전통에 따라, 라이벌인 해모수의 직계 혈통을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던 것이다.

 

대저 부여夫餘에 책화責禍가 있었으니, 임금은 그 재앙에 대한 책임을 지었다. 그 재앙 중에서 가장 컸던 것은 외적의 침입이었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내외內外의 병란兵亂을 극복하고 종통宗統을 수호한 사람이 보위에 오르게 된 것을 뜻한다.

 

43대 물리 단군 때에 융안隆安의 엽호獵戶 우화충于和沖의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한 백민성 욕살 구물이 그 공으로 제44대 단군이 되었고, 이어 제46대 보을普乙 단군 때에 한개韓介가 이끄는 수유須臾의 무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한 상장군 고열가가 그 공적으로 제47대 단군이 되었으니, 이는 모두가 오로지 공덕과 실력에 의하여 제위에 오른 경우라 하겠다.

 

이와 같이 해모수 단군은 대부여大夫餘 말기의 극심한 분열상을 극복하고 보위에 올랐으며, 또한 고두막은 한무제의 침략을 모두 격퇴한 공덕으로 보위에 올랐으니, 이는 모두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대부여의 역사를 조용히 관조해 보면 이는 어언 400여년 가까이 내려온 부여의 전통인 책화責禍라 할 수 있으니, 이 책화의 전통에 의하면 고우루의 후손이 황실의 버금가는 예우를 받으며 황실의 보호를 받으며 생존했을 가능성은 컸다 하겠다.

 

하지만 책화란 외적의 침략과 국가를 뒤흔들만한 반란에 당하여 탁월한 공덕을 세워야만 황제나 왕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니, 황실의 혈통血統을 이를 사람이 극히 부족하고, 장차 내외의 도전이 예상되는 때에 파소가 고우루의 후손을 임신하였다면, 이는 역심逆心으로 밖에 비춰질 수 없게 된다.

 

더욱이 이 때 고우루의 후손이 특히 고우루의 태자太子 또는 장남長男 그리고 장손長孫이라면 단순히 묵과하기가 어려워지게 된다. 이와 더불어 고우루의 후손이 자신의 세력을 모으려 한다거나, 아니면 동부여와 연결하려 시도했다 발각되었다면, 아무리 자비로운 황제가 보호한다 하더라도 고두막을 따르는 수많은 개국 공신들이 파소와 그 배우자를 그대로 놓아두기 어렵게 된다.

 

이외에도 나중에 파소가 황실에 머물며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권모술수의 재능으로 기회를 엿보아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보위에 오르게 한다면이란 가정은 기득권층인 삼백 오가 열후 귀족이라면 누구나 상상하기 조차 싫은 생각이다. 이는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오가 귀족들에게 견제되었던 이유와 같은 경우라 하겠다.

 

환단고기에는 파소가 도망을 갔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진실을 알고 보면 파소의 아버지인 고두막께서 피신을 시킨 것이다. 고두막은 본래 호방한 준걸이었음으로, 나중에 자신에게 도전한다 할지라도 뱃속 생명을 죽이는 비겁한 짓은 하지 못한다. 또한 그는 용병을 잘하였음으로 도전을 하면 능히 꺾을 자신이 있었음으로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 더구나 사랑하는 자신의 딸을 잔인하게 죽여, 천추만대에 잔인한 군주로 남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고두막한은 자신의 딸을 자신과 태자 고무서를 따르는 신하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딸을 저 멀리 자기를 따르는 신하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피신시켰다.

 

파소의 도주한 길이는 장장 3천리가 넘었으니, 이는 오로지 아버지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파소는 북부여의 수도 졸본卒本에서 육로로 지금의 함경도 일대인 동옥저東沃沮에 이르고, 다시 동옥저에서 배를 타고 지금의 경주慶州 일대인 진한辰韓 나을촌那乙村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의 경주인 서라벌徐羅伐에 도읍을 정한다.

 

그렇다면 파소는 왜 진한으로 도망쳤을까?

 

본래 진한의 뿌리는 북진한이니 지금의 만주 일대다. 이 진한의 주민들이 훗날 남쪽 마한 땅에 정착하였으니 이를 일러 남진한이라 한다. 이 남진한은 지금의 경상도 일대다.

 

이 남진한이 형성된 계기는 북부여 제2대 모수리 단군 정미 원년(BCE 193)에 도적 위만衛滿이 북번한을 강탈하면서 부터다. 이 때 번한番韓의 상장군 탁이 남쪽 마한馬韓 땅에 중마한中馬韓을 세워 스스로 임금이 되고, 변한弁韓, 진한辰韓이 백리의 땅을 봉함 받았으니, 이것이 곧 남변한, 남진한이다.

 

이 남진한은 이 때 북진한 출신 백성들 중심으로 세워진 이래, 고우루 단군 3년 계해(BCE 118)에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의 침략을 받아 북진한의 영토인 해성海城 이북 50리의 땅을 점령당했을 때, 이곳에 사는 진한의 백성들이 남진한으로 대대적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런 까닭으로 이 땅 남진한은 전북부여의 황실에 대한 향수가 강하였을 터이니, 유약했지만 인정 많았던 고우루 단군의 핏줄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 할 것이다.

 

이제 파소는 우리 민족의 철천지 원수였던 한무제漢武帝를 격퇴한 한민족의 불세출의 영웅인 후북부여 단군 고두막의 딸이자, 고우루의 혈통을 임신한 까닭으로, 이곳 남진한에서 크게 환영받게 된다.

 

이곳에서 출생한 혁거세는 그 나이 13세에 진왕에 올랐으니, 그 새로 고친 나라 이름은 사로국斯盧國이다. 혁거세가 전통적으로 삼한三韓의 중심을 뜻하는 진한辰韓의 이름을 버리고 감히 사로국이라 한 까닭은 다름 아닌 그 아버지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바로 고사로高斯盧였음으로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사로국이라 한 것이다.

 

어머니 파소가 아버지의 지원을 얻기 위하여 끝까지 자기 아들의 핏줄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아들이 북부여 고두막한과 고무서 사후에 나라를 세움에 이르러 그 아버지의 이름을 국명으로 삼았으니, ‘사로는 박혁거세의 아버지에 대한 영원한 그리움이다.

 

혁거세는 진한의 이름을 사로라 함으로써 세상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효자가 되고자 하였다. 그는 세인의 말과는 달리 아비 없는 자신이 아닌, 영원히 세상으로 하여금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이보다 먼저 파소가 북부여를 탈출했을 때, 박혁거세의 보호자를 자처했던 것은 고허촌장高墟村長소벌도리蘇伐都利였다. 여기서 고허촌의 고허古墟고씨의 터를 뜻하니, 곧 소벌공蘇伐公은 고사로를 추종하는 유력한 신하였다 할 것이다.

 

이제 이러한 파소와 혁거세의 미래를 훤히 내다보았던 것은 고두막高豆莫이다. 이 모든 것은 오로지 고두막의 심려원모한 계획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고두막한은 전북부여 황실을 격하하여 제후로 삼았듯이, 그 전북부여의 직계 혈통 또한 자신의 제후로 삼아, 반독립적인 상태로 남아있던 중마한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런 그의 생각은 맞아 떨어졌으니 고두막한(혹은 고무서)은 자신의 딸 파소를 매금寐錦으로 봉한다. 이것은 훗날 소서노를 여왕인 어하라로 봉한 것과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고구려본기에 신라 매금, 백제 어하라라 하였으니 이는 두 여인이 사실상 신라와 백제의 시조가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제 세월이 흐르고 흘러 파소가 도망친 지 11년 후인 임술년壬戌年(BCE 59)에 고무서가 6대 단군에 올랐을 때 마침 고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에 이르고, 그 일 년 후인 계해년癸亥年에 고무서高無胥 단군이 아들이 없는 까닭으로 이제 막 사위로 삼은 고주몽에게 보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로서 고주몽은 북부여의 제 7대 단군이자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

 

그리고 그 일 년 후인 갑자년甲子年(BCE 58)에 혁거세는 사로의 시왕이 된다.

 

대저 신라新羅가 유독 동명제東明帝를 받들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파소는 아버지 고두막한의 딸에 대한 뜨거운 마음, 그 애끓는 애정을 몰랐다.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지아비인 고사로를 덧없이 죽음에 이르게 한 원망을 오직 아버지에게 돌렸다. 이제 그 서운함이 아버지로부터 여왕의 작위를 얻었다 하여 풀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찌 알랴? 파소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으나 후인이 역사 왜곡으로 그 부녀의 사이를 갈라놓았는지?

 

이제 본국으로 눈길을 돌려 고구려에는 고주몽과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인 유리琉璃가 동부여서 도망쳐 온다. 예씨 부인은 어머니 유화가 친정인 하백 가문에서 들인 딸로 추정되는 여인이니, 소서노召西努는 자신의 남편 고주몽高朱蒙의 뜻이 예씨禮氏 부인 소생의 유리에게 있음을 눈치 챈다.

소서노는 본래 처녀로서 고주몽에게 시집을 간 황녀이니 임종한 해도 같은 여인이다. 그녀는 세인의 요설처럼 첫 남편 우태와 사별한 과부가 아닌 것이다. 황제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고주몽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비류와 온조溫祚가 제위를 계승하지 못할 것을 깨닫고 오백리의 장원을 일구며 훗날을 대비한다. 훗날 소서노가 오백리의 장원을 가지고 본조인 고구려에 귀부하여 여왕女王인 어하라於瑕羅에 책봉되니, 이는 지금 천진天津 일대인 패대浿帶 지방으로 훗날 비류가 계승하여 된다.

 

그리고 온조는 그 이듬해인 계묘년(BCE 18) 무렵 중마한의 영토 일부인 지금의 경기 하남시 검단산 일대 하남河南 땅으로 이주하여, 중마한의 봉지를 받아 백제百濟를 건국하게 된다.

 

비류가 나라를 세운 것은 고주몽과 소서노가 같이 붕어한 해인 고주몽 재위 40년 임인년(BCE 19)이다.

 

비류 사후에 그 신하가 그 영토를 가지고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岳에 터를 잡은 온조에게 투항하니, 이 나라가 훗날 아시아의 넓은 바다를 지배하며 22담로국을 설치하고 태평양을 건너 남북 아메리카를 오가며 교역했던 해상왕국 백제다. 아메리카에서 발견되는 고대 중국 배의 파편이란 모두가 백제의 배이니, 곧 백제가 장악했던 중원 해안의 광동성 일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 해모수의 혈통을 물려받은 고모수高慕漱와 비서갑 하백녀 유화의 사이에서 태어난 고주몽은 당대의 단군 고무서로부터 보위를 물려받았다. 그 나라가 바로 고구려다.

 

! 당대 단군 고무서의 딸로서 고구려 시조 고주몽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온조가 세운 나라가 바로 백제다.

 

! 치우천황 이래 만고에 무력을 떨친 고두막한의 딸 파소와 고우루 단군의 자손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혁거세가 세운 나라가 바로 바로 신라다.

 

우리 삼국은 모두 서로 사이좋은 형제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부여의 역사가 철저히 말살되고 왜곡됨으로 해서 모두 철천지 원수가 되고 말았다.

 

3. 혹설

부여의 역사는 훼손됨이 너무 심하여, 그 가정을 위의 본설에만 한정할 수 없음으로, 위 본론에 더하여 몇 가지 개연성 있는 혹설을 더하고자 한다.

 

해부루가 곤연에서 금와를 얻은 것은 어찌 보면 하나의 연출이다. 그 금와는 자신의 친자일 수도, 아니면 고우루의 핏줄일 수 있다.

 

박혁거세의 아버지는 하백 가문의 자제일 수 있다. 그러나 황족과 황후족은 원래 서로 혼인 관계가 두텁다. 비단 일방적으로 황실 가문의 일족에 딸들을 공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실 가문의 딸들과 하백 가문의 자제와의 결혼도 그 수만큼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하백녀 유화는 이미 몰락한 전 황실의 황족 불리지와 사통하였음으로, 하백 가문은 고두막한의 눈 밖에 났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 때 존귀하기 이를 데 없는 황실의 가문 제녀帝女 파소가 이미 눈 밖에 난 하백 가문의 자제와 사랑하여 임신하고 말았다면, 이는 지엄한 황명을 어긴 것이 되므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다. 멀리 도주하는 길 밖에는 살아날 방법이 없게 된다.

 

: 송호국 9207. 8. 16. 수정 9207. 9. 20.

참고서적 : 환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 대배달민족사, 개벽실제상황, 통곡하는민족혼

원제 : 신라 박혁거세의 부왕에 대한 가

자료출처 : 네이버 치우천황 카페(http://cafe.naver.com/jaoji.cafe)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이칭(異稱)_서이(徐夷) [2] 관리자 2018.07.28 60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이칭(異稱)_북이(北夷) [1] 관리자 2018.07.22 59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이칭_맥(貊) [4] 관리자 2018.07.02 111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이칭(異稱)_현이(玄夷) 양희춘 2018.05.03 34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이칭(異稱)_남만(南蠻)⑮ 양희춘 2018.05.01 65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이칭(異稱)_서융(西戎)⑭ [7] 양희춘 2018.04.30 139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이칭(異稱)_북적(北狄)⑬ [4] 양희춘 2018.04.29 117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족칭_한(桓) [1] 양희춘 2018.04.27 146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이칭(異稱)_남이(藍夷)⑫ [5] 양희춘 2018.04.26 43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이칭(異稱)_회이(淮夷)⑪ [6] 양희춘 2018.04.25 127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이칭(異稱)_방이(方夷)⑩ [2] 양희춘 2018.04.22 45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이칭(異稱)_황이(黃夷)⑨ [1] 양희춘 2018.04.20 89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이칭(異稱)_조이(鳥夷)⑧ [1] 양희춘 2018.04.19 101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이칭(異稱)_견이(畎夷)⑦ [5] 양희춘 2018.04.18 56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이칭(異稱)_양이(良夷)⑥ [3] 양희춘 2018.04.17 101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이칭(異稱)_우이(嵎夷)⑤ [7] 양희춘 2018.04.16 74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이칭(異稱)_래이(萊夷)④ [5] 양희춘 2018.04.15 101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이칭(異稱)_백이(白夷)③ [3] 양희춘 2018.04.15 64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이칭(異稱)_풍이(風夷)② [6] 양희춘 2018.04.14 172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이칭(異稱)_이(夷)관련 사서자료모음 [3] 양희춘 2018.04.14 51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이칭(異稱)_동이(東夷)① [2] 양희춘 2018.04.13 55
공지 [성씨도움글]오랑캐는 우리민족2 양희춘 2018.04.12 30
공지 [성씨도움글]토템과 성씨 자료 모음 [1] 양희춘 2018.03.18 381
공지 [성씨도움글]강족(羌族)관련자료모음2 [1] 양희춘 2018.02.28 45
공지 [성씨도움글]개천민족_강(羌)족 관련 자료 모음 양희춘 2018.02.27 100
공지 [성씨도움글]민족 근조(根祖) 삼성(三聖)과 삼성전(三聖殿) 양희춘 2018.02.05 32
공지 [성씨도움글]삼성(三聖)의 의미 [1] 양희춘 2018.01.29 33
공지 [성씨도움글]성씨와 문양 양희춘 2018.01.28 224
공지 [성씨도움글]오랑캐(夷이)는 우리민족 양희춘 2018.01.16 58
공지 [성씨도움글]삼신할매 양희춘 2018.01.05 53
공지 [성씨도움글]한민족의 근조 양희춘 2018.01.04 41
공지 [성씨도움글]근조(根祖) 양희춘 2018.01.04 43
공지 [성씨도움글]시조와 본관 양희춘 2018.01.04 66
공지 [성씨도움글]성씨의 기원과 의미 양희춘 2018.01.04 85
313 [성씨자료]양씨_제주도 삼성혈 신화의 형성 관리자 2019.11.21 14
312 [성씨자료]박씨_박혁거세어머니 파소&섭라국 [1] file 관리자 2019.11.19 14
311 [성씨자료]양씨_노합하 file 관리자 2019.11.18 68
310 [성씨자료]양씨_동몽골[펌] 관리자 2019.11.16 3
309 [성씨자료]박씨_박혁거세 선조 추적자료(3) [1] 관리자 2019.11.15 7
308 [성씨자료]배씨(裴氏)_배백촌(裴柏村) 관리자 2019.11.14 9
307 [성씨자료]왕씨_왕건의 할머니 용녀 저민의 [1] 관리자 2019.11.09 9
» [성씨자료]박씨_박혁거세 선조추적관련자료(2) 관리자 2019.11.06 1
305 [성씨자료]말갈과맥&물길과옥저 관리자 2019.11.04 4
304 [성씨자료]한국과몽골[펌] 관리자 2019.11.02 3
303 [성씨자료]양씨_옥저&수성(水城)&해성(海城) 관리자 2019.10.29 6
302 [성씨자료]양씨_양씨세거지(양좌동과 양과동) 관리자 2019.10.26 5
301 [성씨자료]양씨_동옥저와 북옥저 관리자 2019.10.25 9
300 [성씨자료]윤씨_윤자(尹字)와 이부(姨父) 관리자 2019.10.24 5
299 [성씨자료]양씨_량(良)과 나루(국가) 관리자 2019.10.23 8
298 [성씨자료]양씨_양맥(梁貊) 관리자 2019.10.22 25
297 [성씨자료]양모(梁母)_중국 고대 신화 전설의 인물 관리자 2019.10.17 7
296 [성씨자료]책자①_양(梁)씨의 기원 관리자 2019.10.16 16
295 [성씨자료]양씨_“良”자의 어원해석 두 가지 file 관리자 2019.10.13 16
294 [성씨자료]양씨-제주의 차귀신(遮歸神) 관리자 2019.10.09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