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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자료]양씨_양맥(梁貊)

2019.10.22 06:05

관리자 조회 수:25

땅이름/양맥·고구려현

태자였던 도절과 해명이 허망하게 숨진 뒤, 서기 14년 유리왕은 무휼(武恤)을 태자로 삼았다. 이 해, 유리왕의 명을 받은 조이와 마리, 두 장군은 2만의 군대로 서쪽의 양맥(梁貊)을 치고, 나아가 현도군의 고구려현(高句麗縣/高句驪縣)을 쳐서 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한서 지리지를 보면, 고구려현에 요산(遼山)이 있는데 요수(遼水)가 발원하며,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遼隊)에서 대요수(大遼水)와 만난다. 이곳의 남소수(南蘇水)는 서북의 다른 나라로 흘러간다. 대요수는 지금의 요하다. 심양과 무순을 지나는 강이 혼하이고, 요양을 지나는 강이 태자하이며, 둘은 요양 서남쪽에서 만난다. 혼하의 지류가 남소수이므로 요수는 혼하보다 남쪽인 태자하다. 고구려현은 요수(태자하)의 발원지와 남소수(소자하) 상류 사이로, 골본(환인) 서북쪽에 있었다. 고구려의 고구려현 정벌 길에 놓인 양맥은 국내성 서쪽으로, 압록강 지류인 혼강(渾江혼하) 하류의 소수맥(小水貊)이 있던 곳을 가리킨다.

 

몽골고원에 있는 튀르크 빌케 칸 비문 등의 자료들을 보면, 고구려는 다른 나라에서 뵈클리/메클리/몽올/고올리로 불렸다. 추모왕은 주몽·중해(朱蒙·衆解)로도 쓴 것으로 보면 /()와 함께 놓인다. 해씨였던 추모왕은 나라이름의 첫자를 따서 고씨라 하였다. 알타이족에서 부족 이름은 지배집단의 성씨가 된다. 고구려말로 크다’, ‘모고아주 크다’(太大)란 말이었다. 메클리/몽올 따위 말로 볼 때 고구려는 모고//’(太大//)고리’(藁離/句麗)가 더해져 모고고리/모고리/몽고리였다. 고구려와 같은 말로도 쓰이는 맥()과 말갈(靺鞨)모고리의 다른 표기로 보인다.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 】출처:http://bitly.kr/mSV


서천왕

서양왕(西壤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약로(藥盧) 혹은 약우(若友)라고 하였다. 중천왕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255(중천왕 8)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부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성품이 총명하고 인자하여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왕비는 서부대사자(西部大使者) 우수(于漱)의 딸이다.

 

271(서천왕 2) 국상 음우(陰友)가 죽자 그의 아들 상루(尙婁)를 국상으로 삼았고, 273년에는 기근이 들자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276년과 288년에는 신성(新城)에 행차하였는데, 이는 신성의 군사적 위치가 중요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280년 숙신(肅愼)이 침입하여 오자 동생인 달가(達賈)로 하여금 반격하게 하여 단로성(檀盧城)을 함락시키고 추장을 죽였으며, 나아가서 숙신인 600여가를 부여 남쪽의 오천(烏川)에 집단이주시켰고 항복한 부락 6, 7개소를 부용(附庸)하게 하였다.

 

이 전과로 인하여 달가를 안국군(安國君)에 봉하고 군사관계 일을 관장하게 하였으며, 또한 양맥(梁貊) 및 숙신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286년에는 왕위를 찬탈하려던 동생인 일우(逸友)와 소발(素勃)을 처단하였다. 292년에 죽으니 서천지원(西川之原)’에 장사하였다.

 

한편 서천왕릉은 296(봉상왕 5)에 모용씨(慕容氏)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입하였을 때 도굴되었다. 삼국사기봉상왕본기에는 그때 작업하던 자들이 갑자기 죽고 무덤 안에서 음악소리가 울려나와 이를 두려워한 모용씨의 군사들은 고구려로부터 철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참고문헌三國史記】-출처:http://bitly.kr/75


내륙지방의 보금자리 태자성

장백산맥과 나란히 동북에서 서남으로 뻗어 나온 용강산맥(龍崗山脈) 남부지역의 무순시(撫順市)에 속하는 신빈현(新賓縣) 평정산진(平頂山鎭) 홍석립자(紅石砬子)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본계(本溪)의 관음각저수지에 유입한 다음, 본계시와 요양(遼陽)시를 거쳐 해성(海城) 서쪽에서 혼하(渾河)강과 합류하여 영구(營口)의 대료하(大遼河: 발해로 유입되는 요하강의 두 물줄기 중 하나)로 흘러드는 큰 강이 하나 있다. 한나라 이전에는 연수(衍水), 그 후에 대량수(大梁水)로 불리던 이 강은 요나라와 금나라 때부터 태자하(太子河)라 고쳐 불렀다(·금 시기도 대량수란 이름을 겸용). 명나라 시기에 이르러 대자하(代子河)나 태자하(太資河)라 부르던 이 강은 청나라 때에는 만족어로 타스하(塔思哈)나 우르후비라(烏勒乎必喇)로 불렀다. 우르후는 갈대라는 뜻이고, 비라는 강이란 뜻인데 그때는 강에 갈대가 많았던 모양이다. 여러 가지 호칭을 지니었던 이 강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태자하의 이름으로 고착되어 지금까지 그렇게 불려오고 있다.

 

이 태자하의 발원지와 가까운 신빈현 하협하향(下夾河鄕)의 태자하 남안에 삼면으로 강물이 감돌아 흐르고 또 삼면으로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2천년이 넘는 옛 성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중국에서 태자성(太子城)이라 일컫는 고구려의 옛 성이다. 중국의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이곳은 고구려가 혼강(渾江) 유역에 나라를 세운 후, 제일 먼저(유리왕 때) 삼켜버린 양맥(梁貊: 옛날 양수<梁水>, 즉 태자하 상류지역의 오랑캐<>라는 뜻) 부족(部族)의 왕성(王城) 중 하나이다. 고구려가 이곳에다 성을 새로 쌓고 양성(梁城)이라 불렀는데 그 이름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集安市)의 고구려 광개토대왕, 호태왕(好太王)’ 비석에 조각되어 있다. 지금 중국에서 이 성을 또 맥성(貊城)이나 양맥성(梁貊城)이라고도 부른다. 이 성은 고구려역사와 관련되는 사서에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산성으로서 고구려시기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된 요동복지(腹地) 고구려 사람들의 근거지와 보금자리이다.

 

연태자의 은신처 태자성과 그 아래 강이름의 유래

흰 눈이 천지를 뒤덮은 12월의 한 차가운 날에 필자는 태자성을 답사하였다. 이날, 심양(沈陽)에서 매하구(梅河口)로 가는 고속도로를 따라 신빈현 남잡목(南雜木)에 이르러 거기서 관전(寬甸)으로 가는 성도(省道)를 따라 남쪽으로 약 65km 달리니 목적지 태자성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는 먼저 태자성 남측 가파른 산등성이 아래에 오붓하게 자리 잡고 있는 태자성 마을에 들렀다. 지금 100여 세대가 살고 있는 이 마을은 태자성과 함께 북··3면으로 큰 산에 둘러싸여 바람을 등지고 양지바른 국지적 환경을 이루고 있었다.

태자성 문화재 비석

태자성과 이 마을의 환경을 인터뷰하자 이곳 사람들은 자랑이 늘어졌다. “태자성 이곳은 땅도 기름지고 농사도 잘 되지요. 봄부터 얼음이 얼 때까지 서리가 내리는 것도 보기 드물어 어떤 작물이든 심기만 하면 다 풍작을 거둘 수 있습니다. 우리 이 곳 사방으로 40리 안쪽에는 종래로 무슨 큰 자연재해가 나타나는 것을 보지 못했거든요. 참으로 복을 탄 고장입니다. 아마 태자성 덕분인가 봐요.” 정말로 놀랍고도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더 사람을 놀랄 만한 것은 이 옛 성의 연역(演繹)과 그 옆에서 흐르고 있는 태자하의 전설이다. 그럼 우리들은 역사와 전설 속으로 들어가 요동의 깊은 산속 태자하 기슭에서 생긴 사람들로 하여금 2천년이 넘어도 아직까지 아쉬워서 손목을 불끈 쥐고 탄식을 하게 하는 비장(悲壯)한 이야기를 보기로 하자.

 

기원전 226, 한 갈래 방대한 대열이 연나라(燕國) 도읍 계성()에서 황급하게 출발하여 요동으로 달려온다. 이것은 도망가는 대열로서 이를 이끄는 자는 연나라 43대 국왕이자 바야흐로 연나라 마지막 황제가 될 희()와 그의 아들 태자 단()이다. 이에 앞서 진()나라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하여 연나라 태자 단이 형가(荊苛)를 보내어 진시황을 자사(刺死)하게 하였다. 하나 하늘은 연나라를 돕지 않았다. 도궁비수견(圖窮匕首見: 그림을 다 펴자 비수가 나타났다는 뜻)하는 역사사건이 생겨 형가는 살해당하고 만다. 크게 노한 진시황은 대장 왕전()을 파견하여 군사들을 이끌고 연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진나라군은 승승장구로 연나라 도읍까지 쳐들어갔다. 이리하여 태자 단은 부랴부랴 2만명의 정예군을 데리고 국왕 희를 호위하며 요동으로 도망 오게 된 것이다.

 

태자 단 등이 도망간 소식을 알게 된 진시황은 분해서 대장 이신(李信)을 파견해 신속히 요동으로 추격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하나는 앞에서 도망가고 다른 하나는 그 뒤를 쫓아가는 두 대열의 인마(人馬)들이 요동 땅에서 새뽀얀 먼지를 일구며 앞으로 달린다.

산성 남벽 아래에 있는 태자성 마을

연나라 왕 희와 태자 단의 대열이 먼저 요동군 소재지 양평성(현재 요양)에 이르게 되었다. 태자 단은 자리를 잡아 국왕을 배치해 놓고 몸소 측근들을 데리고 양평성의 주변 환경과 방어시설을 살펴보았다. 요동의 큰 산들이 동쪽에 있는 양평성은 동쪽과 북쪽에는 큰 강 연수(衍水, 즉 태자하)가 흐르고 있어 괜찮지만 서쪽에는 확 트인 일망무제한 평야라서 의지해 지킬 수 있는 험한 곳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서쪽에서 뒤쫓아 오는 적군이 쳐들어오면 홍수처럼 밀려들 수 있다. 그렇게 되는 날이면 제나라 땅을 되찾는 큰일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고 연나라는 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참 뒤를 쫓기고 있는 연나라 왕실로서 양평성에 정착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이다. 반드시 다른 지역에 가서 출로를 찾아야했다. 바로 이때 태자 단에게 보고가 들어왔다. “이신의 군이 요하강을 이미 건너 양평 쪽으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연나라 왕 희는 겁에 질려 안절부절못했다. 태자 단은 과감하게 양평성을 포기하기로 하고 왕실과 군사들과 함께 연수를 거슬러 요동산간지역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한편 이신이 이끄는 진나라군은 쉴 사이 없이 달려 양평성까지 추격해 왔다. 그러나 태자 단 부자(父子)는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감추었고 남아있는 것은 빈 성 뿐이었다. 이신의 대군은 산봉우리들이 기복을 이루며 끝없이 이어진 요동의 산맥을 바라보며 막연해 탄식만 할 뿐 어쩔 수가 없었다.

산성 남벽터에서 본 태자성 서쪽 봉화대.

연나라 왕 희와 태자 단은 군사들과 함께 죽을힘을 다해 요동의 깊은 산속으로 도망 왔는데 연수 발원지역에 이르러 한 높은 산마루가 길을 가로 막았다.(그곳이 바로 지금 태자성 근처라 전한다.) 기진맥진한 인마(人馬)들은 잠시 멈추어서 쉬어가기로 했다. 태자 단은 대열을 끌고 양평성을 떠나 요동산지로 와 호랑이와 늑대 떼 같은 진나라군을 당분간 따돌리기는 했지만 부왕(父王)을 어디에 정착시켜야 할지 몰라서 애를 태웠다. 그러던 차에 대열이 휴식을 취하게 되자 그는 임시 머물고 있는 고장의 산천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가 머리를 들어 앞을 가로막은 산을 바라보니 그렇게 찾고 싶었던 고장이 눈앞에 나타나지 않겠는가! 넓은 산등성마루에는 몇 만 명의 군사들이 주둔할 수 있고, 산등성이 동쪽과 북쪽 측면은 아찔한 낭떠러지고 남쪽 측면은 가파른 산비 탈인데다가 삼면으로 산과 강물로 둘러싸여 난공이수의 자연요새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산등성이 주변에는 연수와 그 지류의 충적평원이라서 농사를 짓는다면 군량미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옳다! 이곳이 바로 우리들의 가장 좋은 정착지구나!” 태자 단의 찌푸렸던 양 미간이 삽시간에 펼쳐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연나라 왕실과 군사들은 이 고장에 정착하여 산등성 위에 성곽을 쌓고 하곡지대에는 논과 밭을 일구어 농사도 지으며 군사들을 훈련시켜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려고 하였다. 고요하던 첩첩산중 깊은 골짜기가 떠들썩하기 시작했다.

 

한편, 연나라왕 부자를 놓쳤다는 소식을 들은 진시황은 노발대발하여 양평에 머물러 있는 이신 보고 계속 그들을 추적하도록 명하였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연나라 왕 희는 또 당황해 했다. 이때, 대군(代郡)에 도망가 임금을 자처하고 있던 조나라 공자(公子) ()는 연나라 왕 희에게 편지를 보내 진시황이 연나라를 소멸하려 한 것은 태자 단을 미워해서 그러는 겁니다. 만약 폐하께서 태자 단의 수급을 보낸다면 진나라는 철군할 것입니다라고 권고하였다. 연나라 왕 희는 고민 끝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모진 마음을 먹었다. 그는 태자 단을 불러다 술을 먹여 만취하게 한 다음 손을 썼다. 그러고 나서 아들의 수급을 이신의 군에 보냈다. 아들을 죽이고 대성통곡하는 연나라 왕 희는 너무도 슬퍼서 살 의욕을 잃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산성의 군사들과 주변에 백성들은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당시 마침 초여름인 5월인데 하늘에서 갑자기 함박눈이 쏟아져 평지에 25치의 두께로 쌓이고 기온이 떨어져 겨울처럼 추웠다고 전한다. 아마 하늘과 땅도 감응이 있는가 보다. 아들의 죽음으로 연나라 왕 희는 한동안 평온한 세월을 보냈지만 결국 나라가 망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기원전 222, 진나라군이 쳐들어와 연나라 왕 희는 포로가 되고 연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후세에 사람들은 나라를 위하여 죽게 된 태자 단을 기리기 위해 연수를 태자하로 고쳐부르고 태자 단이 연수 발원지역에 쌓은 그 산성을 태자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2011.02.07  게시글

-출처:http://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32711


논문:東洲河 流域~蘇子河 下流域支石墓梁貊

동아시아고대학, 통권제28(2012.08),吳江原, pp.205-252

한국어撫順縣 남부의 東洲河-溫道河 유역과 新賓縣 관내의 蘇子河 유역은 요동 북부 지역에서 지석묘가 가장 밀집 분포하고 있는 곳이다. 이 일대의 지석묘는 기원전 65세기 무렵부터 시작해 지점에 따라 가장 늦게는 기원전 1세기 초까지 축조되었다. 두 유역에 분포하고 있는 지석묘는 적석식 지석묘와 함께 그와 인접하여 선고구려의 대석개 적석묘와 초기 고구려의 적석묘가 축조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데, 桓仁縣 서부의 六道河 유역에도 적석식 지석묘선돌대석개 적석묘가 집중 분포되어 있어, 두 지역이 청동기시대 말기초기 철기시대부터 문화적으로 교류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撫順縣 남부 산곡의 東洲河-溫道河 유역과 新賓縣 蘇子河 유역이 渾江 유역의 桓仁縣 일대와 교류할 때 활용한 교통로는 新賓縣 蘇子河 하류역-新賓縣 蘇子河 중하류단의 남쪽 지류인 二道河 유역-雙頂子山 분수령-桓仁縣 六道河 유역-桓仁 분지의 渾江 유역이었는데, 이 루트는 246나라 毌丘儉342前燕 慕容皝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활용한 교통로와도 일치한다. 아무튼 무순현 남부의 東洲河-溫道河 유역과 신빈현 蘇子河 하류역의 지석묘 축조 집단은 무덤 구조와 장법의 상사성 등을 고려할 때 고구려와 집단, 즉 친연한 貊系 족속에 속하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관련 자료를 검토한 결과 梁貊之谷梁口는 각각 蘇子河 하곡과 蘇子河 하곡의 입구로 비정된다. 그런데 梁貊太子河 상류역의 貊系 족속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蘇子河 유역이 梁貊之谷으로 불리우게 된 연유가 선뜻 이해되지 않는데, 당시의 역사문화적 정황을 고려하여 볼 때 蘇子河 유역 등지가 고구려와 현도군 모두에게 고구려와 문화적으로 유사하지만 다른 집단이자 지리적으로 두 세력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梁貊과 근접하여 있다는 점, 그리고 蘇子河 유역이 고구려와 현도군의 주요한 교통로로 활용된 까닭에 이러한 지명이 붙여지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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