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28 11:51
서이(徐夷) 관련 자료입니다.
서이(徐夷)는 23세 아홀단군 재위시 영고씨(盈古氏)를 서(徐)에 봉함으로써 기원한다고 봅니다.
후에 서언왕의 서국(徐國)도 서이(徐夷)와 관련이 됩니다. 지금까지 자료에 의하면 BC668년에 서국(徐國)이 제환공 시대에 병합되면서 서이(徐夷)라는 이름으로는 더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乙酉二年 藍國君今達 與靑邱君 句麗君 會于周愷 合蒙古里之兵 所到破殷城柵 深入奧地 定淮岱之地 分封蒲古氏於淹 盈古氏於徐 邦古氏於淮 殷人 望風煌怯 莫敢近之”-『한단고기』단군세기
(23세 아홀단군) 재위 2년 을유(B.C.1236)년에 남국(藍國)의 임금 금달(今達)이 청구(靑邱)의 임금, 구려(句麗)의 임금과 주개(周愷)에서 만나 몽고리(蒙古里)의 병력과 함께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고 포고씨(蒲古氏)를 엄(淹)에, 영고씨(盈古氏)를 서(徐)에, 방고씨(邦古氏)를 회(淮)에 각각 봉하시니, 은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겁내어 감히 근접하지 못하였다. * 은나라 24대 조갑(祖甲)[BC1259~BC1227) 때
◾(BC1199~BC1196) "(은나라 27대)무을(武乙) 이 쇠하고 동이(東夷)가 번성하였고, 드디어 회대(淮岱)의 땅으로 나누어 옮겨가서 중토(中土. 가운데 땅)를 점거하였다"-『後漢書』 東夷列傳
BC1199년에 동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다.
◾BC1197년 "(은나라 27대)무을(武乙) 3년에 무을이 쇠하게 되자 동이(東夷)의 침범이 잦아지고 드디어 회대(淮岱)의 땅으로 나누어 옮겨가서 중토(中土. 가운데 땅)에 머무니 소위 서이(徐夷)가 이들이다."-『博物志』
『博物志』 에서는 회대 지역의 서이가 곧 동이로 기록되고 있다. 연대 차이는 있으나 『한단고기』에서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고 영고씨(盈古氏)를 서(徐)에 봉하였다는 기록과 연관이 된다.
◾BC1123년 주무왕(BC1134~BC1116)"11년에 은을 정벌하기 시작하였는데, 주무왕이 서이(西夷)의 제후를 이끌고 은나라를 치고 모야(土母野)로 패퇴시켰다"--『죽서기년』
◾BC1078~BC1053 주나라 3대 "강왕(康王)의 때에 숙신이 다시 왔고, 뒤에 서이(徐夷)가 왕을 잠칭하고 구이(九夷)를 이끌고 종주(宗周)를 정벌하여 서쪽으로 하상(河上)에 이르렀다"-『後漢書』 東夷列傳
◾BC1001~BC947) 주나라 5대 "목왕(穆王)이 두려워하여 동방의 제후를 나누어 서언왕(徐偃王)을 주인으로 섬기도록 명하였다. 서언왕은 인의를 행하니 육지의 나라로서 알현한 곳이 36국이다.-『後漢書』 東夷列傳
◾주나라 목왕(穆王)[BC1001~BC947]이 조부(造父)에게 초(楚)나라로 하여금 서(徐)국을 멸하게 명하라 하고 하루만에 초나라에 이르렀는데, 이에 초나라 문왕(文王)[BC689년~BC677, 주나라 희왕(이왕) 시기]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하였다. 언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다. 이에 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後漢書』 東夷列傳
BC668년에 서국(徐國)이 제환공 시대에 병합되어 망한다
*서이(西夷) : 之踊, 蜀, 羌, 微, 盧, 彭 등<竹書紀年>
【BC1116년 "무왕이 붕하니 삼감(三監)과 회이(淮夷)가 배반하였고 주공(周公)이 정벌하였다"-<尙書, 후한서 동이열전>
*회이(淮夷)는 회대지역에서 서이(徐夷)의 남쪽 회수(淮水) 지역에 자리잡은 동이이다.
주 성왕(成王) BC1115~BC1079년 "관(管)과 채(蔡)가 주나라를 배반하여 이적(夷狄)을 불러들이니 주공(周公)이 정벌하고 드디어 동이(東夷)를 평정하였다"-『후한서』 동이열전
BC878년~BC828년 주나라 10대 “여왕이 무도하여 회이(淮夷)가 들어와 도적질을 하였다. 소공(召公)이 이를 정벌하였다.”- 『후한서』 동이열전
BC781년~ BC771넌“유왕(幽王)이 음란하자 사이(四夷)가 번갈아 가며 침범하였다. 제환공(薺桓公)에 이르러 패업을 이루어 이를 물리쳤다. 초나라 영왕(靈王)이 신(申)에서 회합하니 역시 회맹에 동참하였으니 초영왕(楚靈王), 채후(蔡侯), 진후(陳侯), 정백(鄭伯), 허남(許男), 회이(淮夷)이다.”- 『후한서』동이열전, 『좌전』 참조
BC221년 “진(秦)나라가 육국을 멸하자 회이(淮夷)와 사이(泗夷)가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 『후한서』동이열전】-회이(淮夷)자료
*회이(淮夷)는 회수(淮水) 지역에, 사이(泗夷)는 사수(泗水)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동이족의 나라이다.
2018.08.01 19:36
2018.08.12 07:52
서이徐夷=회이=파족(巴族)=호족(虎族).
-호랑이의 방언인 '백도(伯都)'를 봤을 때는 '伯夷'와도 관련이 있다.-
서이徐夷 | 서이는 오랫동안 회이 집단에서도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흔히 서이회라고도 불렀습니다. 고전에서 흔히 보이는 서방은 회이의 핵심을 이루는 세력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族原으로 봤을 때 서이는 영씨 성이고 본래 동이 백익부의 후예입니다. 서이는 은허 복사에서 호방이라 불렀고, 청동기의 명문에서도 서족 스스로 호라 하였습니다. 서이의 호족은 동방의 토착민으로서 춘추시대 이후 오, 월, 초 문화의 중요한 원천일 뿐만 아니라 제, 진 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진시황이 문자를 통일하는 데에도 매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파족(巴族) 삼국지에서 유비가 제갈량의 도움을 얻어 세운 촉한은 중국 사천성 일대로 파(巴)와 촉(蜀)이라 불리던 지역입니다. 이 지역으로 이주해 개척한 파인도 동이 중 서이의 한 갈래에 속합니다. 파인의 최초 거주지는 안휘성 회수 유역이며, 상나라 때은 이미 산서성 동남 일대로 이주하여 파족을 이루었습니다. 주나라가 상을 무너뜨린 뒤, 이들은 활동 중심지를 남쪽으로 하남성, 섬서성, 호북성에 있는 한수 중상류로 옮겼고, 춘추전국 즈음에는 지금의 중경 동부로 이동하였습니다.
파의 계보에 대해 고대 문헌 중 『산해경』해내경에서는 “서남에 파국이 있는데, 대호가 함조를 낳고 함조가 승리를 낳았고, 승리가 후조를 낳고, 후조는 파의 시조가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대호는 곧 태호씨입니다. 파의 명칭 기원에 대해서 동물설, 식물설, 지형설, 수컷설 등 여러 설이 있는데 양밍은 산서, 섬서, 하남의 방언에 보이는 호랑이에 대한 호칭과 파인이 스스로 호인(虎人)이라 부르는 것과 연관성이 있다고 봅니다.
선진 시기부터 한나라까지 섬서, 산서, 하남의 3성의 접경지대에서 호랑이를 지방 사투리로 백도(伯都)라 불렀으며, 산서 남부와 호북 서부에 일컫던 지명인 파공이 백도와 발음이 거의 비슷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파공(巴公)과 백도(伯都)에서 파와 백은 한나라 이전 산서, 섬서, 하남 일대에서 호랑이를 부르는 호칭이었다고 합니다. 앞에서 파족이 서이의 후예라 하였는데 이 서이에 호랑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또 호(虎)는 서(徐)의 본래 호칭이고 출토된 유물에도 서인(徐人)은 호족(虎族)이라 자칭하였으며, 상나라 사람들은 호방(虎方)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서, 호, 초는 동음자를 다르게 쓴 것이고, 서(徐)의 본래 뜻은 ‘호(虎)’로 파(巴)의 뜻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파족은 환웅족과 결합하지 못한 호족의 후예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한단고기』안경전 역주
고대중국 기록에, “무을(武乙) 3년(서기전1197)경에 무을이 쇠하게 되자, 동이(東夷)의 침범이 잦아지고, 드디어 회대(淮岱)의 땅으로 나누어 옮겨가서 중토(中土. 가운데 땅)에 머무니 소위 서이(徐夷)가 이들이다."<博物志>
여기서는 서이(徐夷)가 회대(淮岱)의 땅 중에서 중간에 해당하는 곳을 차지하였다고 기록한 것이 된다. 서국 즉 서이의 땅은 태산과 회수 사이의 중간에 해당하는 것이 되는데, 이를 두고 중토(中土)라고 적은 것이 된다. 또, 서이(徐夷)가 곧 동이(東夷)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동이(東夷) 중에서 특히 서이(徐夷)가 회대지역에서 번성하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역사기록으로 보면, 서기전1199년경에 해당하는 시기에 동이(東夷)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이 된다. 즉, 이때는 서이(西夷) 세력이 서서히 등장하는 시기로서 주(周)나라를 염두에 두고 은(殷)나라의 동쪽을 동이(東夷)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된다. 서이(西夷)의 나라인 주(周)나라가 중화(中華), 중국(中國)으로 스스로 부르면서 단군조선의 본국을 동이(東夷)로 부르게 되는 것이다. 즉, 서기전1199년경부터 단군조선을 동이(東夷)라고 기록하면서 서이(西夷)의 나라인 주(周)나라는 중화(中華), 중국(中國)으로 기록된다.
춘추전국시대 중화주의(中華主義) 학자들이 주(周)나라를 찬양하면서, 서이(西夷) 세력을 주축으로 한 사이(四夷)의 나라인 중화(中華)와, 구이(九夷)의 나라인 단군조선을 사방으로 나누어 그 본국이 되는 삼한(三韓) 즉 진한(眞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을 동이(東夷)라 부르게 된 것이다. 동이(東夷) 외 구이(九夷)에 속하는 이족(夷族)으로서 주(周)나라 서쪽은 서융(西戎), 남쪽은 남만(南蠻), 북쪽은 북적(北狄)으로 나누어 불렀다. 서융은 주(周)나라에 복속하지 아니한 서이(西夷=白夷)의 무리이고, 남만은 적이(赤夷), 북적은 황이(黃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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