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22 08:01
북이(北夷) 관련 자료를 모읍니다.
역사 기록 당시 북쪽에 살던 이족(夷族)을 북이(北夷)로 불렀다고 봅니다. 기록 주체 혹은 그 당시의 중심국이 어디였는가에 따라 위치는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강희자전에서는 송나라 때는 동북이(東北夷)를 일반적으로 해(奚, 傒, 解)로 적었다고 합니다. 부여와 고구려의 시조 설화에는 이들을 모두 북이(北夷)로 기록했습니다.
“匈奴冒頓新服北夷,來爲邊害,孟舒知士卒罷敝,不忍出言,士爭臨城死敵,如
子爲父,弟爲兄,以故死者數百人。
孟舒豈故驅戰之哉!是乃孟舒所以爲長者也。 於是上曰 賢哉孟舒! 復召孟
舒以爲雲中守。”-『史記』卷一百四 田叔列傳
조나라의 전숙이 전한(前漢) 효문제에게 자신보다 맹서가 더욱 훌륭한 인물이라고 설명하여 그를 다시 운중수로 복직시킨다는 내용이다.
흉노 모돈이 정복한 북이(北夷)를 동호로 본다. 동호가 물러난 자리를 차지한 흉노가 후한의 변경인 운중(雲中)일대를 공격했다는 기록이다. 운중은 중국역사지도집에 의하면 호화호특의 남서쪽에 있는데 운중일대는 동호가 있던자리이다.
“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
"因都王夫餘 故北夷 有夫余國焉"
북이(北夷) 탁리국(橐離國) 임금을 모시던 시비(侍婢)가 임신했다 .
그리하여 부여 (夫餘)에 서울을 정하고 임금이 되었다 . 이것이 북이(北夷) 땅에 부여(夫余) 나라가 생긴 연유(緣由)다
-『논형 (論衡)』 권이 (卷二 ) 길험편 (吉驗篇)
이 자료에 의하면 북이(北夷) 땅에 탁리국이 있었고, 동명에 의하여 북이땅에 부여가 생긴 것이다.
참고) 은민(殷民) 7족에 색씨(索氏)가 있다. 조세가(趙世家)와 세어(世語)에는 산서성 일대에 소삭정/성 (小索亭/城)이 있었다고 한다. 삭씨(索氏)가 분수연안에서 하북 평원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흩어져 나갔다. 그들의 한 분파가 만주 땅에 들어 왔다.
◾“숙신씨에 대해서 위소(韋昭)는 이르기를, ‘동북이(東北夷)의 나라로 부여(夫餘)에서 1000리 떨어져 있으니, 진(晉)나라 때의 현도이다.’ 하였으니, 바로 요(遼)의 동북쪽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예(杜預)는 말하기를, ‘현도의 북쪽으로 300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으니, 이는 북이(北夷)로서 동쪽에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예는 북이(北夷)라고 하고, 위소는 동북이(東北夷)라고 말한 것이다.-『춘추좌전』소(疏)
”晉書。肅愼氏。一名挹婁。在不咸山北。去扶餘可六十日。東濱大海。西接寇漫汗國。北極弱水。廣袤數千里。裨離國。在肅愼氏國西北。馬行二百日。養雲國。去裨離馬行又五十日。寇莫汗國。去養雲國又百日。一群國。去莫汗又百五十日。計去肅愼五萬餘里。晉武時各遣小部。獻其方物。按黑水靺鞨。卽肅愼氏也。黑水。今黑龍江也“-『晉書』 숙신씨전
진서에 숙신씨는 일명 읍루라고도 한다. 불함산의 북쪽에 있으며, 부여에서 61일을 가야 한다. 동쪽으로는 바닷가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과 접하였으며, 북으로는 약수(弱水)에 닿아 있다.
“肅愼·燕·毫, 吾北土也”-『春秋左傳』昭公 9年條
숙신은 燕·毫와 더불어 중국의 북방에 있다고 하였다.
“南撫交趾·北發·西戎·析枝·渠庾·羌·北山戎·發·息愼·東長·鳥夷”-『史記』五帝本紀 帝舜條
後漢 鄭玄의 주석을 보면 '息愼, 或謂之肅愼, 東北夷”라 하였다.
周代에는 동북쪽에 있는 肅愼이라고 통칭하였으나, 삼국 시대에 魏 나라가 비로소 만주 지방을 정벌하자 만주 지방에 살던 東北夷를 肅愼이라고 부르지 않고 읍루라고 불렀다. 周代의 肅愼 이래 역사에 쓰이던 명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肅愼(Suk-chin) ― 周代 ② 朱申(Su-shin) ― 前漢代 ③ 읍루(Dy r) ― 後漢·三國 時代 ④ 徹兒赤(Dzur-chi) ― 唐代 ⑤ 朱里眞(Jur-chin) ― 宋代·元代 ⑥ 女眞(Jur-chin) ― 明代 ⑦ 女直(Jur-chi) ― 明代 ⑧ 奴兒眞(Nyur-chin) ― 淸代. . 《중국정사조선전역주》金九鎭 注.
"자료 찾는 중입니다"-『이십오사』북이편
- 계 속 -
상세자료
『논형 (論衡)』 권이 (卷二 ) 길험편 (吉驗篇)
北夷橐離國王侍婢有娠 북이(北夷) 탁리국 (橐離國)왕을 모시던 시비(侍婢)가
임신을 했다 .
王欲殺之 임금이 그를 죽이려고 하니
婢對曰 시비가 사뢰되
有氣大如 雞 子 "크기가 달걀만한 기운이
從天而下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我故有娠 제가 아이를 뱄습니다 "라고 하였다 .
後 産 子 후에 아이를 낳았다 .
捐於豬溷中 돼지우리(豬溷) 안에 (아이를 ) 버리니
豬以口氣噓之不死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
復徙置馬欄中 다시 마구간 (馬欄)으로 옮겨 (徙置)
欲使馬借殺之 말로 하여금 아이를 죽이게 했다 .
馬複以口氣噓之不死 말도 다시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
王疑以 爲 天子 왕이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의심하여
令其母收取奴畜之 그 어미에게 명하여 거두어 노비처럼 키우게 했다 .
名東明 동명이라 이름 짓고
令牧牛馬 소와 말을 기르도록 명했다.
東明善射 동명은 활을 잘 쐈다 .
王恐奪其國也 임금은 (동명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
欲殺之 동명을 죽이려고 하니
東明走 동명이 달아났다 .
南至掩水 남쪽 엄수 (掩水)에 이르러
以弓擊水 활로 물을 치니
魚鱉浮 爲 橋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
東明得渡 동명이 건너자
魚鱉解散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졌다
追兵不得渡 병사들이 추격했으나 (물을) 건너지 못했다 .
因都王夫餘 그리하여 부여 (夫餘)에 서울을 정하고 임금이 되었다 .
故北夷 有夫余國焉 이것이 북이(北夷) 땅에 부여(夫余) 나라가 생긴 연유(緣由)다 .
東明之母初妊時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할 때
見氣從天下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及生棄之 동명을 낳아 키웠다 .
豬馬以氣籲之而生之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 동명을 살렸다 .
長大 몸이 장대 (長大)하므로
王欲殺之 왕이 동명을 죽이려고 하였다 .
以弓擊水 활로 물을 치니
魚鱉爲 橋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
天命不當死 하늘의 운명이 아직 죽을 때가 아니므로
故有豬馬之救 돼지와 말이 (동명을) 구해주었다 .
命當都王夫餘 부여에 서울을 정하고 임금이 될 운명이므로
故有魚鱉 爲 橋之助也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동명을) 도와주었다 .
[匈奴冒頓新服北夷,來爲邊害,孟舒知士卒罷敝,不忍出言,士爭臨城死敵,如
子爲父,弟爲兄,以故死者數百人。
孟舒豈故驅戰之哉!是乃孟舒所以爲長者也。 於是上曰 賢哉孟舒! 復召孟
舒以爲雲中守。”-『史記』卷一百四 田叔列傳] 흉노 모돈은 북이를 정복하자 (중국)변방으로 들어와 해를 끼쳤습니다. 맹서는 병사들이 지치고 고달파하는 것을 알고 차마 나가서 싸우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병사들은 다투어 성을 지키며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마치 아들이 아비를 위하는 것 같고 동생이 형을 위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죽은 자가 수백명이었습니다. 맹서가 어찌 일부러 그들을 내몰아 싸우도록 했겠습니까! 이것이 맹서를 장자라고 하는 까닭입니다. 이말을 듣고 황상이 말했다. “어질구나, 맹서여” 하고는 다시 맹서를 불러 운중 군수로 삼았다.
요약하면 조나라의 전숙이 전한(前漢) 효문제에게 자신보다 맹서가 더욱 훌륭한 인물이라고 설명하여 그를 다시 운중수로 복직시킨다는 내용이다.
여기서‘匈奴冒頓新服北夷’는 ‘흉노 모돈은 북이를 정복하자 (중국)변방으로 들어와 해를 끼쳤다’는 내용인데 여기서 흉노 모돈이 정복한 북이(北夷)는 동호로 본다. 동호가 물러난 자리를 차지한 흉노가 후한의 변경인 운중(雲中)일대를 공격한 것이다. 중국역사지도집에 의하면 운중은 호화호특의 남서쪽에 있는데 운중일대는 옛 동호가 있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