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02 06:50
사료에 기록된 '맥(貊)'
◾"【卷九】【豸部】
北方豸穜。從豸各聲。孔子曰:“貉之爲言惡也。”莫白切
『說文解字注』
(貉) 北方貉。各本奪貉字。今補。此與西方羌從羊、北方狄從犬、南方蠻從蟲、東南閩越從蟲、東方夷從大、參合觀之。鄭司農雲。北方曰貉、曰狄。週禮大甸。獵祭表貉。注云。貉讀爲十百之百。豸穜也。從豸。長脊獸之穜也。故從豸。各聲。莫白切。古音在五部。下各切。俗作貊。孔子曰。貉之言貉貉惡也。七字一句。各本作貉之爲言惡也。今依尚書音義、五經文字正。尚書音義作貊貊。淺人所改耳。貉與惡韻。貉貉、惡皃。 ○貂貉二篆各本在犴篆之後。貆貍篆之前。今以蟲部之蠻閩、次於以蟲爲象之末。犬部之狄、次於犬末。羊部之羌、次於羊末。人部之僥、次於人末。大部夷字、次於大末。依類求之。移易次此。必有合乎古本矣。"。”-『설문해자』
◾"《廣韻》《集韻》《韻會》《正韻》莫白切,音陌。本作貉。或作貊。《書·武成》華夏蠻貊。《詩·大雅》其追其貊。《傳》追、貊,國名。
又《詩·大雅》貊其德音。《傳》靜也。《箋》德政應和曰貊。
又獸名。《後漢·西南夷傳》哀牢夷,出貊獸。《註》《南中八郡志》曰:貊大如驢,狀頗似熊,多力,食鐵,所觸無不拉。《廣志》曰:貊色蒼白,其皮溫煖。
又《韻補》叶末各切。《張載·七命》華裔之奚,流荒之貊。語不傳于輶軒,地不被乎正朔。”-『강희자전』
◾"貊國亦出於檀氏之世 則建都襲名 必有之理也”-『규원사화』檀君紀
◾“癸未歲, (王)[壬]儉達音元年. 娶靑丘侯之女阿施氏爲后, 賢而有德, 國人慕之. 蓋馬侯獻靈艸. 昔, 夫餘民有遁居于猰貐之地, 遂與其民雜處, 頗習其俗, 殆無恒業, 以狩獵爲生, 獸皮爲服, 人謂之貊. (後)[復]漸遷徙, 處於奄慮北西之地, 遂爲藍氏之民. 在位十四歲, 崩. 子, 音次立.-『규원사화』
(40세 달음 단군)계미년은 달음 임금의 원년이다. 청구후의 여식 아시씨(阿施氏)를 취하여 황후로 삼으니, 어질며 덕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그를 흠모하였다. 개마후가 신령스러운 풀을 바쳤다. 옛적에 부여의 백성 가운데 몸을 피하여 알유의 땅에 사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그 땅의 백성들과 섞여서 거처하게 되니 자못 그 풍속을 익히게 되었으며, 거의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맥(貊)'이라 하였다. 다시 점차 옮겨와서 엄려(奄慮)의 북서쪽 땅에서 살게 되어 마침내 남후의 백성이 되었다. 임금의 자리에 있은 지 14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음차(音次)가 임금이 되었다.
◾“其後 有號曰檀君王儉 立都阿斯達 今松花江也
始稱國爲朝鮮 三韓 高離 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夫餘 濊與貊 皆其管境也”
-『한단고기』태백일사/신시본기
그 뒤 단군왕검이라 불리는 분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시니 지금의 송화강이다. 이때 비로소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칭하시니, 삼한·고리·시라·고례·남, 북옥저 동, 북부여·예와 맥이 모두 그 관할 영토였다.
“乙卯二十九年 命菁莪褥薩丕信 西沃沮褥薩高士琛 貊城褥薩突盖 封爲列汗.”-『한단고기』단군세기
(12세 아한단군)재위 29년 을묘(B.C.1806)년에 조칙을 내려 청아의 욕살 비신과 서옥저의 욕살인 고사침과 맥성의 욕살인 돌개를 열한(列汗)으로 봉하셨다.
◾ “高句驪, 東夷相傳以爲夫餘別種 句驪一名貊耳 (중간생략) 百濟高麗新羅基三國全朝鮮裔裳也用同語”-『후한서』東夷傳
“貉在北方三韓之屬皆貉類也”-『漢書』 동북방에 있는 삼한지속이 모두 맥의 부류이다
참고) 《주례(周禮)》에 <사냥할 때 군신(軍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맥제(貊祭)라고 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맥(貊)이라는 명칭은 중국 사료에서는 일반적으로 서주(西周) 시대 이후 나타났다가, 진(秦)나라에 의해 통일된 이후에는 예맥(濊貊)이라는 말로 보편적으로 사용하였고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에 이르러 소멸되었다.
○ 제 환공(齊桓公)이 승거(乘車)의 회합을 세 번 열고 병거(兵車)의 회합을 여섯 번 열어 제후들과 아홉 번 회합하여 천하를 통일하였다. 북쪽으로는 고죽(孤竹)ㆍ산융(山戎)ㆍ예(穢)ㆍ맥(貊)ㆍ구진하(拘秦夏)까지 이르렀다. 《관자(管子)》
○ (周)무왕이 상(商)을 정벌하자 화하(華夏)와 만맥(蠻貊)이 모두 다 복종하였다. 《상서(尙書)》
○ 하관(夏官) 직방씨(職方氏)는 구맥(九貉)의 사람을 관장한다. 《주례(周禮)》
○ 北戎伐齊 齊使乞師于鄭 鄭大子忽帥師救齊 大敗戎師 獲其二帥大良小良 甲首三百 以獻於齊.《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BC706년)북융이 제나라를 공격했으므로 제나라 임금은 정나라에 군대를 요청했다. 그래서 정나라 태자 <홀>은 군대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구원하여 북융의 군대를 대파하고 장군 대량과 소량 두 사람과 무장한 군사 300명을 체포하여 제나라에 바쳤다.
○ 無終子嘉父使孟樂如晉 以請和諸戎 晉侯曰 使魏絳盟諸戎-《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무종국(無終國)의 임금 가보는 맹약을 사자로 진나라에 보내어 융의 여러 나라와 화해 해줄 것을 요청하게 하였다. 그러자 진후는 위강(魏絳)에게 명하여 융의 여러 나라와 화목을 맹약하게 하였다.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 <사기(史記)>에 “조양자(趙襄子)가 구주(句注)를 넘어 대(代)를 격파하여 아우르고 호(胡), 맥(貉)에까지 이르렀다.”라는 기록에 맥(貉)이 등장한다.
<○사기(史記)>의 기록에 나타나는 맥(貉)은 기본적으로 시경(詩經) 한혁(韓奕)편에 수록된 “其追其貊”이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전해지는 시경(詩經)은 춘추시대 노국(魯國) 사람인 모형(毛亨) 일파가 남긴 시경(詩經) 판본이다.
2018.07.31 16:46
2018.08.06 07:02
예족
『규원사화』단군기에서는 초대 단군왕검시기에 여수기가 예(濊)의 임금으로, 『한단고기』단군세기에는 두지주의 예읍(濊邑)의 반란을 진압한 여수기(余守己)로, 이천 서씨와 부여 서씨 족보에는 서씨의 시조로서 濊國추장 여수기로 나온다. 여수기(余守己)가 예와 관련은 되는데 규원사화와 한단고기에서 여수기 등장은 1대 단군왕검 시기와 3대 가륵단군 시기로 시대적 차이를 보이고 있어 동일 인물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다.
『규원사화』단군기의 예(穢)
“當是之時, 檀君之化, 洽被四土, 北曁大荒, 西率猰揄, 南至海岱, 東窮蒼海, 聲敎之漸, 偉乎廣矣. 乃區劃天下之地, 以封勳戚. 蚩尤氏之後, 封于南西之地, 巨野浩豁, 海天靚碧, 曰藍國, 宅奄慮忽. 神誌氏之後, 封于北東之地, 河嶽(鹿並)[추莊], 風氣勁雄, 曰속侲國, 亦稱肅愼, 方言, 豪莊之稱也, 治肅愼忽. 高矢氏之後, 封于南東之地, 山河秀麗, 草木暢茂, 曰靑丘國, 宅樂浪忽. 封[周](周)朱因氏之後, 於蓋馬國. 余守己爲(穢)[濊]君. 夫蘇. 夫虞 及少子夫餘, 皆封于國西之地, 句麗 .眞番. 夫餘諸國, 是也. 其後, 夫婁又封東來三人於各地, 後世之沃沮. 卒本. 沸流之稱, 皆起於其所封國名也. 通檀氏之世, 凡大國九, 小國十二, 分治天下諸州, 今不可詳矣.”
-『규원사화』단군기
당시에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에 다다르고 서쪽은 설유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회대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으니, 가르침이 퍼져나가 물들어 감은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었다.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에게 주어 제후로 삼았다.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신지씨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속진국(루侲國) 또는 숙신(肅愼)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하며, 숙신홀(肅愼忽)에서 다스리게 하였다.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에 봉하니, 산하가 빼어나게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이름하고 낙랑홀(樂浪忽)에 자리 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주인씨의 후손은 개마국(蓋馬國)에 봉하고, 여수기는 예(濊)의 임금이 되게 하였으며, 부소와 부우 및 작은 아들인 부여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니, 구려(句麗)와 진번(眞番) 및 부여(夫餘)등의 여러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그 후에 부루가 또 동쪽에서 온 세 사람을 각지에 봉했는데, 후세의 옥저(沃沮)와 졸본(卒本) 및 비류(沸流) 등의 명칭은 모두 이 봉함을 받은 나라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단씨(檀氏)의 시대를 통하여 무릇 큰 나라는 아홉이요 작은 나라는 열둘로서, 나누어 천하의 모든 고을을 다스렸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단군세기의 ‘예읍(濊邑)’
“戊申十年 豆只州濊邑叛 命余守己 斬其酋素尸毛犁 自是稱其地曰素尸毛犁 今轉音爲牛首國也 其後孫 有陜野奴者 逃於海上 據三島 僭稱天王.”-『한단고기』단군세기
(3세 가륵단군)재위 10년 무신(B.C.2173)년에 두지주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余守己)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素尸毛犁)의 목을 베게 하셨다. 이때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라고 하다가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이 되었다. 그 후손에 협야노(陜野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三島)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참칭했다
이천 서씨와 부여 서씨 족보에는 서씨의 시조 여수기(余守己)가 濊國추장으로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여러군에 분거하여 백성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무리를 뜻하는 쌍인 변에 余자를 붙어서 徐자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
“북명(北溟)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얻어 이를 바쳤다”-『삼국사기』「신라본기」남해차차웅 16년 조 (서기 19년)
“왕은 군사를 내어 부여를 치려고 …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 자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여왔다. 새벽에 사람을 시켜 그것을 찾게 하였는데, 금으로 만든 왕의 도장(金璽)과 병기를 얻었다. 왕은 ‘이것은 하늘이 주신 것이로다.’라고 말한 뒤, (하늘에) 절을 하고 그것을 받았다.
길을 떠나려 하는데 한 사람이 나타났다. … 그는 왕에게 절하며 ‘신(臣)은 북명(北溟) 사람인 괴유(怪由)이옵니다.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치러 가신다는 이야기를 엿들었습니다. 신은 따라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왕은 기뻐하며 이를 허락했다. … 괴유는 … 부여왕의 목을 베었다.”-「고구려본기」대무신왕 5년조 (서기 22년)
“濊亦朝鮮之地... ...其耆舊自謂與高麗同種,言語法俗大抵相類”-『통전(通典)』제1(卷第一) 변방(邊防) 동이(東夷) 편
[해석: 예 역시 조선의 땅이다. 그 노인이 스스로 일컫기를 고려와 동종이라, 언어와 법속이 대저 서로 비슷하다.]
라고 되어 있다.
“나이든 사람들은 스스로 고구려와 동족(同族)이라고 말하고 … .”-『후한서』예전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存時敎言祖王先王但敎取遠近舊民守墓洒掃吾慮舊民轉當羸劣若吾萬年之後安守墓者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令備洒掃言敎如此是以如敎令取韓穢二百廿家慮”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이 살아 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先祖) 왕들이 다만 원근(遠近)에 사는 구민(舊民)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북쪽은 고구려, 옥저와 접하여 있고, 남족은 진한과 접해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에 가서 끝이고 서로는 낙랑에 이르렀다. 본래 조선 땅이다. ...새벽이면 일어나 별의 움직임을 보고 농사일이 풍년이 들고 흉년이 들 것을 미리 점쳤다. 또 시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 때가 되면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었다. 이것을 ‘무천’이라고 했다. 또 사당을 지어 호랑이(虎)를 신으로 섬겨 이것에 제사를 지낸다(祭虎以爲神)"”
-『삼국지』위지 동이전(魏志東夷傳) 동예
[우리 겨레를 가리키는 명칭 중에 예족이 있다.
삼국지 한전에서 (삼한) 백제를 한예(韓穢) 라고 부르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고구려 왕이 "예족"의 군사들을 동원해 신라를 치는 구절이 나온다.
옥저는 국명이고 예족은 족명이다. 낙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나라에는 공통적으로 예족이 살고있었다.]이 내용은 관련 사료를 좀더 찾아보겠습니다.
2018.08.09 12:16
예맥(濊貊[쉬모 또는 휘모 : Hemo])이라는 말도
예(濊)는 한자로 쓰면 욕설이지만 그 발음이 의미하는 것은 '쇠' 즉 태양 또는 철(鐵)이며,
맥(貊)이라는 말은 (맑) 또는 (밝)으로 표현되었으며
"태양같이 밝게 빛나는(brightly shining)"이라는 뜻이며
한자로는 발(發), 맥(貊), 박(亳), 백(白), 불(不) 등으로 표현된 말입니다.
'밝다'의 방언 분포를 보면,
고어가 많이 살아있는 영남지역(경남북지역)에서는 [발따] 또는 [박다]로 주로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경남 하동, 합천 등의 지역에서는 [북따]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쥬신에게 있어서 태양(Sun), 밝음(bright), 붉음(red), 철(iron), 동쪽(East) 등은
하나의 범주로 파악되는데 이것을 한족들이 다양하게 묘사하면서
쥬신족의 분류가 혼란하게 된 것입니다.
[출처]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10) 태양의 아들, 부여 ① |작성자 kosskosa
2018.08.10 10:54
중국 사료에 기록된 예(濊)족
주나라, 한나라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역사 기록에 나타난다.
“成周之會……穢人前兒.” -『逸周書』王會篇
“[元朔元年 (BC 128)]秋……東夷薉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 -武帝本紀『』
“食貨彭吳穿穢貊•朝鮮, 置滄海郡, 則燕•齊之間靡然發動.” -『漢書』食貨志
“略濊州.”《索隱》濊州, 地名, 卽古濊貊國也.” -『史記』主父偃傳
“東接穢貉•朝鮮.” -『史記』匈奴列傳
“玄菟•樂浪, <武帝>時置, 皆朝鮮•濊貉•句驪蠻夷.” -『漢書』地理志
“明帝 永平二年(AD 59)……祀<光武皇帝>於明堂, 以配五帝. ……百蠻貢職, 烏桓•濊貊咸來助祭, 單于侍子•骨都侯亦皆陪位烏桓•濊貊咸來助祭” 등등. -『後漢書』明帝本紀
“濊貊, 夫餘國名. 或作‘獩[豸+頁]’.” -『廣韻』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因以其伯.” 陳氏《傳疏》: “追, 未聞. 疑追•貊卽穢•貉. 追, 穢聲相近.” -『詩經』大雅•韓奕
“其印文言‘濊王之印’, 國有故城名濊城, 蓋本濊貊之地, 而夫餘王其中”. -『三國志』魏書•東夷傳
“夫餘國, 在玄菟北千里. 南與高句驪,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地方二千里, 本濊地也.”-『後漢書』東夷傳•夫餘
부여국(夫餘國)이 본래 ‘濊’의 땅이라고 했으니 부여족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을 것이다.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因以其伯.” 注: “追•貊, 夷狄之國也. 王以韓侯之先, 國是百蠻而長之, 故賜之追•貉, 使爲之伯.” -『詩經』大雅•韓奕
“穢人前兒, 前兒若獮猴, 立行, 聲似小兒.”-『逸周書』王會篇
“(燕)北鄰烏桓•夫餘, 東綰穢貉•朝鮮, 眞番之利.”-『史記』貨殖列傳
“諸左方王將居東方, 直上谷, 以往者, 東接穢貉•朝鮮”, “漢使<楊信>於匈奴, 是時漢東拔穢貉•朝鮮以爲郡.”- -『史記』匈奴列傳 *흉노 모돈 선우시기
“北征匈奴……東定薉貉•朝鮮.”-『漢書』夏侯勝傳 *한무제 시기
“安帝 建元 원년 (AD 121)에는 穢貊과 鮮卑가 요동을 노략질하자 요동태수인 채풍(蔡諷)이 쫓아가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穢貊, 鮮卑 연합군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高句麗가 또한 馬韓 및 穢貊과 연합하여 현도성(玄菟城)을 포위하였는데, 夫餘王의 협조하에 州郡을 지켜내고 高句麗, 穢貊 연합군을 공격하여 무너트렸다 ”-『後漢書』安帝紀
‘桓帝때는 형주자사(荊州刺史)인 도상(度尙)이 永康 원년 (AD 167)에 우향후(右鄉侯)로 봉해지고 요동태수가 되어 “旬月之間薉貊寧輯” 하였다 <荊州刺史度尙碑>
“靈帝때에 이르러서는 환관 및 외척에 전권(專權)이 있는 바람에 정사(政事)의 부패가 변방까지 파급되었다. 이 때문에 建寧 원년 (AD 168) 12월, 鮮卑 및 穢貊이 거듭 유주(幽州)와 병주(幷州) 두 州를 노략질하였다.- -『後漢書』靈帝紀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戶二萬. 昔<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教以教之,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侯<準>僭號稱王. <陳勝>等起, 天下叛秦, 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 燕人<衛滿>, 魋結夷服, 復來王之. 漢<武帝>伐滅<朝鮮>, 分其地爲四郡. 自是之後, 胡•漢稍別. 無大君長, 自漢已來, 其官有侯邑君•三老, 統主下戶.” -『三國志』魏書•東夷傳•濊
“<濊>北與<高句驪>•<沃沮>, 南與<辰韓>接, 東窮大海, 西至<樂浪>. <濊>及<沃沮>•<句驪>, 本皆<朝鮮>之地也. 昔<武王>封<箕子>於<朝鮮>, <箕子>教以禮義田蠶, 又制八條之教. 其人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 飮食以籩豆. 其後四十餘世, 至朝鮮侯<準>, 自稱王. 漢初大亂, 燕•齊•趙人往避地者數萬口, 而燕人<衛滿>擊破<準>而自王<朝鮮>, 傳國至孫<右渠>. 元朔元年, 濊君<南閭>等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至元封三年, 滅<朝鮮>, 分置<樂浪>•<臨屯>•<玄菟>•<眞番>四郡. 至<昭帝>始元五年, 罷<臨屯>•<眞番>, 以幷<樂浪>•<玄菟>. <玄菟>復徙居<句驪>. 自<單單大領>已東, <沃沮>•<濊貊>悉屬<樂浪>. 後以境土廣遠, 復分領東七縣, 置<樂浪>東部都尉. 自內屬已後, 風俗稍薄, 法禁亦浸多, 至有六十餘條. 建武六年(AD 60), 省都尉官, 遂棄領東地, 悉封其渠帥爲縣侯, 皆歲時朝賀.” -『後漢書』東夷傳
예는 낙랑군 관할이 되었다가 나중에 낙랑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의 관할로 바뀌었다. 建武 6년 (AD 60)에는, “省都尉官” 된 후, 그 족속의 수령 즉 거사(渠帥) 모두가 “縣侯”로 봉해져 중앙정부하의 일급 지방관리로 바뀌여 해마다 “詣郡朝謁”함으로써 업무를 보고하였다. 현후(縣侯) 이하로 또한 읍군(邑君)과 삼로(三老) 등의 관리가 있어 현후를 보좌하여 “統主下戶”함으로써 평민을 관리하였다.
“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界, 不得妄相干涉. 同姓不昏. 多所忌諱, 疾病死亡, 輒捐棄舊宅, 更造新居. 知種麻, 養蠶, 作綿布. 曉候星宿, 豫知年歲豊約……又祠虎以爲神. 邑落有相侵犯者, 輒相罰, 責生口牛馬, 名之爲‘責禍’. 殺人者償死.” --『後漢書』東夷傳, 『三國志』魏書•東夷傳
한반도 북부 穢人들은 “東濊” 혹은 “不耐濊”로도 불려졌다. 穢人의 특산물로는 낙랑단궁(樂浪檀弓), 문표(文豹), 과하마(果下馬), 반어(班魚: 바다표범) (반어가죽) 등이 있다.
“其俗重山川, 山川各有部界, 不得妄相干涉. 同姓不昏. 多所忌諱, 疾病死亡, 輒捐棄舊宅, 更造新居. 知種麻, 養蠶, 作綿布. 曉候星宿, 豫知年歲豊約……又祠虎以爲神. 邑落有相侵犯者, 輒相罰, 責生口牛馬, 名之爲‘責禍’. 殺人者償死.” 《三國志•魏書•東夷傳》
북부 穢人의 특산물로는 낙랑단궁(樂浪檀弓), 문표(文豹), 과하마(果下馬), 반어(班魚: 바다표범) (반어가죽) 등이 있다. 단궁은 바로 박달나무로 만든 활로써 위력이 컸다. 문표는 아마도 얼룩무뉘가 있는 호랑이 가죽류가 아닐까한다. 과하마는《博物志•魏都賦》에 “果下馬高三尺, 乘之可于果樹下行, 故謂之‘果下’.”라고 하였다. 이것은 작은 말의 일종인데, 오늘날 우리나라에 이르러서는 특히 남방에서 아직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렇게 4가지 산물이 漢에서 魏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중원에 조공되었다.
아래에서 부분부분 발췌한 자료입니다.
[출처] 동북공정 - 예맥계 고민족의 발전 |작성자 역사산책
https://blog.naver.com/zhixin/40025746254[2006. 6. 27. 20:09 게시글]
『說文解字』의 '貉(맥)'
【卷九】【豸部】
北方豸穜。從豸各聲。孔子曰:“貉之爲言惡也。”莫白切
『說文解字注』
(貉) 北方貉。各本奪貉字。今補。此與西方羌從羊、北方狄從犬、南方蠻從蟲、東南閩越從蟲、東方夷從大、參合觀之。鄭司農雲。北方曰貉、曰狄。週禮大甸。獵祭表貉。注云。貉讀爲十百之百。豸穜也。從豸。長脊獸之穜也。故從豸。各聲。莫白切。古音在五部。下各切。俗作貊。孔子曰。貉之言貉貉惡也。七字一句。各本作貉之爲言惡也。今依尚書音義、五經文字正。尚書音義作貊貊。淺人所改耳。貉與惡韻。貉貉、惡皃。 ○貂貉二篆各本在犴篆之後。貆貍篆之前。今以蟲部之蠻閩、次於以蟲爲象之末。犬部之狄、次於犬末。羊部之羌、次於羊末。人部之僥、次於人末。大部夷字、次於大末。依類求之。移易次此。必有合乎古本矣。
북맥(北貉)--동북방의 맥을 지칭
『漢書』高帝紀上 “北貉, 燕人來致梟騎助漢 . 顏師古注:應劭曰 :「北貉, 國也. 梟, 健也.」 張晏曰 :「梟, 勇也, 若六博之梟也.」 師古曰 :「貉在東北方, 三韓之屬皆貉類也, 音莫客反.”
(BC203년)북맥, 연나라 사람들이 용맹한 기병을 보내와 한나라를 도왔다. 안사고 주에 응소가 말하길 "북맥은 나라이다. 효(梟)는 굳세다(健)는 의미이다", 장안이 말하길 "효는 용맹하다(勇)는 의미이니, 육박의 효와 같다.", 사고가 말하길 "맥은 동북방에 위치하며 삼한의 무리들이 모두 맥의 일종이다. 음은 막객의 반절이다."
* 여기서 한(漢)을 도운 북맥을 북부여로 해석하는 연구물도 있음.
趙襄子元年(BC457年)
趙襄子越過雁門關,北登夏屋山(今山陰縣南),會見其姐夫代王。宴會上,趙襄子暗中指使廚人用銅杓擊殺代王及其隨員,進而派兵吞併代國,疆域擴大到北貉邊境。(《史記·趙世家》)
“八年戊戌敎遣偏師觀帛愼土谷因便抄得莫斯羅城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自此以來朝貢論事”-호태왕비문중에서
8년 무술년에 편사(별동대)를 파견해 백신(帛愼)토곡(土谷)을 살피다가 기습하라 하교해 막사라성(莫斯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 남녀 3백여 명을 포획해오니 스스로 조공을 바치러 와서는 그 일에 대해 논의했다.
‘고구려사초략’에는 “영락 8년(398) 무술, 군사를 북맥(北貊)으로 보내 막사(莫斯)국과 가태(加太)국을 노략질하게 했더니, 남녀 300인이 소와 양으로 세공을 바치기로 약속했다”라고 기록돼있어 호태왕 비문에 기록된 帛愼·土谷이 바로 북맥임을 알 수 있다.
호맥(胡貉)---전국시대 북방각족을 지칭하는 용어
胡貉是戰國時人們對北方各族的泛稱 。分佈在今東北或蒙古大草原上者為東胡和匈奴,分佈在今內蒙古東部和河北、山西北部者為林胡、樓煩。
中文名胡貉 分 布遼寧境內 定 義戰國時人們對北方各族 特 徵畜牧為生,善騎射
胡貉是戰國時人們對北方各族的泛稱 。分佈在今東北或蒙古大草原上者為東胡和匈奴,分佈在今內蒙古東部和河北、山西北部者為林胡、樓煩。這些民族主要以畜牧為生,善騎射,是各族中武力最強者,中原各國受其威脅較大。戰國後期,燕將秦開襲破東胡,東胡卻地千里,燕乘勝而進,在邊境上修建長城,又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等郡。匈奴長期受東胡的控制,和中原國家的關係較少,?
貉人分佈於今遼寧境內,他們以漁獵和農耕為業。氐、羌族分佈於今西北,和秦鄰近者為大荔、義渠,築城數十,皆自稱王。秦於戰國早期滅大荔,和義渠相周旋時間最長,到公元前272年才滅義渠 ,並將所得到的土地建立了隴西 、北地郡。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맥국(貊國)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을 참고하면 맥국은 단군조선 와해 후 북방에서 점차적으로 이동하여 강원도 춘천을 중심으로 자리잡은 소국이다.
◼춘주(春州)는 예전의 우수주(牛首州)인데 옛날의 맥국(貊國)이다. 지금의 삭주(朔州)가 맥국이라고도 하고, 혹은 평양성이 맥국이라고도 했다.”- 『삼국유사』 「마한편」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고구려의 동남쪽, 예(濊)의 서쪽, 옛날 맥(貊)의 땅으로써, 대략 지금 신라 북쪽 삭주다”라고 써있다. 선덕왕 6년1년 (서기 637)에 우수주(牛首州)로 만들어 군주(軍主)를 두었고, 경덕왕이 삭주로 개칭했다. 지금의 춘주(春州)다.- 『삼국사기』 「잡지」
◼“맥(貉)은 동이(東夷)의 옛나라로 중국의 동북쪽에 있고, 연(燕)과 가까웠으므로 북맥(北貉)이라고 했다. 그 땅에서는 오곡이 나지 않고 오직 기장만 생산됐다. 부여와 고구려가 함께 일어나자 그 부락이 동으로 옮겨가 예국의 서쪽, 지금 춘천부에 살면서 고구려에 복속했다. 산이 깊고 험해 다투지 않는 지역이 됐다.”-『동사강목(東史綱目)』
◼“고구려의 남쪽에 조선ㆍ예맥이 있다. (중략) 소수맥(小水貊)이 있다. 고구려가 나라를 (소수맥이) 세울 때 큰 물을 의지하여 일어났는데, 서안평현 북쪽에 소수가 있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별종이 소수(小水)를 의지해 나라를 세웠기로 소수맥이라 한다. 좋은 활이 나오니, 소위 맥궁(貊弓)이라는 것이 이것이다.”-『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조
◼신라 유리이사금 17년(40년) 9월, 화려(華麗)와 불내(不耐) 두 현(縣)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해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 국경을 침범했다. 맥국(貊國)의 거수(渠帥)가 병사를 동원해 곡하(曲河) 서쪽에서 맞아 공격해 이들을 물리쳤다. 임금이 기뻐하여 맥국과 친교를 맺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유리 19년(42년) 8월, 맥국의 거수가 사냥을 해 새와 짐승을 잡아 바쳤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백제 책계왕 13년(298) 9월, 한(漢)나라가 맥인(貊人)들과 합세해 침범했다. 임금이 나가서 막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 강원도 춘천시 신북면 발산리 맥국터가 있고, 강원도 봉평 지역에서 맥국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太岐王)전설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