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30 06:18
한민족의 이칭(異稱)_서융(西戎)
『說文解字』의 해석에 따르면 ‘戎(융)’이란 ‘相’(돕다)‘을 말하는 것인데 그 파생된 뜻에서 변방민족을 뜻하는 서쪽 오랑캐가 되었다고 하였으며, ‘戎’은 크다는 것을 말하며, 방언에도 ‘戎’은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
『說文解字注』
(戎) 兵也。兵者、械也。月令。乃敎於田獵。以習五戎。注。五戎謂五兵。弓矢、殳、矛、戈、戟也。按周禮司兵掌五兵。鄭司農云。戈、殳、戟、酋矛、夷矛。後鄭云。此車之五兵也。步卒之五兵、則無夷矛而有弓矢。兵之引申爲車卒、步卒。故戎之引申亦爲卒旅。兵可相助。故引申之義、小雅丞也無戎傳曰戎、相也。又引申爲戎狄之戎。又民勞傳。戎、大也。方言。戎、大也。宋魯陳衞之閒語。又鄭詩箋云。戎猶女也。猶之云者、以戎汝雙聲而通之也。戎有讀若汝者、常武之詩是也。又有讀若輮者、常棣之詩是也。从戈甲。金部曰。鎧者、甲也。甲亦兵之類。故从戈甲會意。
‘戎’이란 ‘相’(돕다)‘을 말하는 것인데 그 파생된 뜻에서 변방민족을 뜻하는 서쪽 오랑캐가 되었다」하였으며, 또한 『시경.민로』의 모전에 이르길 「‘戎’은 크다는 것을 말한다」라 하였다. 방언에도 ‘戎’은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漢)이 그들을 기준으로 서방의 이(夷)를 가리켜 동이(東夷)·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 등으로 불렀다. 그 중에서 서융(西戎)에 해당하는 것은 귀방(鬼方)·험윤(獫狁) 등으로 불려 이미 상대(商代)·주초(周初)부터 나타났다. 그들은 감숙성([甘肅]에서 섬서(陝西)·산서(山西) 지방에 걸쳐 활약한 것으로 보이며, 이 지역에서 일어난 주(周)도 서융과 잦은 충돌이 있었고, BC 8세기에 서융의 일부인 견융(犬戎)으로 인해 서주(西周)가 멸망했다. 동주(東周)시대에 들어서도 그들의 활약은 계속되었으나 진(秦)나라의 세력에 눌려 차츰 쇠퇴하였다.
주선왕은 대비의 자손인 진중을 앞세워서 융족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선왕은 호경에 가까운 나라인 서융부터 치고자 했으나 서융 정벌시 진중은 죽었다. 서주말에 신후는 견융(犬戎)과 결탁하여 기원전 770년에 유왕은 전사하고 의구를 왕으로 세웠으니, 이이가 바로 평왕(平王)이다. 진(秦)나라는 주평왕(平王)이 동쪽 낙읍(洛邑)으로 천도하였을 때에는 이를 호위하였다. 진(秦)의 왕 목공(穆公)은 춘추오패의 일인으로, 백리해(百里奚), 건숙 등을 등용해서 국정을 정비하고, 동으로는 하서(河西)를 빼앗고 서로는 서융(西戎)을 쳐서 패자(覇者)가 되었다. 진(秦)나라도 서융의 한 갈래로 서융의 여러 국가들을 공격해 평정해 준패자가 된 것이다. 중국 진서(晉書) 서융(西戎) 토곡혼전(土谷渾傳), “남자는 통상복에 장군(長裙)을 입고 유모, 또는 멱리를 썼는데, 이 멱리가 서융 계통의 쓰개이다.”라고 하여 서융의 자취를 엿볼 수 있다.
‘견융’,‘서융’의 ‘융’이라는 명칭은 ‘융적’이라 하여 북방 및 서방의 이(夷)를 통틀어 칭하기도 하였다. 또 산서성 및 하북성 북부 일대에 거주했던 이(夷)를 산융(山戎)이라 불렀으며 춘추전국 시대에 연나라나 제나라와 잦은 충돌이 있었다.
서융은 한(漢)대에는 저(氐), 강(羌)을 지칭했으며, 당대에 이르러선 토번을 지칭하는 말로 변화되어갔다.
견융 (犬戎)은 서북변경(西北邊境)에서 활약한 서융(西戎)의 한 파로 견봉(犬封)·견이·곤이(昆夷)라고도 한다. 서융 중에서 주(周)나라 목왕(穆王)의 공격으로 태원(太原;山西省)으로 옮겨 간 것을 견융이라고 하였다. 『산해경』 「海內北經」에 “犬封國曰犬戎國. 狀如犬. 有一女子. 方跪進柸食. 有文馬. 縞身朱鬣. 目若黃金. 名曰吉量. 乘之壽千歲.”라는 기록에 의하면 ‘견융’이 ‘견봉’으로 불리어졌다.
‘곤이(昆夷)’라는 명칭은 맹자의 자료에 보인다. 맹자 양혜왕하의 제3장(第三章)을 보면 큰 나라와 작은 나라의 섬김에 대한 대화가 등장한다. “齊宣王이 問曰 交隣國이 有道乎잇가?”[제나라 선왕(宣王)이 물었다. “이웃나라와 사귐에 방도가 있습니까?”]
“孟子對曰 有하니 惟仁者라야 爲能以大事小하나니 是故로 湯事葛하시고 文王事昆夷하시니이다 惟智者라야 爲能以小事大하나니 故로 大(태) 王事하시고 句踐事吳하니이다”[맹자(孟子)께서 대답하였다. “있습니다. 오직 어진자(仁者)만이 대국(큰 나라)을 가지고 소국(작은 나라)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탕왕께서 갈(葛)나라를 섬기시고, 문왕이 곤이(昆夷)를 섬기신 것입니다. 오직 지혜로운 자만이 소국을 가지고 대국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왕(太王)께서 훈육(흉노)을 섬기시고, 구천이 오나라를 섬긴 것입니다.”]
후대 흉노족에 속했던 오손부는 최초 중국사료에서, “곤이 (昆夷)” “곤계 (昆戎)” “윤성 (允姓)”이라고 했다 하였으니 융족이 흉노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犬戎國. 春秋時夷國. 亦名 ?夷. 又名昆夷在今陝西鳳翔縣北. 漢書注引山海經. 黃帝生苗龍. 苗龍生融吾. 融吾生弄明. 弄明生白犬. 白犬有二牝牡. 是爲犬戎.”-『중국고금지명대사전』
견융국(犬戎이란 白犬의 대명사이다. 백견은 본래 氷夷라 했으며 馮夷 또는 河伯이라 한다)은 춘추 때의 이국(夷國)이다. 견이라고도 하며 곤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섬서성 봉상현 북쪽에 있었다. 한서에서 산해경을 인용해 이르기를, 황제는 묘룡을 낳았고, 묘룡은 융오를 낳았으며, 융오는 농명을 낳았다. 농명은 백견을 낳았는데, 백견의 무리들이 모여 견융국이 되었다.
제갈량이 저술한 제갈량집의 서융편에서는 그 특성과 공략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西戎第四十九
西戎之性,勇悍好利。或城居,或野處,米糧少,金貝多,故人勇戰,斗難敗。自磧石以西諸戎種繁,地廣形險,俗負強狠,故人多不臣。當候之以外寡,寡之以內亂,則可破矣。
서융의 습성은 용감하고 사나우면서 이익에 밝다. 혹은 성(城)에 거하고, 혹은 초야에 거한다. 곡식은 적으나 금패(금은보화)는 많다. 용감하게 싸우기에 쉽게 무너뜨리기 어렵다. 적석산(磧石山) 이서는 융(戎)종족이 번성하고, 땅은 넓고 지형은 험준하다. 강하고 사나운 힘을 자부하는 까닭에 쉽게 굴하지 않는다. 이웃 나라와 싸움이 벌어지거나 내란이 빚어질 때를 기다렸다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쳐들어가면 능히 격파할 수 있다.
2018.04.30 11:36
2018.05.29 06:11
『한단고기』의 서융(西戎)
“乙卯二十年 至是藍國頗强 與孤竹君 逐諸賊 南遷至俺瀆忽 居之近於殷境.
使黎巴達 頒兵進據邠岐 與其遺民 相結立國稱黎 與西戎 雜處於殷家諸侯之間 藍氏威勢甚盛 皇化遠及恒山以南之地.”-『한단고기』단군세기
(22세 색불루단군)재위 20년 을묘(B.C.1266)년, 이때에 남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모든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여 엄독홀(俺瀆忽)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邠·岐)땅으로 진격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黎)라 칭하셨다. 이들을 서융과 더불어 은나라 제후국들 안에 뒤섞여 살게 하셨다. 남씨의 위세가 매우 강성해지고, 임금의 덕화가 멀리 항산(恒山) 이남의 땅까지 미쳤다.
주(周)나라 때 융(戎)의 움직임
(주성왕(2대)은 소공을 태보에, 주공을 태사에 임명해, 동쪽의 회이(淮夷)를 정벌하고, 엄나라를 멸한 뒤, 그 군주를 박고 땅으로 옮겼다고 한다.)
주성왕(2대)과 주강왕(3대) 시기에 동이족(東夷族)[주나라 시대에 중원의 황하 하류 부근에서 사는 사람들]이 반역을 일으켰다. 주 강왕은 숙부 위강백, 태보인 소공석에게 명해, 군대를 이끌고 여러 길에서 나눠 진격했다. 그리고 그 반란을 평정하러 갔다. 그 전투로 동이족의 사기가 꺾여 다시는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는 위강백에게 북정을 명해 경양 부근에 이르렀다. 그리고 중국 서부의 유목민인 귀방족을 쳐서 5039명을 죽이고, 4명의 수령과 13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많은 양의 전차를 얻고, 전투용 말과 소와 양을 얻었다. 그리고 이 싸움에 공을 세운 대신들에게 활과 화살 그리고 상을 내렸다.
BC980년 4대 주소왕 16년, 동이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초나라를 정벌했으나 역시 소득이 없었다.
주목왕[재위BC976 ~ BC922]이 견융족을 정벌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공인 모보(謀父)가 내실을 다지자고 간했으나 주 목왕은 듣지 않았다.
주목왕 12년[3] 봄, 견융족 토벌에 나섰으나 이득을 얻지 못했다.
주이왕(夷王)[재위BC 885년~ BC878]은 여후의 조공을 받았으며, 기(紀)나라의 기양후(紀煬侯), 제나라의 제애공(齊哀公)을 모함해 죽이는 실정을 저질렀다. 견융족을 토벌해 1천 필의 말을 얻는 등 선전했다. [죽서기년]
BC823년 주선왕 6년 북방의 이민족인 험윤이 설쳤는데, 주 선왕은 병력을 거느리고 삭방에 성을 쌓아 험윤의 위협을 제거하려 했다.
BC816년 주선왕 13년, 주 선왕은 괵계자백(虢季子白)을 보내 험윤을 치게했다. 낙수 북안에 험윤을 이겨 500명을 죽이고, 50여명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괵계자백은 말, 활과 화살, 부월을 받아 이민족 토벌권을 받았다.
BC824년 주선왕 5년, 서융이 강성해져 서부 국경을 침략하자 주선왕은 진중(秦仲)을 대부로 임명해 서융을 토벌하게 했다.
(BC823년 주선왕 6년 윤길보에게 명해 회이를 정벌하게 했다. 그리하여 재물과 양식, 노비, 등을 얻었는데, 다시 회이들이 일어나자 주 선왕은 소 목공에게 정벌을 명해 포로와 재물, 가축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회이는 주나라에게 철저하게 굴복하였다.)
BC822년 주선왕 7년, 진중은 서융과 싸우다가 죽었다.
BC821년 진(秦) 장공 원년, 주선왕은 진 장공의 형제 5명을 주나라에 입조하게 했다. 그리고 7000명의 병사를 데리고 서융을 쳐서 격파했다. 이에 주 선왕은 진 장공을 서수 대부로 봉했다.그리고 견구 땅을 진 장공에게 내렸다.
BC805년 주선왕 24년, 진목후에 의해 조융을 정벌했다.
BC802년 주선왕 27년, 천무 땅에서 융족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BC797년 주선왕 32년, 태원에서 융족과 싸워 이기지 못했다.
BC792년 주선왕 37년, 조융과 분융과 싸워서 졌다.
(BC790년 주선왕 39년, 분수와 습수 부근에서 북적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BC789년 주선왕 40년, 신융 정벌에 나서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해 주군은 천무 전투에서 강융에게 패했다.
BC770년 주평왕 원년 견융족의 추격을 피해 낙읍으로 달아났다.
[ BC900년 즈음, 주(周) 효왕(孝王)은 고대의 정치가 고요(皋陶)의 후예(後裔)인 비자(非子)가 말(馬)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적을 올리자 그에게 선조의 영성(嬴姓)을 사성(賜姓)하고 진읍(秦邑) 땅을 봉지(封地)로 줌으로써 진(秦)나라가 시작되었다. 나라 이름 ‘진(秦)’은 이전부터 그의 선조(先祖)가 살아온 서수(西垂 :진읍秦邑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천수시天水市 청수현淸水縣)의 땅을 봉지(封地)로 받아서 그의 후손인 진족(秦族)들이 형성한 진읍(秦邑)이라는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BC 770년 주(周) 유왕(幽王)의 때, 견융(犬戎)이 주(周) 도읍인 호경(鎬京)에 쳐들어오자 진(秦)의 양공(襄公)은 주(周)를 구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가서 힘껏 싸워 주(周)왕실에 공을 세웠다. 이때 견융족(犬戎族)이 유왕(幽王)을 시해(弑害)하자 그의 아들 평왕(平王)은 견융(犬戎)의 위협에 도성을 동쪽의 낙읍(駱邑)으로 천도하는데 진(秦)양공(襄公)이 다시 군사를 동원하여 호위하였다. 이에 평왕(平王)이 그 공에 보답하기 위해 진(秦)양공(襄公)을 제후(諸侯)에 봉하고 주의 옛 땅인 기산(岐山) 서쪽 지역의 땅을 모두 진(秦)에 주었다. 이로써 진(秦)나라는 주(周)의 제후국(諸侯國) 반열에 올랐다. ]
BC722-BC637년까지 융은 두 번 주를 정벌하고, 정(鄭), 초(楚), 제(齊)를 공략하였다. 제나라는 융을 세 번 정벌에 나섰고, 노나라도 융을 토벌했다. 융의 활동 범위는 북으로 산서 서북에서 남으로 경수, 위수, 서로는 농서, 동으로는 하북, 산동 서부지역에 이를 정도로 넓었다.
BC352년 진나라가 위(魏)에 승리한 후 의거국을 공략한다.
BC331년 진이 의거국을 다시 공략하여 의거국의 성곽인 욱지(현 감숙성 경양 일대)와 오씨융국(烏氏戎國:현 감숙성 평량과 영하서 고원남부일대)을 점령하고 여기에 오씨현과 의거현을 둔다.
BC318년 위,조,초,연,한 다섯 나라가 진을 공격하나 실패하였고 이때 의거국왕은 진을 공격하여 승리한다.
BC314년 진이 다시 의거국을 공략하여 의거국 25개성을 점령한다.
BC272 진소양왕의 모인 선태후에 의해 의거국이 멸망한다.
(의거융)은 갑골문에 ‘귀방(鬼方)’으로 기록되고 『사기』에서는 ‘견융(犬戎)’으로 불려졌다
의거융=귀방=견융
BC722-BC637년까지 융은 두 번 주를 정벌하고, 정(鄭), 초(楚), 제(齊)를 공략하였다. 제나라는 융을 세 번 정벌에 나섰고, 노나라도 융을 토벌했다. 융의 활동 범위는 북으로 산서 서북에서 남으로 경수, 위수, 서로는 농서, 동으로는 하북, 산동 서부지역에 이를 정도로 넓었다.
(의거융)은 갑골문에 ‘귀방(鬼方)’으로 기록되고 『사기』에서는 ‘견융(犬戎)’으로 불려졌다
【의거융(義渠戎)은 갑골문시대부터,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귀방(鬼方)"이라고 기록했다. 바로 <<사기>>에서는 그들이 "견융(犬戎)"이라고 칭해졌다.
주선왕39년에서 40년까지, 주나라와 의거융의 전쟁은 주나라의 실패로 끝난다. 주나라는 오융(五戎)을 지금의 감숙 경양, 영하 고원일대에 안치시키고, 오융중 의거융은 주로 지금의 영하 육반산 일대에 남아서 거주한다.
의거융의 우두머리는 서주를 멸망시킨 후, 주왕조의 통치를 벗어났음을 선언하고, 정식으로 자신의 국가를 세운다. 이때부터, 중국역사상 정식으로 "의거국(義渠國)"이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의거국이 세워진 후 얼마되지 않아, 병사를 일으켜 사방으로 확장한다. 그 강역은 계속 확대된다. 국가의 경계선은 서쪽으로는 서해고초원에 달하고, 동으로는 농동에 달하며, 북으로는 영하, 하투를 지배하고, 남으로는 경수에 이른다. 면적은 약 10만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진나라는 기원전623년 병력을 일으켜, 천리의 땅을 늘이고, 서융을 쫓아낸다. 이것이 진나라의 그리고 전국시대 제후중의 첫번째 융의 땅에 대한 군사적인 도발이었다.
기원전430년, 의거국과 진나라의 전쟁이 최고조에 달한다. 의거국이 진나라를 공격했고, 군대가 위수에 이르렀다. 진나라는 할 수 없이 위하하류지역으로 이동한다. 진나라는 위(魏)나라에 승리한 후, 의거국의 내부에 변란이 일어난 것을 기화로 의거국을 공격한다. 의거국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기원전331년, 의거국에는 다시 내란이 일어난다. 진나라가 병사를 의거국의 중심지역까지 치고 들어간다. 오씨융국(烏氏戎國, 지금의 감숙성 평량과 영하성 고원남부일대)은 진나라군대에 멸망당한다. 의거국의 중요성곽인 욱지(지금의 감숙성 경양일대)도 진나라군대에 점령당한다. 진나라군은 점령한 두 곳에 대하여 상앙이 진나라경내의 현, 향, 리의 행정제도를 실시한다. 각각 오씨현과 의거현을 둔다.
기원전318년, 위, 조, 초, 연, 한의 5개국이 연맹을 결성하여 진나라를 공격한다. 진나라가 오국연합군을 격퇴한 후, 즉시 기원전 314년 의거국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고, 의거국의 25개 성 전부를 점령한다.
춘추전국시대에 기원전722년부터 기원전637년까지의 88년동안, 융은 두 번에나 주나라를 토벌했고, 정(鄭), 초(楚), 제(齊)를 각각 한번씩 토벌했다. 이리하여 제나라는 융을 세 번이나 토벌했고, 노나라도 융을 한번 토벌했다. 융의 활동범위는 북으로는 산서서북지역에서 남으로는 경수 위수까지 이르고 서로는 농서, 동으로는 하북, 산동서부지역에 이르렀다. 】
【】출처: 당영요(唐榮堯), ‘잊혀진 부족의 2천년 역사(1)에서 부분부분 발췌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2760
참고)
《죽서기년》“왕(은 무정)이 병사를 이끌고 귀방을 물리쳤다. 저(氐), 강(羌)이 손님으로 왔다”
《주역》“고종(무정)이 귀방을 정벌하는데 3년만에 물리쳤다.”
《국어》“강씨지융(姜氏之戎)”
《후한서》“서강의 근본은 삼묘(三苗)에서 나오니 강성(姜姓)의 별종이다.
신융(申戎)
【“至楚靈王會申, 亦來同盟。後越遷瑯琊, 遂陵暴諸夏, 侵滅小國”-《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
초령왕(楚靈王)에 이르러 신국(申國)과 회맹할 때 그들도 회맹에 참여하였다. 그뒤 월(越)이 낭야(瑯琊)로 옮겨가고, 마침내 제하(諸夏: 중국)를 능포(陵暴: 모욕을 주고 학대함)하고, 소국들을 침략하여 멸망시켰다.
《후한서사전(後漢書辭傳)》에서 신(申)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신(申)은 서주(徐周)의 봉국명이다. 강성(姜姓)이다. 백이(伯夷)의 후예로 전해 지고 있다.
그들의 초거지는 지금의 섬서(陝西)·산서(山西) 일대이다. 주선왕(周宣王) 때 그 일부가 동쪽으로 이동되었고, 사(謝)로 분봉되었는데 지금의 하남(河南) 남양(南陽) 북쪽이다. 신국(申國)으로 건국되었다. 춘추초에 초문왕(楚文王)에게 멸망되면서 그 곳에 신현(申縣)이 설치되었다.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에 "楚靈會申, 亦來豫盟"이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곳을 두고 하는 말이다.
원지에 남아 있는 일부는 이름하여 서신(西申), 일명 신융(申戎)이라고 하였고, 또 이름하여 강씨의 융(姜氏之戎)이라고도 하였다. 서주 말년에 일찍이 견융(犬戎)과 연합하여 주나라를 공격함과 동시에 주평왕(周平王)을 옹립하였다. 나중에 진(秦)나라에 멸망당했고, 그 족속들은 한민(漢民)에 융합되었다.(장순휘 주편, 《후한서사전(後漢書辭典)》, 산동교육출판사, 108쪽 참조) 】-【】출처:‘마단림의 《문헌통고》<사예고>동이총서’
http://cafe.daum.net/ko.art./otNC/428?q=%E9%99%BD%E5%A4%B7%ED%95%B4%EC%84%9D&re=1
2018.07.12 20:21
단군조선시대 이족의 분포
현재의 하남성 지역인 기주에 조이(鳥夷)-사기 정의에 실린 관지지에는 조선족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경에는 도이(島夷)라 기록되어 있는데 중국학자 임혜상이 “島夷或作鳥夷”라 할 정도로 동일하게 인식하고 있다.
산동성 지역인 청주에 우이(嵎夷), 래이(萊夷)-래이는 제나라에 멸망
안휘성, 강소성 지역인 서주에 회이(淮夷)-서언왕이 회이다.
안휘성, 강소성 남쪽인 양주에 도이(島夷)-사기 정의에 실린 괄지지에는 한반도(백제) 지역에서 이동해간 족으로 되어 있다.
감숙성 지역인 옹주에는 서융(西戎)-서융은 진한시대에는 흉노족으로 불리게 되는데 사기 흉노열전을 보면 서융족이 요순시대까지는 산융(山戎)으로 불리었다.
사기 집해에 서융을 융적(戎狄)으로도 기록하고 있는데 융적은 사기 흉노전에서 견이(畎夷)의 종족이다.
『한민족의 뿌리와 단군조선사』, 대원출판, 김영주, p189~199
2018.07.30 20:58
『說文解字』의 ‘戎(융)’
『說文解字注』
(戎) 兵也。兵者、械也。月令。乃敎於田獵。以習五戎。注。五戎謂五兵。弓矢、殳、矛、戈、戟也。按周禮司兵掌五兵。鄭司農云。戈、殳、戟、酋矛、夷矛。後鄭云。此車之五兵也。步卒之五兵、則無夷矛而有弓矢。兵之引申爲車卒、步卒。故戎之引申亦爲卒旅。兵可相助。故引申之義、小雅丞也無戎傳曰戎、相也。又引申爲戎狄之戎。又民勞傳。戎、大也。方言。戎、大也。宋魯陳衞之閒語。又鄭詩箋云。戎猶女也。猶之云者、以戎汝雙聲而通之也。戎有讀若汝者、常武之詩是也。又有讀若輮者、常棣之詩是也。从戈甲。金部曰。鎧者、甲也。甲亦兵之類。故从戈甲會意。
[해석:‘戎’은 병장기를 말한다. 『月令』에 「이에 사냥을 하면서 가르치게 하고는 그로써 다섯 가지 병장기의 용도를 익히게 하였다」하고 그 주석에 다섯 가지 병장기란 다섯가지 무기로 ‘弓矢(활과 화살)’、‘殳(곤봉)’、‘矛(일지창)’、‘戈(가지창)’、‘戟(미륵창)’등을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 생각건대 『주례』에서 병장기를 맡은 관리는 다섯 가지 병장기를 맡아 주관하다 하였는데 정사농이 말하기를 그것은 ‘戈(가지창)’、‘殳(곤봉)’、‘戟(미륵창)’、‘酋矛(장창)’、‘夷矛(평창)’이라 하였으며 후에 정시가 말하길 이는 수레전투에 사용되는 오병(五兵)이라고 하였다. 보병이 쓰는 병장기는 ‘夷矛평창’이 없는 대신 ‘弓矢(활과 화살)’가 있다. 병장기(兵)로부터 파생된 뜻에서 ‘수레전의 병졸’이 되었으며 그와 같이 병장기(戎)로부터 파생된 뜻 역시 ‘병졸’이 되었다. 군사와 병장기는 상호간에 보조 역할을 하기에 서로간에 의미의 응용이 가능하다. 『시경.소아』에 「그럴 때는 우릴 돕지 않는다네」라 하였는데, 그 모전에 이르길 「‘戎’이란 ‘相’(돕다)‘을 말하는 것인데 그 파생된 뜻에서 변방민족을 뜻하는 서쪽 오랑캐가 되었다」하였으며, 또한 『시경.민로』의 모전에 이르길 「‘戎’은 크다는 것을 말한다」라 하였다. 방언에도 ‘戎’은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송,노,진,위 등의 지방 사이의 말과 또 정씨의 시전에 이르길 「‘戎’은 ‘女’와 같다」고 하였는데 ‘같다고 하였다’는 것은 ‘戎’과 ‘汝’가 쌍성으로서 통한다는 것을 말한다. ‘戎’을 ‘汝’와 같이 해석하여 읽는 것은 『시경.소아』상무의 시가 바로 그것이며, 또한 ‘輮’와 같이 해석하여 읽는 것은 상체의 시가 바로 그것이다. ‘戈’와 ‘甲’에서 유래되었다. 金部에서 말하길 ‘鎧’란 갑옷이라 하였다. 갑옷 역시 병장기의 종류인 까닭에 ‘戈’와 ‘甲’의 글자를 합하고 그 뜻도 합하여 글자를 만든 것이다.]如融切。九部。、古文甲字。日部早篆下及此、小徐皆有此五字。大徐皆刪之。由古文甲、小篆甲所異甚微故也。漢隷書早字平頭、如小篆本平頭。古文乃出頭作?。轉寫旣久。惑不能別。於日部及此刪去五字。於甲篆則用出頭者爲小篆。別取汗所載異體爲古文。皆非也。今一一正之。
2018.08.05 16:13
융족 관련 가져온 자료입니다.
【이 글의 근본은 라동현선생의 <중국북방이족과 조선상고사>에서 발췌한것입니다.
춘추 초기인 진 헌공(晉 獻公) 때도(BC 677-651) 최북단 국경이 곽산(霍山)부근 이었고 汾水를 따라 河水와 만나는 지역의 동쪽과 심수(沁水)의 서쪽지역 즉 하수*분수*속수*회수로 둘러싸인 지역이 晉의 영역이었으므로 霍山의 북쪽은 韓侯의 땅이고 분습(汾濕)의 서쪽 땅인 포(浦)와 굴(屈) 부근에는 산융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국어 진어晉語>
이 무렵에도 삭방(朔方)은 황토지대인 경수와 낙수의 북쪽지대를 말하였으며 유(幽=幽州)는 서주시대엔 기(岐=岐邑)의 북쪽인 洛水 상류 북쪽에서 소여기(昭余祁)의 북방으로 조금 달라지고 있음을 본다.
BC 707 장 조을(將 祖乙)을 보내 곧바로 연(燕)의 도읍을 돌파하고 제(齊)나라 군사와 임치(臨淄-영구營丘) 남쪽의 교외에서 싸운 후 승리를 알려왔다 <단군세기>
釐(리)공 25년 北戎이 齊를 침공하자 정(鄭)나라에서 태자 홀(忽)을 보내 도와주었다. <사기 제태공세가>
山戎이 연나라(당시 태행 부근)를 넘어서 제나라를 쳤다. 제나라 희공은 나라의 교외에서 싸웠다. <사기 흉노전>
노 환공(魯 桓公) 6년(BC 707) 北戎이 齊를 공격하자 齊侯는 鄭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鄭太子 忽이 군대를 끌고 가 齊를 구원했다. 6 월에 北戎의 군대를 크게 쳐부수고 北戎의 장수인 대량(大良)과 소량(少良) 및 갑수(甲首) 300명을 잡아 齊에 바쳤다. <춘추좌전>
이 시기 전역상황이 우리 기록과 잘 맞아 떨어지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로서 [환단고기]의 진정성이 아주 잘 드러난다(하지만 몇 나라가 연합하여 겨우 대적하면서 포로 몇 명을 잡은 것을 마치 齊와 鄭의 연합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기록한 춘추필법을 부렸음을 이어지는 사료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에 여러 제후들이 北戎에 대항해 齊를 수비했기 때문에 齊에서는 구원하러온 제후들에게 가축과 곡식을 보내고 魯로 하여금 서열을 정하게 했는데 鄭은 뒤로 밀려났으며 태자인 忽은 전공이 있는데도 뒤로 밀려나 이를 분하게 여겼다. <춘추>
전공(戰功)에서 鄭나라가 밀린 것을 보면 실제 北戎과의 전쟁에서는 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고 모든 문헌에서 朝鮮을 北戎*山戎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임혜상은 <중국민족사>에서 진(秦) 이전엔 동방족을 山戎과 北戎으로 호칭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齊환공의 등장과 세력 강화]
1) 래국병합(萊國倂合
제 환공이 관중에게 공격의 순서를 물으니 관중이 계책을 내어 “萊가 齊의 창업주인 강태공 때부터 가장 걱정거리로 먼저 침이 마땅하고 또한 萊人은 용감하나 왕이 어리석어 힘으로 이기기보다는 꾀를 써야 망치기 쉽다” 하며 황금으로 萊의 곡식과 나무를 샀는데 萊王이 깨닫지 못하고 “황금은 나라의 보배이거늘 齊나라의 군신들이 이같이 함부로 쓴다” 하고 백성들을 모아 나무를 베고 곡식을 모아 팔았다. 얼마 안 되어 萊人들이 먹을 곡식과 땔나무가 없어 齊에게 다시 사려 한즉 갑자기 수출을 금지시킨 후 궁핍해지자 군사를 발해 멸하였다.
▶래국(萊國)이 신하인 자맹(子猛)의 말을 듣지 않자 齊가 이를 병합해 버렸다<설원說苑 정련正諫편>
▶齊 간공簡公(BC 485-481)이 여자들과 함께 단대(檀臺)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사기 제태공세가>란 사실은 이미 래이(萊夷)가 齊나라에 합병되었음을 의미한다.
2) 연합군의 결성
▶단제는 병력을 보내 須臾(하북성과 산서성 사이의 부족)의 군대와 함께 燕을 정벌케 하니 燕이 齊에 위급함을 알려 齊가 대거 孤竹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 대패하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화해를 구걸하고 물러갔다. <단군세기>
▶齊 桓公23년 山戎이 燕을 정벌하자 燕은 齊에 위급함을 알려왔다 桓公은 燕을 구하기 위해 마침내 山戎을 쳐서 孤竹에 이른 다음 돌아왔다. <사기 제태공세가>
▶44년 뒤 산융이 연을 치자 연은 제에 위급함을 알려왔다 환공이 북쪽으로 산융을 치자 산융은 도망했다. <사기 흉노전>
▶제 환공이 장차 산융과 고죽을 치면서 사람을 시켜 魯에 도움을 청했다 이에 노왕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 놓고 대책을 논의했는데 신하들이 말하길 “군대가 수천리를 가서 蠻夷땅에 들어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자 왕은 말로만 도와준다 하고서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설원說苑 권모權謨편>
▶魯 莊公 30년 겨울에 제와 노가 만나 산융을 칠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산융이 연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춘추 좌전>
※ 여기에서 <위략>은 산융*북융의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솔직하게 조선이라고 기록해 후에 그 자료가 멸실되어 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방족은 중국 북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한때 서쪽의 양揚*거拒*천泉과 함께 東周의 서울인 낙양에까지 침입했는데 그 주력은 조양*상곡*우북평 지방의 구려맥계 번조선(番朝鮮)으로 태행산에 있는 당산(唐山)지방의 고죽국 및 동쪽의 영지국과 연합해 남쪽의 齊와 魯를 위협하였다. 아울러 태원의 산융은 지속적으로 燕을 공격했는데 1차(bc 7c)는 燕을 치고 齊까지 진격해 제교(齊郊-제외곽인 변방지역)에서 싸우다가 물러섰고 44년 후 2차로 燕을 멸하기로 작정하고 공격하다 제환공의 진하연합군이 오자 물러간다.
▶1차전 때 조선의 명을 받아 산융이 연을 멸하니 고조선이 중간의 연을 거치지 않고 직접 제환공과 무역을 했다 (이때 조선의 국호가 처음 나오게 됨) <관자>
3) 진하연합군(趙*齊*衛*許*魯 등)의 북방 진격
제 환공이 북벌한 山戎은 북적北戎=견이畎夷=구려맥句麗貊으로 분수汾水*심수沁水 지역에 있었고 이곳이 당시의 遼東이며 <설원*관자>에 요수를 건넜다 한 요수가 태행산맥의 요수를 말하는데(춘추시대엔 遼水가 太行의 遼지방에 있었음) 이 시대의 북쪽 개념은 산서성과 태행산맥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晉나라 부근에 적狄*적翟*호胡*맥貉*도하屠何가 있고 이들은 맥국(貊國)에 속했으며 또한 북쪽에 산융*영지*고죽이 있었는데 이들도 예맥이다. <설원*관자*국어>
<관자>에 보면 영지(令支)의 아래에 부산(鳧山)이 있고 부근에 고죽(孤竹)이 있으며 제수(齊水)와 河水가 만나는 곳인 태행산맥의 남쪽 끝에 진(晉)의 석침현(石沈縣)이 있는바 제 환공은 이곳에서 太行과 비이(卑耳)를 넘었다 했으니 孤竹과 遼水가 태행산맥에 속하며 卑耳계곡과 접한 곳엔 맥(貊)족이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비이에 강이 있는데 요수이며 비이산과 비이계곡이 있다. <설원*관자>
孤竹을 벌하기 전에 건넌 강이 遼水이고 遼는 太行의 중간에 위치한 곳으로 동쪽에 세이천(洗耳泉-허유가 귀를 씻은 곳으로 卑耳?)이 있는데 齊水와 河水가 만나는 곳의 북쪽으로서 이곳 부근에 로潞*여黎*요遼란 지명이 있음은 물론 遼에서 太行쪽이 동쪽이 되어 지명이 요양遼陽=요양轑陽 이니 遼東과 같아 여길 흐르는 강이 遼水이다. 바로 이때 <요>가 태행의 중부에 있으며 晉의 북쪽이 되므로 이곳에 살던 부족이 孤竹이고 遼의 북쪽과 남서쪽에 山戎이 거주함이 들어맞게 된다.
또한 무종(無終)이 bc 542년 晉나라와 太原에서 싸웠는데 무종은 중산(中山)으로 만일 난하에 있었다면 2000리를 달려온 것이 된다. 사실 태행산맥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산맥을 넘어 쉽게 태원까지 침략한 것으로 결국 태행 서쪽의 遼와 동쪽의 中山이 遼東이고 이 지역에 산융과 영지와 고죽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晉의 분수 서쪽인 태원의 아래쪽에 이굴(二屈)이 살고 있다. <국어>
▶bc 569 위강이 5가지의 이점을 말하며 晉과 무종(적*융*산융*적적) 과의 화친을 역설하였다. 그 중에서 晉이 무종의 세력을 얻음으로서 중국의 제후를 호령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고 하였다. <춘추좌전>
▶중산의 사람 中人은 종인(終人)을 말한다. <회남자 도응훈道應訓>
이지離支=영지令支는 태행의 북쪽에 위치한 대(代)의 부근에 있었는데 代는 춘추 시 晉의 북쪽인 구주(句注) 즉 항산(恒山)아래 태원 위쪽인 호타수 상류에 있었으며 전국 땐 역수(易水) 상류 즉 상산(常山)의 북쪽에서 항산(恒山)에 걸쳐 거주지를 이동하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따라서 齊 환공의 북벌 경로는 晉의 북쪽과 태행산맥 줄기를 따라 행해졌으며 그곳에 산융*영지*고죽이 있었는데 환공21년(bc664-663)엔 산융만 벌했을 뿐이고 bc 661-656 사이에 영지와 고죽 순으로 북벌을 해 bc 650년에 완료되었으나 다만 일시적이었다.
▶노 장공과 제환공이 겨울에 만나 산융이 연을 침범하므로 이를 벌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한 후 그 해 겨울에 산융을 공격해 벌하고 다음해 봄에 노획품을 노 장공에게 갖다 주었다. <춘추좌전>
왜냐하면 제 환공 23년(662)에 산융이 다시 燕과 형(邢)과 위(魏)을 치고 있는데 이 때 형과 위는 조성(趙城)의 북쪽에 있으므로 연(燕)도 계(薊)가 아닌 조성(趙城)에 있던 남연(南燕)을 친 것이다.
▶狄人이 형나라를 치니 관경중(管敬仲)이 제 환공에게 말해 형을 구했다. <춘추좌전> -여기에서 “구했다”는 말은 이미 망한 형(邢)을 齊 땅인 이의(夷儀)로 옮긴 것을 말함
2차 산융의 침입시 구원군으로 燕에 간 환공(이름:無知)은 산융이 물러서자 여세를 몰아 고죽국을 침입했으나 비이곡에서 매복해 기다리고 있는 조선계의 군세가 자못 흉험함에 놀라 一矢도 쏘지 못하고 황급히 퇴각해 놀란 환공이 정신을 가다듬고 4년을 군비축적에 힘쓴 후 고죽국을 침공해 비로소 멸하였다(사기 흉노열전). 허나 이때부터 번조선의 복수전에 내내 시달림을 받는다.
환공 7년에 산융이 다시 燕을 공격하자 이를 격퇴한 후 환공 10-11년 사이에 북진을 감행하여 산융과 영지를 격파(관자 권8 王言 제21)하였지만 단군조선의 원군이 도착해 대패한 후 본래 지역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이렇듯 桓公의 진하연합군(秦夏聯合軍)은 초기의 승세를 굳히지 못하면서 역공(逆攻)의 전술에 걸려 전세가 불리해지자 魯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때 魯에서는 도와준다고 약속하고 군대를 보내지 않자 할 수없이 화해를 구걸하며 물러갈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보여준다. 귀로(歸路)에 약속을 지키지 않은 魯를 치려고 했으나 관중(管仲)이 말리는 바람에 분풀이를 하지 못하였으며 결국 전쟁이 끝난 후 아직은 勢의 약함을 절감하면서 연을 회복시키는 걸로 위안을 삼고 계속 응징을 받지 않으려면 燕의 시조 소공(召公)이 했던 것처럼 다시 올바른 정치를 펴고 초기의 심정으로 다시 周왕실을 존중하라는 충고를 하였다.
▶옛 召公의 덕정을 다시 바로잡고 옛 周나라 成王과 康王때와 같이 周 왕실에 공물을 바칠 것을 명하였다 제후들이 이를 듣고 모두 제나라를 따랐다. <사기 제태공세가>
▶燕나라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天子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했는데 그 조공품이 成周때와 같았다 그리고 연 장공에게 召公의 법도를 다시 세우고 잘 따르도록 했다. <연 소공세가>
아무튼 제 환공이 산융을 벌하고 할연(割燕=복연復燕)을 했는데(bc 650) 韓侯가 멸한 北燕과 산융이 멸한 南燕을 합친 후 召公의 옛 직(職)을 잇게 한 것이다. 당초 소공을 봉한 北燕의 땅인 태원 아래쪽의 소여기(昭余祁)를 일시 탈환해 주었으며 그 후 춘추 말과 전국시대를 맞이해 진(조양자趙襄子)의 북방정책 추진과 조(무령왕)의 북진정책으로 밀려 동천(東遷)하기에 이르렀다.
후대에 이르러 연 문후(燕 文侯) 때의 강역은 趙와 晉의 북방에 있으므로 호타하와 易水의 하류가 아닌 상류 즉 恒山의 동쪽에 있던 易水의 상류와 서쪽에 있는 호타하의 상류지역으로 이때 燕의 서쪽은 운중과 안문이 되고 북쪽에 임호와 누번이 있는 태행산맥 북의 구주부근과 현 대동시 주변에 자리함
산해경 북산경 북차삼경은 태행산맥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의 산과 여기서 발원해 나가는 강들을 설명하고 있는데 시작은 洛邑 위쪽의 河水 즉 서쪽은 왕옥산에서 동쪽은 맹문에서 시작해 태행산맥 북쪽인 안문산(서쪽)과 갈석산(동쪽)에서 끝난다 그러므로 산해경은 갈석산을 태행의 북단으로 인식하고 이것은 <사기 소진열전>의 “남쪽으로 안문과 갈석의 풍요함을 차지한다”는 말과 일치하며 燕山과 燕水가 있는데 북차삼경의 40번째 산이고 경산과 청장수 다음에 기록되고 있으므로 이 부근이 태행산맥을 따라 춘추 때 중북부에 있던 遼지방 부근이고 태원부근(晉陽)이며 태행의 서쪽 측면이 되어 초기 燕의 위치임이 명백하다.
BC 661년부터 제 환공의 북벌에 대한 대대적인 동방부족의 역습이 시작되었는데 魯 민공 2년(bc 661)에 狄人이 위(衛)를 형택(熒澤)에서 괴멸시키자 제*송*노가 성을 초구(楚丘)에 서둘러 쌓은 다음 衛의 도읍을 옮기게 하였다. 이 시기에 燕은 이미 멸망한 상태였으며 魯 희공10년(bc 650) 狄人이 온(溫)을 멸하고 그 해 齊와 허(許)가 북융(北戎)을 치다가 이득이 없자 희공 11년에 관이오(管夷吾)를 융(戎)에 보내 화평을 청하고 있다(적=북융=융) 이어 노 희공 13년(bc647)에 초구(楚丘)에 있던 衛 공격*14년 정(鄭) 공격*15년 晉이 분수 남쪽 곤도(昆都)에서 참패를 당하기에 이른다.
20년 후(bc 636년 경) 융적(戎翟)이 낙읍(洛邑)의 주 양왕(周 襄王)을 공격하자 정(鄭)의 범읍(氾邑)으로 도망한 후 진(晋)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세가 강해 병을 발하지 못하고 육혼(陸渾)까지 내어주다가(단군조선은 이를 자대子帶에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14년 만에 BC 622년에 진 문공(晋 文公)의 도움으로 탈환해(한서 흉노전 939P) 환도하였다. 이때 진(秦)이 강성해져 목공(穆公)이 서융8국(西戎8國)을 지배하니(한서 흉노전 939P) 드디어 BC 623년 서방백(西方伯)으로 올라섰으며(십팔사략 166P) 이 무렵 기산岐山*양산梁山*경수涇水*칠수漆水의 북쪽에 의거義渠*대협大劦*오씨烏씨*구연朐衍의 융(戎) 과 晋의 북쪽에 임호와 누번 그리고 燕의 북쪽에 산융이 있었고 100년 후(BC 599) 견디지 못한 진 도공(晋 悼公)이 위강(魏絳)을 통해 戎狄과 화의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한서 흉노전 939P)】
【】은 ‘http://blog.daum.net/gusan0579/8009097’에서 가져온 자료입니다.
2018.09.08 08:37
서융의 뿌리는 서이이며, 견이로 보는게 맞는거 같습니다.
2019.04.09 05:39
주나라 문왕은 서이(西夷)이다.
주나라의 뿌리는 「시경」의 대아(大雅)편 면(絲+帛)에 잘 소개 되어있다. 이 기록은 지나족이 자신들의 뿌리로 삼고 있는 주 왕실의 뿌리 문왕의 시조 고공단보(古公亶父)가 바로 동이족인 신농씨의 강(姜)씨 처녀와 결혼해 자손을 번창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공단보께서 어느아침 말을 달려 기산 밑에 이르러 강녀와 함께 살림을 차렸다(古公亶父 來朝走馬... 至于岐下 爰及姜女 聿來胥宇)" 또한 "맹자는 문왕은 기주(岐周)에서 나서 필영(畢 )에서 죽었으니 서이(西夷)의 사람"이라 했다
‘곤이(昆夷)’의 ‘昆’은 ‘昆[kūn]’으로 ‘형’,‘자손’,‘많다’의 의미로 쓰인다. 그 뜻으로 보아 ‘맏이’, ‘우두머리’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곤산(昆山)은 고대의 산 이름으로 옥의 산지로 유명하다. 지금의 섬서성 동쪽의 곤이(昆夷)의 땅이라는 설과 옥의 산출지로 유명한 란전(蘭田)이라는 설 두 가지가 있다. 란전에는 여융(驪戎)이 살았는데 여융은 곧 견융 혹은 곤융(昆戎)으로 그 산을 곤산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곤산은 곤륜산(崑崙山)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