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29 07:23
한민족의 이칭(異稱)_북적(北狄)
한문 사전에 의하면 북적의 ‘狄’은 금문에서 ‘犬’과 ‘大’로 구성되었으나, 이후 ‘大’가 ‘火’로 바뀌어 지금처럼 되었다. 원래는 ‘적적(赤狄)’이라는 큰 개를 말했으나, 이후 개를 키우며 사는 북방 이민족을 지칭했으며, 또 빠른 속도로 오고 감을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자료에서는 ‘狄’을 “화”공(불을 이용한 공격) 및 사냥개(田犬)를 통해 사냥하는 것에 뛰어난 민족이라고 풀이한다. 고대에는 사냥개를 전견(田犬)이라고 불렀다. 전견을 이용한 사냥 방법에는 화전이 있다. 화전(火田)은 화공을 통해 동물을 사냥하는 방식으로 도망갈 수 있는 입구를 하나 남겨두고 불로 사냥감의 서식지를 전면을 둘러싸고 입구에 매복해서 사냥개로 사냥감을 포획하는 것이다. 한자 중에서 ‘狄’( 오랑캐 적)과 ‘狩’(사냥할 수)는 이런 사냥 풍습을 엿볼 수 있다.
북적(北狄)은 역사적으로는 만리장성 너머의 중국 북부, 몽골에 사는 흉노(匈奴), 선비(鮮卑), 거란(契丹), 몽골(蒙古) 등의 비한족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로 주로 사용되었다.
춘추 전국시대의 적족狄族 혹은 북적(北狄)은 적적(赤狄), 백적(白狄), 장적(長狄) 등, 여러 집단으로 나뉘었다. 이 집단은 다시 여러개의 부족으로 나뉜다.
성씨에 따라 항(姮)씨 성의 백적(白狄), 외씨 성의 적족(赤狄), 이씨 성의 장적(長狄)이라는 3대 갈래로 나뉜다.
전국시기에 이르러 북방민족은 북적 외에도 삼호(三胡)라고 일컬어지는 임호, 누번, 동호(林胡, 樓煩, 東胡)가 있었다.
춘추 후기에 중산국이 세워지는데 항씨 성의 백적(白狄)이 세운 국가이다. 처음에는 선우라고 부르다가 후에 중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BC 6세기 중엽에는 그 세력이 지금의 하북성 북부와 섬서성의 대부분 지역에 미쳤다. BC 406년 중산국은 한때 위나라의 침략을 받아 속국이 되기도 했다. 중산국은 BC296년 조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백적은 주로 섬서성 북부 및 산서성 중북부에 분포하였는데 일찍이 秦, 晉 두 나라와 광범위한 정치 및 외교 관계를 맺었다. 특히 진晉은 일찍이 백적과 통혼하였다. 유명한 진 문공 중이도 바로 백적 혈통을 갖고 있었다.
백적은 진이 시행한 계토 정책으로 말미암아 백적의 토지는 점진적으로 진에게 점령당하였고 선우鮮虞, 비肥 고鼓 등의 종족은 차례로 동쪽으로 이동하여 하북 지역까지 이르게 되었다. 선우는 부단히 주변의 국가들과 전쟁을 일으켰으며 춘추 후기에 중산국을 세웠다.
장적(長狄)은 주로 산서성 동남부와 하북성이 만나는 태행산 지역에 거주하였다. 춘추 시기에 장적(長狄)은 노, 제, 진 등과 여러 차례 전쟁을 일으켰으며 결국은 진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임호는 지금의 내몽고 하투 지역에 살고 있었고 누번은 지금의 산서성 북부에 살았다.
제나라 환공은 제후들을 이끌고 적狄을 토벌하였으나 선우 지역까지 이르지 못했다. 선우는 진나라의 적인들과 하나로 연합하여 막강한 국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6세기 중엽에는 그 세력이 지금의 하북성 북부와 산서성 대부분 지역에 미쳤다.
은대(殷代)에 귀방(鬼方)을 북적 계열로 보기도 한다. 북적은 주로 BC 8세기에서 BC 5세기 춘추시대 산시(陝西)에서 산시(山西])지방에 걸쳐 활약을 한 것으로 사료에 나타난다. 춘추시대 초에는 위(衛)나라가 북적에 의해 멸망하여,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 북적을 토벌하고 초구(楚丘)에 위나라를 재건하기도 하였다.
제갈량이 저술한 제갈량집의 북적편에서는 그들의 특성과 함께 한족과 북쪽의 기마 민족의 차이를 통해 이들과 싸우지 말 것을 강조하면서 그 이유 세 가지를 언급했다.
▫北狄居無城郭隨逐水草勢利則南侵勢失則北遁。북적은 성곽을 쌓아서 거주하지 않고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하며, 세력이 강하게 되면 남쪽을 침공하고 세력이 약해지면 북으로 잠적한다.
▫長山廣磧足以自衛飢則捕獸飲乳寒則寢皮服裘奔走射獵以殺為務未可以道德懷之未可以兵戎服之。길게 뻗어있는 산맥과 거대한 사막 지대는, 그들을 지키는 자연의 요새로, 배가 고프면 짐승을 포획해 젖을 짜서 마시며, 추위가 오면 가죽을 깔고 잔다. 가죽 옷을 걸치고 수렵과 전투로 나날을 보내기에 도덕으로 교화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무력으로 토벌하는 것도 어렵다.
▫漢不與戰其略有三。한의 군대로 그들과 싸우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셋이다.
▫漢卒且耕且戰故疲而怯虜但牧獵故逸而勇。以疲敵逸以怯敵勇不相當也此不可戰一也。
한의 병사는 농사와 전투를 모두 하니 지치기 쉽고 투지가 없지만, 북적은 목축과 수렵을 하면서 유유자적하고 투지가 높다. 투지가 없는 한나라 사람들로 투지가 높은 북적들과 싸우려고 하니 당해낼 수 없다. 이것이 싸울 수 없는 첫째 이유다.
▫漢長於步日馳百里虜長於騎日乃倍之。漢逐虜則齎糧負甲而隨之虜逐漢則驅疾騎而運之。運負之勢已殊走逐之形不等此不可戰二也。한은 걷는 걸 잘해서 하루에 백 리 밖에 못 가지만 북쪽 오랑캐(虜)는 말타기를 잘하니 이에 하루에 (백 리의) 갑절이나 거리를 달린다. 한나라가 오랑캐를 쫓을 때는 양식을 가지고 갑옷을 입고서(싣고) 따라가고, 오랑캐가 한나라를 쫓을 때에는 빠른 말을 몰아 움직인다. 말에 싣는 것(運)과 등에 지는 것(負)은 우열이 이미 현저하고, 달리는 것(走)과 말을 타고 쫓는 것(逐)은 그 형태가 다르다. 이것이 싸울 수 없는 둘째 이유다.
▫漢戰多步虜戰多騎爭地形之勢則騎疾於步遲疾勢懸此不可戰三也。不得已則莫若守邊。한의 전사는 보병이 많고 북적은 기병이 많은데, 유리한 지형을 쟁탈함에 있어서 기병은 보병보다 훨씬 빠르고 속도 차이는 현저하다. 이것이 공격할 수 없는 셋째 이유다. (이렇게 공격할 수 없으니) 부득이 변방을 굳게 지킬 수 밖에 없다.
▫守邊之道揀良將而任之訓銳士而禦之廣營田而實之設烽堠而待之候其虛而乘之因其衰而取之。지키는 법은 다음과 같다. 좋은 장수를 선발해 임하게 하고 정예 병사를 훈련해 막도록 한다. 병영을 넓혀 견실하게 하고, 봉화대를 설치해 대기한다. 적의 허점을 기다려 그에 편승하고, 적이 쇠약해지고 기세가 쇠하면 그를 취하는 것이다.
▫所謂;資不費而寇自除矣人不疲而虜自寬矣。이른바 자원을 낭비하지 않으면서도 도둑이 스스로 없어지는 것이요, 우리가 피곤하지 않으면서도 오랑캐는 스스로 해이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2018.05.02 06:35
2018.07.29 08:11
노사 권24 국명기(國名紀) 황제후 희성국(黃帝後 姬姓國) 노사(路史)
黃帝後姬姓國
卞:卞明國。湯伐有卞隨,或云。“即弁。以《説文》、《字林》大小篆無卞。“非也。(卞和卞莊子自為姓。《尚書》率循太卞與弁不同。)今泗水縣有卞故城。漢屬魯國。(季武子以自封。姜氏。㑹齊侯處。)
蠻人:龍苗之裔,今湖南北,桂林等處皆是,辰、灃、沅、湘之間尤盛。
張:揮之封。然黃帝臣自有張若,故河東解有張陽城,漢之東張,今邢之任縣是。(通典云:漢張縣地。)《紀年》:“齊師逐鄭太子齒,奔城張陽,南鄭是也。
采:紀姓。夷彭子故左人地。今中山之北平。王符以采,任姓,非。
北狄(북적):始均之裔。
郮:《潛夫論》“詹、資、郮、翟黃帝後”。故《玉篇》云:“資、郮故國,黃帝後,封在岐山之陽。”
翟(적):北地,古翟國,後徙西河,盟㑹圖云:“今慈州。”(地道記伐衞懿公者賈逵云:處北地後。為晉所滅。此春秋時隗姓。翟。炎帝後非此也。)
詹:周有詹父,(莊公十八年傳。)詹桓伯,(昭公九年。)圻内地,與楚詹尹異。
葛:《郡國志》“高陽有葛城。”今鄭西北有葛鄉城,一名依城,漢高陽地。然葛鄉故葛城,乃在寜陵北十五、郾城北三十周四里,去亳城百里,即葛伯國。(説文南陽陰鄉郾城。許寜國本屬應天今拱應邵杜佑樂史等並云;古葛伯國都。)非嬴姓之葛。(詳少昊後。)
狂犬:黄帝後。任姓,分見《潛夫論》。葪也。中絶,武王復繼之,《記》皆為祝。祝,堯後。(詳後)。
披傳記,見蠻夷之種,多帝者之苗矣。若巴人之出于伏戯;玄、氐、羌、九州戎之出于炎帝;諸蠻、髦民、黨項、安息之出黄帝;白民、防風、驩兠、三鱙(miáo)之出帝鴻;淮夷、允戎、鳩幕、羣舒之出少昊;昆吾、滇濮、甌閩、駱越之出高陽;東胡、儋人、暴輿、吐渾之出高辛;兇奴、突厥、没鹿、無餘之出夏后,曰是固有矣。縉雲之子,黄帝之孫,其始不肖,以至不才,幾何而不胥,為夷也?遼東存箕子之伷,大夏有李陵之苗,信矣。然元魏自以出于蒼林,慕容自以出于越,赫連自以出于伯禹,而禄山亦謂安息,出於昌意之子安,是果信邪?余常言之夷蠻之醜,雖有盛彊,苟非先王之後者,皆不足以得志中國。彼之所傳,亦必有所本矣。且時聞之春秋用夏變夷者,夷之夷而進於中國;則中國之;彼以是心至斯受之矣。不然,則求之四夷而從鳳嬉,何陋之有。(逸《論語》云:子欲居九夷從鳯嬉。)
...
洛:周書之有洛氏,史伯云:“北有路洛泉,徐蒲韋昭云:”皆赤狄。“宜與此異。或作絡、雒。(衞賢者絡疑。雒。)廣漢屬縣。
葪:縣,今范陽治地,多葪。《水經注》:“葪城西北隅葪丘為名。“《班志》云:”葪,故燕國名。(非今葪城南北九里東西十里慕容雋造。)
泉:洛陽西五十。故伊闗縣北有泉亭,周世狄居之,俗呼前亭。(伊拒泉皋是也。昭二十二年有前城。)
遇:禺也。宜即畨禺。魯襄公救成至遇,(十五年)。魯邑近成,然非必禺。(成在泰山鉅平南。)王符作卑過,訛。
儋:《山海經》:“儋人。任姓。”今儋州。(周有儋翩。)
牛黎:經云:“牛黎之國,儋人之子儋令,有黎姥山。
畨禺:賁隅也,今清海之屬縣,有禺山,《傳》云:“禺號南海“,故予謂此即禺。經文有”無腸繼無
2018.07.30 11:19
장적(長翟)
-우(虞), 하(夏), 상(商) 때 왕망(汪罔)씨라, 주(周) 때에는 장적(長翟), 노나라 때는 대인(大人)-
“郝懿行云 「晉語(國語 晉語 四——珂) ‘司空季子說 黃帝之子十二姓中有 僖姓,僖、 釐古字 通用, 釐即僖也’。 史記孔子世家云 ‘汪罔氏之君,守封禺之山, 為釐姓’。 索隱云 ‘釐音僖 ’。 』 是也。”
학의행은 말하기를 국어 진어에 ‘사공계자(司空季子)의 말에 황제헌원의 아들 열두성 중 희僖성이 있는데. '희'는 리釐의 옛날 글자와 통용된다. 리釐는 즉 희僖다.’ 사기 공자 세가에 이르기를 ‘왕망씨의 임금이 봉산과 우산을 지켜 釐성이 되었다.’ 색은에 이르기를 ‘리釐의 음은 희僖다.’
“司空季子曰(...)凡黃帝之子, 二十五宗, 其得姓者十四人為十二姓. 姬、酉、祁、己、滕、箴, 任 ,荀、僖、姞、儇、依是也.”-『國語』진어 사(國語 晉語 四)
"사공계자(司空季子)가 말하였다 (...) "황제(黃帝)의 아들 25大宗 중에 성(姓)을 얻은 자는 14인이요, 12성(姓)이 되었으니, 姬、酉、祁、己、滕、箴, 任 ,荀、僖、姞、儇、依姓이 그것입니다.“
“客曰 防風何守? 仲尼曰 汪罔氏之君守封, 禺之山, 為釐姓 . 在虞,夏,商為汪罔 ,於周為長翟, 今謂之大人.” -『史記』 卷47 孔子世家 第17
"사자가 말하였다. "방풍씨는 무엇을 지켰습니까?" 공자가 이르기를 "왕망씨의 군은 봉산과 우산을 지켰는데 성이 희(釐)씨였습니다. 우,하,상나라 때에는 왕망, 주나라 때에는 장적(長翟)이라고 하였고, 지금은 대인(大人)이라고 합니다."
“客曰 「防風何守也?」 仲尼曰 「汪芒氏之君也, 守封 嵎之山者也,為漆姓. 在虞 ,夏 ,商 為汪芒氏, 於周為長翟, 今為大人” -『國語』魯語 下
사자가 말하기를. "방풍씨는 무엇을 지켰습니까?" 중니가 이르기를 "왕망씨(汪罔氏)의 임금은 봉산(封山)과 우산(禺山)을 지켰는데 그는 성이釐氏였소. 우(虞), 하(夏), 상(商) 나라 때에는 왕망(汪罔)씨라 했고, 주(周)나라 때에는 장적(長翟)이라고 했고, 지금은 대인(大人)이라고 하오."
【白民:《山海經》云:銷姓國。而汲冡書言:“白民之國,今之白州。(亦見《博物志》)孔晁以為東南夷。與白州接。
防風:釐姓。守封禺之間,二山在今湖之武康。(吳興記云:吳興西有風渚山一曰風山有風公廟古防風國也下有風渚今在武康東十八里天寳改曰防風山禺山在其東二百歩説文作嵎寰宇記云以禁樵采曰封山山東南二十里有禺山禹十二代孫帝嵎所居皆妄今錢塘 之金鵞山郡國志云防風氏封此山下有風渚然謂古鄋 暪國者又謬。)
汪芷:即汪罔。《説苑》云:“汪芷。釐姓。“《説文》云:”封嵎山在吳楚間,汪芒之國“厯代故以為防風也。(왕망은 리성(釐姓)이다. 오나라초나라시기에 우산(嵎山)에 봉해져 왕망(汪芒)의 나라는 역대 방풍씨가 되었다
.) 】-----노사(路史)권25/ 우이(嵎夷)자료 게시판에 있음.
2018.07.30 19:22
『說文解字』 의 '狄(적)'
【卷十】【犬部】狄
赤狄,本犬種。狄之爲言淫辟也。从犬,亦省聲。徒歴切
본래 개의 한 종류이다. ‘狄’은 ‘음란하다, 괴벽하다’라는 말이 된다.
『說文解字注』
(狄) 北狄也。北各本作赤。誤。今正。赤狄乃錯居中國狄之一種耳。許書蟲部曰南蠻、曰東南閩越。大部曰東方夷。羊部曰西方羌。豸部曰北方貉。則此必言北狄。狄與貉皆在北。而貉在東北。狄在正北。釋地曰。九夷、八狄、七戎、六蠻、謂之四海。八蠻在南方。六戎在西方。五狄在北方。李巡云。五狄者、一曰月支。二曰穢貊。三曰匈奴。四曰箄于。五曰白屋。王制、明堂位皆言東夷、南蠻、西戎、北狄。本犬穜。此與蠻閩本虵穜、貉本豸種、羌本羊穜一例。狄之爲言淫辟也[해석:‘北’은 각 판본에 ‘赤’으로 되어 있으나 잘못된 것이기에 지금에 바로 잡는다. ‘赤狄’은 이전에 중국에 섞여서 정착해 살던 북방종족의 일종이다. 『설문해자』 의 ‘蟲’에서는 남방의 종족을 ‘蠻’이라 하고 동남방을 ‘閩’,‘越’이라 하였으며 ‘大’부에서는 동방을 ‘夷’라 하고, ‘羊’부에서는 서방을 ‘羌’이라 했고, ‘豸’에서는 북방을 ‘貉(맥)’이라 하였는데 곧 북방의 ‘貉(맥)’이란 필시 북적(北狄)을 말한 것이다. ‘狄(적)과 ‘貉(맥)’은 모두 북쪽에 있으나 ‘貉(맥)’은 동북쪽에 있었고 ‘狄(적)’은 정북쪽에 있음을 말한다. 『석지』에 가로되 「‘九夷’、‘八狄’、‘七戎’、‘六蠻’을 일컬어 사해(四海)라 하였다. ‘八蠻’은 남방에 있으며, ‘六戎’은 서방에 있으며, ‘五狄’은 북방에 있었다. 이순이 말하기를 「‘五狄’은 첫째 ‘月支’,둘째 ‘穢貊’, 셋째가 ‘匈奴’, 넷째가 ‘箄于’이며, 다섯째가 ‘白屋’이라 한다」고 했다. 『王制』 명당위에서는 모두 ‘東夷(동이)、南蠻(남만)、西戎(서융)、北狄(북적)이라 하였다.]
此與孔子曰貉之言貉貉惡也一例。惡與貉、辟與狄皆韵爲訓。風俗通云。狄父子叔同穴無別。狄者、辟也。其行邪辟。其類有五。按辟者、今之僻字。[해석:이것은 공자가 이르기를 ‘貉’은 나쁘다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으니 ‘貉’이란 곧 악함이다라고 한 것과 같은 예이다. ‘惡,貉,辟,狄’은 모두 첩운으로 글자의 뜻을 새겼다. 풍속통에 이르기를 ‘狄’은 부자간에 혹은 제수와 시국간에 같은 동굴에서 생활하면서 따로이 구별하지 않으니 ‘狄’이라 함은 편벽됨을 말한다. 그 행위는 도리에 어긋나 편벽되며 그 종류에는 다섯부류가 있다고 하였다. 생각건대 ‘辟’은 지금의 ‘僻’자이다.] 从犬。亦省聲。徒歷切。十六部。按亦當作朿。李陽冰云。蔡中郞以豊同豐。李丞相持朿作亦。所謂持朿作亦者、指迹狄二字言。迹籒文作。狄之古文籒文亦必作?。是以詩瞻卬狄與刺韵。屈原九章悐與積擊策蹟適蹟益韵。古音在十六部也。若从亦聲。則古音在五部而非其韵。然自李斯變古籒爲篆文。其形已誤而其聲至今不誤。聖人諭書名之澤長矣。
참고) 『說文解字經』段玉裁 著, 臺灣 蘭臺書局,1977
적(狄)=적(翟)
적(狄)나라는 춘추시대 이전부터 제(齊) ‧ 노(魯) ‧ 진(晋) ‧ 위(衛) ‧ 송(宋) ‧ 형(邢)나라 사이에서 활동하며 빈번한 마찰이 있었던 부족이며 적(翟)으로도 쓴다.
“二十七年 魯閔公母曰 哀姜 桓公女弟也. 愛姜淫於 魯公子慶父. 慶父弑閔公 哀姜 欲立慶父 魯人 更立釐公. 桓公 召哀姜殺之. 二十八年 衛文公 有狄亂 告急於齊. 齊率諸侯 城楚丘 而立衛君.”-『사기』
제나라환공(BC685∼BC643) 28년. 위(衛)나라 문공(文公)이 적(狄)나라가 침공해 오는 전란을 당하여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제나라가 제후들을 이끌고 가서 초구(楚丘)에 성을 쌓아 위나라 군주를 옹립해 주었다.
적적赤狄
“노潞”나라: 춘추시대에 적적(赤狄)족의 별종이 세운 국가라고 하며 진나라(晉)에게 멸망했다.
『左傳』에 등장하는 “적적赤狄”
“기원전 597년 진(晉) 경공(景公)이 적적(赤狄) 토벌에 나섰다.
이때 사백 (史伯)은 중행환자(中行桓子)에게 군을 통솔하게 하라며 환자를 경공에게 추천했고, 그 결과 적적을 없애고 노지(潞氏)를 평정했다.
이에 경공은 환자에게 적적의 노예 1000가를 상으로 내리고, 과연(瓜衍 ㆍ옛 지명)의 현성을 사백에게 상으로 내렸다.”
위와 같은 내용이 『사기』 晉世家에는 “七年, 晉使随会滅赤狄. 칠년 진사수회멸적적”[진(晉) 경공(景公) 7년에 진나라가 수회를 시켜 적적(赤狄)을 멸망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적(白狄)
바이두백과: 유역씨(有易氏) 항목
유역씨(有易氏)는 역수(易水) 즉 하북성을 흐르는 강에서 살던 고민족으로 유역(有易)·백적(白狄)·선우(鲜虞)·중산(中山)을 다 이곳에서 활동한 같은 종족으로 보고 있었다. 전설상으로 이들은 은상(殷商)의 선대 부족들과 갈등을 겪어 역수의 북쪽 지역으로 도망갔고 그 후로 이름을 선우(鲜虞)라 하였고 춘추(春秋) 시대에는 백적(白狄)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원래 옹주(雍州)의 북부에 살던 종족으로 진(秦)에 압박을 받고 동쪽으로 옮겨서 하북성(河北省)으로 와서 선우씨(鲜虞氏), 비씨(肥氏), 고씨(鼓氏), 구유씨(仇由氏)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전 506년 중산국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춘추좌씨전』소공15년, 기원전 527년에 晉나라 순오가 선우를 토벌하여 ‘고(鼓)’를 포위하였다 했는데 여기는 ‘고(鼓)’는 나라 이름으로 희(姬)성이며, 백적의 별종으로 당시 선우에 예속되었다. 국경은 지금의 하북 진현(晉縣)이다.
【BC 661
魯 민공 2년(bc 661)에 狄人이 위(衛)를 형택(熒澤)에서 괴멸시키자 제*송*노가 성을 초구(楚丘)에 서둘러 쌓은 다음 衛의 도읍을 옮기게 하였다. 이 시기에 燕은 이미 멸망한 상태였으며
bc 650
魯 희공10년(bc 650) 狄人이 온(溫)을 멸하고 그 해 齊와 허(許)가 북융(北戎)을 치다가 이득이 없자 희공 11년에 관이오(管夷吾)를 융(戎)에 보내 화평을 청하고 있다(적=북융=융)
bc647
노 희공 13년(bc647)에 초구(楚丘)에 있던 衛 공격*14년 정(鄭) 공격*15년 晉이 분수 남쪽 곤도(昆都)에서 참패를 당하기에 이른다.
bc 636
(bc 636년 경) 융적(戎翟)이 낙읍(洛邑)의 주 양왕(周 襄王)을 공격하자 정(鄭)의 범읍(氾邑)으로 도망한 후 진(晋)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세가 강해 병을 발하지 못하고 육혼(陸渾)까지 내어주다가(단군조선은 이를 자대子帶에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BC 622
BC 622년에 진 문공(晋 文公)의 도움으로 탈환해(한서 흉노전 939P) 환도하였다.이때 진(秦)이 강성해져 목공(穆公)이 서융8국(西戎8國)을 지배하니(한서 흉노전 939P) 드디어 BC 623년 서방백(西方伯)으로 올라섰으며(십팔사략 166P) 이 무렵 기산岐山*양산梁山*경수涇水*칠수漆水의 북쪽에 의거義渠*대협大劦*오씨烏씨*구연朐衍의 융(戎) 과 晋의 북쪽에 임호와 누번 그리고 燕의 북쪽에 산융이 있었고 100년 후(BC 599) 견디지 못한 진 도공(晋 悼公)이 위강(魏絳)을 통해 戎狄과 화의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한서 흉노전 939P)】『중국북방이족과 조선상고사』발췌글,라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