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26 06:38
한민족의 이칭(異稱)_남이(藍夷)
-풍이에서 남이로-
『규원사화』와 『한단고기』의 기록을 참고하면 치우씨의 후손이 남서쪽에 봉해져 다스린 국가가 “남국(藍國)”이라 하였으니 “남국(藍國)”은 “남이”와 관련이 있고 풍이를 치우씨족이라 하였으니 남이는 풍이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남국은 5세 오사구 단군 때에 하나라를 공략한 삼부의 하나로, 22세 색불루 단군시기에는 여파달이 여국(黎國)를 건국하는데 공신국으로 등장한다. 《죽서기년》에는 남이(藍夷)가 은(殷)나라 중정(仲丁) 때에 이르러 은나라를 침략한 이족(夷族)으로 나온다.
남이(藍夷)의 근거지를 『수경주』의 기록에 근거해 옛 연나라 땅이었던 ‘藍水’가 흐르던 지역으로 보기도 한다.
[“獨藍侯者出諸家之右, 時常役率羣后, 以行國政” 홀로 남후(藍侯)만이 제후들의 강성함 가운데에서도 뛰어나서 때마다 모든 제후들을 거느리고 국정을 행하였다.
“風夷則卽蚩尤(氏)之一族也” 풍이는 곧 치우씨의 일족이다.
“蚩尤氏之族, 則占居西南之地”치우씨족은 서남쪽의 땅에 점거했다.
“蚩尤氏之後, 封于南西之地, 巨野浩豁, 海天靚碧, 曰藍國, 宅奄慮忽.”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
『한단고기』의 “桓雄天皇使風伯釋提羅雖除鳥獸蟲魚之害” 한웅천왕께서 풍백(風伯) 석제라(釋提羅)로 하여금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의 해를 제거하도록 하였다.
『규원사화』의 “但此時, 開闢不遠, 隨處草木荒茂‧鳥獸雜處, 人民艱困殊甚, 且猛獸‧毒蟲不時衝動, 人民被害不少. 神市氏, 卽命蚩尤氏治之” 이 때는 개벽한 지 멀지 않아 곳곳에 초목이 무성하고 조수가 뒤섞여 있어 사람들의 괴로움이 무척 심하였고, 또 맹수와 독충들도 때를 가리지 않고 다투었기에 사람들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신시씨 즉 치우씨(蚩尤氏)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라는 기록을 보면 ‘풍백 석제라’와 ‘치우씨’의 역할이 일치하니 풍백이 곧 치우씨임을 유추할 수 있다.
『한단고기』단군 세기 기록에 의하면 5세 오사구 단군 때에 하나라를 공략한 ‘람’,‘진’,‘변’의 삼부의 하나로 ‘람(藍)’이 등장한다. 22세 색불루 단군 시기 산융과 은나라 사이 빈기 땅을 공략으로 여파달(黎巴達)이 건국한 여국(黎國)이 있다. 이때 려국 건국의 일등 공신은 남국(藍國)이다.
후한서 동이열전의 前言(전언)에 보면
<桀>爲暴虐, 諸<夷>內侵, <殷湯>革命, 伐而定之. 至于<仲丁>, <藍夷>作寇. {<仲丁>, <殷><大戊>之子也. 《竹書紀年》曰[<仲丁>卽位, 征于<藍夷>]也.} 自是或服或畔, 三百餘年. <武乙>衰 , <東夷> 盛, 遂分遷<淮>·<岱>, 漸居中土.{<武乙>, 帝<庚丁>之子, 無道, 爲革囊盛血, 仰而射之, 命曰[射天]也.}
《竹書紀年》을 인용하여“은(殷)나라 때에는 중정(仲丁)에 이르러 남이(藍夷)가 침략을 하였다. 이때 이후로 동이는 혹은 복속하기도 하고 혹은 반란을 일으키기도 한 것이 300여 년이었다.”라고 하여 ‘남이’의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수경주』권14에 ‘藍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남이(藍夷)’의 근거지였을 가능성을 생각해본다. 회수 유역에 이족을 회이라고 하듯 남수 지역에 이족을 남이라고 할 개연성이 충분하다 하겠다.
“藍水注之, 水出北山, 東流屈而南逕無終縣故城東, 故城無終子國也. 春秋襄公四年無終子嘉父使孟樂如晉, 因魏絳納虎豹之皮. 請和諸戎是也故燕地矣. 秦始皇二十二年滅燕置右北平郡治此, 王莽之所謂北順也. 漢世李廣為郡出遇伏石謂虎也射之飲羽即此處矣”
람수(藍水)는 (어떤) 강으로 들어가는데, 람수는 북산(北山)에서 나와 동으로 흘러 돌다가 남으로 흘러 무종현 옛 성의 동으로 흐르는데 이는 옛 성으로 무종자국이다. 춘추 량공 4년 無終子嘉父使孟樂如晉, 위(魏) 나라에서는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을 여기서 들여왔다. 청화(請和)모든 융족(戎族)이 이곳인데 옛 연나라 땅이다. 진시황 22년 연나라를 멸하고 우북평군을 두어 다스렸고, 왕망의 북순이다. 한나라 때에 이광(李廣)이 군으로 하였고 우복석(遇伏石)이 나오는데 이르기를 호랑이라 하였다.
남이(藍夷)의 '藍'은 의역(意譯) 표기이다. 즉 「藍」이 몽고어로 「呼和」의 뜻이다. 몽고어 '藍夷' 는 '呼和氏' (후허씨 )이고 , 족명 '回紇(회흘 즉 위구르족)'은 '呼和'이다.
치우씨가 풍이이고, 풍이에서 남이가 나왔으며, 후에 치우씨의 후예가 남국(藍國)에 봉해졌다 하였으니 남이가 결국 치우씨의 후예가 된다. 그렇다면 위구르족(회흘)의 족명이 '藍'의 의역된 표기임을 볼 때 위구르족 또한 치우씨의 후예로 남이와 관련이 있다.
2018.07.23 18:13
2018.07.25 08:11
'藍夷'의 '藍'이 의역(意譯) 표기이다.
「藍」是「呼和」之意,「夏」是「呼和」之音
很簡單,「藍/青」在蒙古語裡是「呼和」(kho-kho),在突厥語是「可可」(ko-ko),地名「呼和浩特」是「青城」,「可可西裡」是「青山」。因此蒙古語裡「藍夷/藍氏」就應是「呼和氏」,而族名「回紇」(khui-kho)又最接近「呼和」。因此《竹書》時代的雙語人士是將「回紇」聽作「呼和」,從而按「呼和」將其意譯為「藍夷」。
在中國歷史上,意譯族名「藍夷/藍市/藍氏」僅出現過這三次,其中兩次還是出現在西域,其餘的「回紇/呼和」大多是以「夏」的面目出現,「西夏」即是一例,《宋書.夏國傳》說西夏「國稱大夏」,[其實中原漢族稱它「回回」,實際就是「回紇」。後來西夏民族皈依了伊斯蘭教,中國人還把伊斯蘭教稱做「回教」,所幸還沒有稱它「夏教」。
출처:http://www.epochtimes.com/b5/11/6/4/n3276572.htm[朱學淵:華夏西域「藍夷」考]
2018.08.03 13:16
「藍 」是 「呼和 」之意 ,「夏 」是 「呼和 」之音
很簡單 ,「藍 /青 」在蒙古語裡是 「呼和 」(kho-kho ),在突厥語是 「可可 」(ko-ko ),地名 「呼和浩特 」是 「青城 」,「可可西裡 」是 「青山 」。因此蒙古語裡 「藍夷 /藍氏 」就應是 「呼和氏 」,而族名 「回紇 」(khui-kho )又最接近 「呼和 」。因此 《竹書 》時代的雙語人士是將 「回紇 」聽作 「呼和 」,從而按 「呼和 」將其意譯為 「藍夷 」。
在中國歷史上 ,意譯族名 「藍夷 /藍市 /藍氏 」僅出現過這三次 ,其中兩次還是出現在西域 ,其餘的 「回紇 /呼和 」大多是以 「夏 」的面目出現 ,「西夏 」即是一例 ,《宋書 .夏國傳 》說西夏 「國稱大夏 」,[其實中原漢族稱它 「回回 」,實際就是 「回紇 」。後來西夏民族皈依了伊斯蘭教 ,中國人還把伊斯蘭教稱做 「回教 」,所幸還沒有稱它 「夏教 」。
번역본
「藍 」은 「呼和 」라는 의미이고 「夏 」는 「呼和 」의 음이다 .
매우 간단하다 . 「藍 /青 」은 몽고어로는 「呼和 」(kho-kho )이고 ,돌궐어로는 「可可 」이다 . 따라서 지명인 「呼和浩特 」(후허하오터 )는 「青城 」(칭청 : 푸른 성 )이며 ,「可可西裡 」(커커시리 )는 「青山 」(칭샨 : 푸른 산 )이다 . 그러므로 몽고어 「藍夷 /藍氏 」(남이 /남씨 )는 「呼和氏 」(후허씨 )이고 , 족명 「回紇 」(khui-kho:한자음은 ‘회흘 ’, 중국어발음은 ‘후이허 ’로 위그르족을 이른다 )은 「呼和 」(중국어 발음은 ‘후허 )에 가장 근접한다 .
그래서 <죽서 >시대의 이중언어학자들은 「回紇 」(후히허 )을 「呼和 」(후허 )로 들었을 것이고 , 「呼和 」에 맞추어 그 뜻을 「藍夷 」(남이 )로 해석한 것이다 .
중국역사에서 족명 「藍夷 /藍市 /藍氏 」로 의역한 것은 세번 나타난다 . 그 중 두번은 서역에서 나타나고 나머지의 「回紇 /呼和 」 대부분은 「夏 」에서 나타난다 . 「西夏 」(시샤 :서하 )가 바로 그 일례로 , 《宋書 .夏國傳 》(송서 . 하국전 )에서 서하를 「國稱大夏 」(나라를 大夏 (대하 )로 칭한다 )라고 했는데 , 사실 중원의 한족들은 서하를 「回回 」(회이회이 :회회 )라고 칭했으며 , 바로 「回紇 」를 칭하는 것이다 . 후에 서하민족들은 이슬람교에 귀의했고 , 중국인들은 이슬람교를 「回教 」(회교 )라고 칭했으며 , 다행히도 「夏教 」라고 칭하지 않았다 .
2018.08.08 14:32
람이(藍夷)=풍이(風夷)=風伯(치우씨)의 후예
【“藍夷卽風夷”-《해동역사 동이총기》
람이(藍夷)는 즉 풍이(風夷)이다.
“風夷則卽蚩尤氏之一族也”-《규원사화》
풍이는 곧 치우씨의 일족이다.
“蚩尤氏之後封于南西之地巨野浩豁海天靚碧曰藍國宅奄慮忽.”-《규원사화》
치우의 후손에게는 서남쪽의 땅을 봉하였다.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람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桓雄天皇使風伯釋提羅雖除鳥獸蟲魚之害”-《환단고기》
한웅천왕께서 풍백(風伯) 석제라(釋提羅)를 시켜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의 해를 제거하도록 하였다.
“但此時, 開闢不遠, 隨處草木荒茂‧鳥獸雜處, 人民艱困殊甚, 且猛獸‧毒蟲不時衝動, 人民被害不少. 神市氏, 卽命蚩尤氏治之.” -《규원사화》
이 때는 개벽한 지 아직 멀지 않은 때인지라, 곳곳에 초목이 무성하고 날짐승이며 들짐승이 어지러이 섞여 있어 사람들의 괴로움이 매우 심하였고, 더욱이 사나운 짐승과 독충들도 때를 가리지 않고 다투었기에 사람들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신시씨는 곧 치우씨(蚩尤氏)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南撫交阯北發西戎析枝渠廋氐羌北山戎發息愼”-《사기(史記) 우제기(虞 帝紀)》
남쪽으로 교지(交趾) 북발(北發)을, 서쪽으로 융(戎) 석지(析枝) 거수(渠搜) 저족(氐族) 강족(羌族)을, 북쪽으로 산융(山戎) 발(發) 식신(息愼)을 위무하였다】
2018.08.12 08:27
남이藍夷 : 중원의 요족, 사족과 관련
【남이藍夷 | 남이는 산동반도에서 시작된 동이족의 한 갈래로, 남청색의 원료인 남전을 심어 옷감을 남색으로 물들여 의복을 지었습니다. 상나라의 중정, 하단갑 때 전쟁을 벌이기도 했고, 산동에서 하남, 호북, 호남을 거쳐 남하하여 요족과 융합, 요족의 큰 성씨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춘추 초기에 남이가 대거 이주한 남쪽의 호남 남전은 원래 요족의 영역으로, 남이는 이곳으로 이주한 후 대부분 요족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상녕, 수녕, 남산 등에 분포한 요족 중에 남씨 성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그 후 요족에서 한 갈래가 갈라져 나와 다른 씨족과 결합하여 사족의 4대 성씨인 반, 남, 뇌, 종씨가 되었습니다.
다른 한 갈래인 남이는 묘족과 융합했습니다. 중국 소수민족인 요족은 주로 광서, 호남, 광동, 운남, 귀주에 분포해 있는데 그 중 광서에 가장 많이 삽니다. 마을신, 가택신, 수신, 풍신, 우신, 뇌신, 수신, 산신 등을 모시며 명절 때마다 제를 지냅니다. 요족의 명칭은 기원 전설, 생산방식, 거주와 복시 등 특징에 따라 반요, 과산요, 화요, 남전남, 평지요 등 30여 개의 호칭이 있습니다.
사족의 90-%는 복건, 절강의 산간지역에 분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산합’ 또는 ‘산달’이라 부르는데 ‘합哈, 달達’은 사어로 손님 이라는 뜻으로 ‘山哈은 산속 사람 또는 산속에 거주하는 손님을 말합니다. 사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사, 요의 근원이 같다는 설과 고대 월인의 후예라는 설이 있습니다. 사족과 요족은 씨족 토템이나 성씨가 같은 면이 많아 두 족속의 기원이 아주 밀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월인의 후예라는 설은 월과 동일한 창세신화, 같은 생산방식, 동일한 풍습 등이 있다는 점에 근거한다. 이것을 볼 때 사족이 북방에서 내려온 동이족과 원주민이 결합하여 생성됐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출처 : 상생출판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본
한자가 다르기는 하지만 남방 지역의 이족이라는 의미에서 참고합니다.
“巴、蜀、廣漢本南夷”-『漢書한서』地理志).
“파(巴) 촉(蜀) 광한(廣漢)은 본래 남이(南夷)이다.”
“東方物所始生, 西方物之成孰..漢之興自蜀漢.”-『史記』六國年表)
“동방(東方)에서 만물이 시생(始生)하고, 서방(西方)에서 만물이 성숙(成孰)했다”...“한(漢)의 흥함은 촉한(蜀漢)으로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