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25 06:36
한민족의 이칭(異稱)_회이(淮夷)
회이((淮夷)는 다른 구이들에 비해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강소성 양주(楊州) 일대, 회수(淮水) 유역에서 산동성의 동남부 지역 일대에 있던 이족을 회이(淮夷)라고 명명하였다. 이들 회이족들이 중원 남방의 월족으로 이어진다. 중국학자 곽말약은 서주(西周) 동기(銅器) 명문(銘文)의 연구를 통해 회이를 초(楚)로 보고 있다.
아래에 회이를 거론하고 있는 몇몇 자료들을 가져왔습니다.
○중국의 역사학자 서량지(徐亮之)의 연구에 의하면
“세석기(細石器) 때 한 무리의 문화부족(文化部族)이 맨 처음으로 시베리아의 바이칼호수 근방에서 살았었는데, 그들이 바로 중국의 전설적인 염제신농(炎帝神農)의 본족(本族)이다. 그들 민족은 『서전(書傳)』 「우공편(禹貢編)」의 기록에 보이는 조이(鳥夷), 우이(隅夷), 래이(萊夷), 회이(淮夷), 석지직피(析支織皮)이며 은(殷)나라 당시의 복사(卜辭)로 적은 이방(夷方), 토방(土方), 길방(吉方), 강방(羌方), 괴방(鬼方) 또 주(周)나라 때의 이(夷), 적(狄), 험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호(胡), 맥(貊), 흉노(匈奴) 그리고 위(魏)나라, 진(晋)나라 때의 오환(烏丸), 선비(鮮卑) 등이 모두 그들의 후손이다.”라 하였고
○또 다른 중국의 역사학자 임혜상(林惠祥)의 연구결과를 보면
“한족(漢族)의 대부분은 동이(東夷)로부터 나왔다. 중국의 진(秦)나라 이전의 동이(東夷)는 중국의 동부지역인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및 회수 일대를 넓게 점령하고 살았고, 그 갈래로는 우이(隅夷), 회이(淮夷), 서융(徐戎), 도이(島夷), 래이(萊夷), 개이(介夷), 근모이(根牟夷) 등이다. 옛 기록에 의하면 순(舜)임검은 동이(東夷)사람이다. 제(齊)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도 동이(東夷)인이고, 은(殷)나라도 동이(東夷)가 세운 나라이다. 그러나 B.C 246년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중국 내의 동이족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졌거나 한족(漢族)에 동화되었다.”라 하였다.
○【우리의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상 왕조가 망한 뒤 이방(夷方은 회이(淮夷)은 상 왕조 주(紂) 왕의 아들 무경(武庚), 녹부(祿夫) 등과 손을 잡고 주공단의 아우 관숙과 채숙과 손을 잡고 소위 ‘삼감(三監)의 난’을 일으킨다. [BC1116년 "무왕이 붕하니 삼감(三監)과 회이(淮夷)가 배반하였고 주공(周公)이 정벌하였다“-『尙書』,『후한서』 동이열전]이 기록은 서전을 비롯 각종 사서에 보인다. 그리고 주 왕조는 주공과 소공을 보내어 산동 지방의 동이를 쳐서 복속시키고 조가비와 베를 바치게 했다. 금문(金文)의 <종주종(宗周鐘)>엘 보면, “남이(南夷), 동이(東夷)를 모두 만나 보았는데 26개의 나라가 있었다” 하는데 남이는 곧 산동반도의 9이족이 남쪽의 회수(淮水)와 장강(양자강)으로 내려가 이루어진 회이(淮夷)이고 동이(東夷)는 조이(鳥夷)의 갈래인 진시황의 성씨인 영(嬴)씨 성 제후국 및 풍(風)씨 성, 언(偃) 성 제후국을 가리킨다.
이 26개의 한겨레 피붙이 나라는 포고(蒲姑), 격(鬲), 담(譚), 각(殼), 주(州), 교(絞), 력(酈), 소(蕭), 비(費), 현(弦), 황(黃), 갈(葛), 진(秦), 제(齊), 엄(奄), 담(郯), 임(任), 숙(宿), 수구(須句), 회이(淮夷), 서(舒), 영(英), 륙(六), 료(蓼), 강(江), 환(皖)을 가리킨다. 특히 임, 숙, 수구, 전유(顓臾)는 풍씨 성의 국가임을 「춘추」는 밝히고 있다.(이 내용은 환단고기의 기록과 서로 일치한다)
「환단고기」를 참조해 서하(西夏)와 배달이 갈리던 시절의 국력을 보면 다음과 같다.
*13세 단군 홀달(혹은 대음달) 재위 61년
은나라 사람이 하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홀달단제께서 읍차인 말량으로 하여금 구한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하니, 은나라의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고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우량을 파견하여 견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서 진격하여 관중의 빈 기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
갑신 원년(BC 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골을 통치하도록하고, 웅갈손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판을 보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가을 7월 신독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乙酉二年 藍國君今達 與靑邱君 句麗君 會于周愷 合蒙古里之兵 所到破殷城柵 深入奧地 定淮岱之地 分封蒲古氏於淹 盈古氏於徐 邦古氏於淮 殷人 望風煌怯 莫敢近之”-『한단고기』단군세기
(23세 아홀단군) 재위 2년 을유(B.C.1236)년에 남국(藍國)의 임금 금달(今達)이 청구(靑邱)의 임금, 구려(句麗)의 임금과 주개(周愷)에서 만나 몽고리(蒙古里)의 병력과 함께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고 포고씨(蒲古氏)를 엄(淹)에, 영고씨(盈古氏)를 서(徐)에, 방고씨(邦古氏)를 회(淮)에 각각 봉하시니, 은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겁내어 감히 근접하지 못하였다.
무자 5년 이한및 오가를 불러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는 것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기해 76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연나가 즉위하였다.
*30세 단군 내휴 재위 35년
청구의 다스림을 둘러보시고 돌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는 엄독골에 이르러 제후국의 여러 한들과 만난후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나라 사람들과도 수교를 맺었다.
*32세 단군 추밀 재위 30년
계해 12년 초나라 대부 이문기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35세 단군 사벌 재위 68년
무오 50년 단제께서 조을을 파견하여 똑바로 연나라 서울을 돌파하고 제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
*36세 단군 매륵 재위 58년
무진 52년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
【】는 “안원전의 담론 219 하 왕조 임금이 덕망을 잃자 이(夷)족이 배반, 걸 왕이 모질게 굴자 여러 이(夷) 족들이 쳐들어 오고, 상 왕조가 쇠약해지자 동이는 중원을 차지”에서 일부 가져옴
○ 【회이(淮夷)족은 오월초(吳越楚)가 건설한 이족이다. 그 중에서 월족은 수많은 동이계 민족 중에서도 아주 오래이고, 백월(百越), 백월(百粵)로도 불리었다. 이들은 사천성, 호남성, 운남성, 귀주성, 강소성, 절강성 등 양자강(長江) 중 하류 이남 및 중남반도에 광범하게 분포하여 살아온 민족이다. 이들은 주로 수렵과 어업, 농경, 금속야련, 수토항행(水土航行)으로 생활하였고, 단발문신의 습속이 있다.
중국학자 곽말약의 『중국고대사회연구』 가운데, <영은(令殷)>, <금은(禽殷)> 등 서주(西周) 동기(銅器) 명문(銘文)의 연구에 대해, “초는 본래 만이(蠻夷) 곧 회이(淮夷)로 은나라의 동맹국이었다”라고 하였고, <은주청동기명문고석(殷周靑銅器銘文考釋)>, <금문총고(金文叢考)> 등에서 “회이는 곧 초인이며, 또한 곧 <일주서(逸周書) 작락해(作雒解)> 가운데의 ‘웅영족(熊盈族)’, “초의 조상은 회수(淮水) 하류(지금의 상해 위쪽)에 거주했으며, 엄인(奄人), 서인(徐人) 등과 더불어 함께 동국(東國)에 속했다.(楚人先世居淮水下游, 與奄人徐人等同屬東國) 웅영(熊盈)은 곧 죽웅(鬻熊)에 짝하며, 영죽(盈鬻) 일성(一聲)이 변한 것이다. 웅영족(熊盈族)은 주(周)로 인해 남하하여 강에 이르렀으며, 강을 넘어서지 못하자 다시 서쪽 위로 올라가 악(鄂)에 도착했다.” 라고 하여 양자강 유역의 회이족-초민족인 웅영족으로 변신해 나아갔음을 보여준다.】
【】는 안원전 담론 “동이 9려,한겨레 핏줄 회이(淮夷) 족의 후예 월족(越族)은 어떻게 형성되었나?”에서 일부를 가져옴.
2018.07.20 06:04
2018.07.21 08:40
아래는 후한서 자료 중심의 회이(淮夷)와 관련된 자료입니다.
회대의 땅은 동이의 근거지로 동이에 속하는 남이(藍夷. 엄이, 서이, 회이를 포함)가 주로 차지하였다. 회대지역은 산동지역의 대산(岱山=泰山=岱宗)에서 회수(淮水)까지 이르는 지역이다.
BC1199년~BC1196년 "(은나라 27대왕)무을(武乙)이 쇠하고 동이(東夷)가 번성하였고, 드디어 회대(淮岱)의 땅으로 나누어 옮겨가서 중토(中土)를 점거하였다"『後漢書 東夷列傳』
BC1197년 "무을(武乙) 3년(서기전1197)경에 무을이 쇠하게 되자 동이(東夷)의 침범이 잦아지고 드디어 회대(淮岱)의 땅으로 나누어 옮겨가서 중토(中土. 가운데 땅)에 머무니 소위 서이(徐夷)가 이들이다."『博物志』
BC1199년은 주를 기준으로 동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주나라 서쪽은 서융, 남쪽은 남만, 북쪽은 북적으로 나누어 불렀다. 서융은 주나라에 복속하지 아니한 서이(西夷=白夷)의 무리이고, 남만은 적이(赤夷), 북적은 황이(黃夷)이다.
“단군조선의 본토인 진조선(진한)은 특히 현이(玄夷. 현은 북쪽이라는 뜻)”『오월춘추』
“서이(西夷) : 之踊, 蜀, 羌, 微, 盧, 彭” 『竹書紀年』
BC1116년 "무왕이 붕하니 삼감(三監)과 회이(淮夷)가 배반하였고 주공(周公)이 정벌하였다“
『尙書』,『후한서』 동이열전
BC1115년~BC1079년(주나라 2대 성왕) "관(管)과 채(蔡)가 주나라를 배반하여 이적(夷狄)을 불러들이니 주공(周公)이 정벌하고 드디어 동이(東夷)를 평정하였다"
"성왕(成王)이 관숙과 채숙을 정벌하고 회이(淮夷)를 멸하였다" -『후한서』 동이열전
BC1078년~BC1053년 "(주나라) 강왕(康王)의 때에 숙신이 다시 왔고, 뒤에 서이(徐夷)가 왕을 잠칭하고 구이(九夷)를 이끌고 종주(宗周)를 정벌하여 서쪽으로 하상(河上)에 이르렀다"-『후한서』 동이열전
BC1001년~BC947년 "목왕(穆王)이 두려워하여 동방의 제후를 나누어 서언왕(徐偃王)을 주인으로 섬기도록 명하였다. 서언왕은 인의를 행하니 육지의 나라로서 알현한 곳이 36국이다.”-『후한서』 동이열전
BC1001년~BC947년 (주나라)“목왕(穆王)이 조부(造父)에게 초(楚)나라로 하여금 서(徐)국을 멸하게 명하라 하고 하루만에 초나라에 이르렀는데, 이에 초나라 문왕(文王)[BC689년~BC677년]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하였다. 언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다. 이에 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
-『후한서』동이열전 *주목왕 시기가 아니라 주 희왕(이왕) BC682년~BC678년 시기일 가능성.
BC878년~BC828년 (주나라 10대 여왕)“여왕이 무도하여 회이(淮夷)가 들어와 도적질을 하였고 소공(召公)이 이를 정벌
BC781년~BC771년 (주나라 12대 유왕) “유왕(幽王)이 음란하자 사이(四夷)가 번갈아 가며 침범하였다. 제환공(薺桓公)에 이르러 패업을 이루어 이를 물리쳤다. 초나라 영왕(靈王)이 신(申)에서 회합하니 역시 회맹에 동참하였으니 초영왕(楚靈王), 채후(蔡侯), 진후(陳侯), 정백(鄭伯), 허남(許男), 회이(淮夷)이다.”-『후한서』동이열전, 『좌전』
BC221년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병합하자 회이(淮夷)와 사이(泗夷)가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후한서』동이열전
◾『紀年』曰 (帝相) 元年, 征淮夷
기년에서 가로대 제상 원년에 회이를 정벌했다.
2018.08.01 20:33
삼감의 반란에 참여한 이족
【삼감三監의 반란
“관숙과 채숙이 상나라(의 무경)를 끌어들여 주나라 왕실을 도모했다(管·蔡啓商, 惎間王室).”『좌전』정공 4 년
“관숙과 채숙이 주나라를 배반하고, 이적(夷狄)을 끌어 들였다. 이에 주공이 토벌하고 동이를 평정했다”-『후한서』동이전
“(동이족의) 엄군(奄君)과 박고(蒲姑) 등이 상의 녹부(祿父)를 꾀며 말하길 「무왕이 죽고, 현재의 왕은 어리다. 게다가 주공은 의심을 받고 있으니, 이는 백년에 한번 올 기회다. 일을 모도해야 한다」”-『상서대전』
『일주서·작낙해』에 삼감의 반란에 가담한 동이족이 보이는데, 서(徐)와 엄(奄), 그리고
웅영(熊盈)이 바로 그들이다. 서와 엄은 동이족 영성(嬴姓)의 가장 큰 방국에 해당한다. 웅영족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여 초나라로 보는 이도 있지만 초나라는 미성(芈姓)이고, 웅(熊)은 초나라 군주의 씨(氏)일 뿐이다. 그러므로 웅영 역시 영성족이며 영성족의 동이와 회이(淮夷)에 해당한다.
『일주서』에 따르면 주공이 토벌한 웅영족의 중소 방국이 17개국이라 하고, 『여씨춘추』에서는 동이 8개국이라고도 적고 있다. 대체로 삼감의 반란에 참여한 당시의 동이 국가들 중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은 엄(奄)·박고(蒲姑)·봉(丰), 그리고 서국(徐國) 등이 있다.
회이(淮夷)의 글자 “회(淮)”는 “추(隹)”를 따르는데, “추”는 곧 새의 일종으로서 조이족(鳥夷族)의 한 지파이다. 조이족은 새를 토템으로 하는 도등씨(圖騰氏)의 부락이다. 그들의 영역은 원래 회수 유역에 국한되지 않았고 현재의 산동성 중부에까지 이르렀다. 현재의 산동성 담성(郯城)의 북쪽에 있었던 담국(郯國) 역시 영성이며 문헌에 따르면 소호씨의 후예로 전해진다. 이들이 “새 이름으로 관직 명을 삼았다(以鳥名官)”는 기록이 『좌전·소공 17년』에 보인다.
현재의 산동성 박흥현의 동남쪽을 근거로 했던 박고씨(蒲姑氏)의 이름 박고 역시 새의 이름이다. 이들 이전에 그 곳에서 거주했던 부족으로서 상구씨(爽鳩氏) (『좌전·소공 20 년』)가 있는데 여기서 상구 역시 새의 이름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춘추시대의 진(秦)과 조(趙)는 모두 영성(嬴姓)으로서 원래 동이족에 속한다. 영성의 선조는 『사기·진본기(秦本紀)』에 따르면 “玄鳥가 알을 낳고 이 알을 여인이 삼켜 낳은” 대업(大業)으로 전해진다. 대업의 아들이 대비(大費) 즉 백익(伯益)으로서 그는 새와 짐승을 기르는 일을 맡았다. 그의 아들인 대렴(大廉)은 조속씨(鳥俗氏)로도 불린다. 이처럼 고대의 동이족은 대부분 조이족의 지파이다. 동이족의 진과 조, 두 부족은 유목과 수렵을 생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짐승을 기르는데 있어 뛰어난 실력을 보유했고 그 전통을 잘 보존했다.
예를 들면, 조나라(趙)의 선조 조보(造父)는 말을 잘 모는 것으로 유명했고, 진나라(秦)의 선조 비자(非子) 역시 그러했다. “회이를 정벌하여 사녀와 소 그리고 양을 포로로 잡았고, 청동을
바치게 했다(正(征)淮尸(夷), 毆孚(俘)士女牛羊, 孚吉金.”라는 『사궤』의 명문을 보면, 그들이
주나라 당시 청동을 사용할 줄 알았고, 목축을 많이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상대 후기에 이르러 상나라의 정치가 쇠락하면서 동이들은 중원으로 침입하며 일시적으로
크게 세력을 떨치게 된다. 『후한서·동이전』을 보자. “중정(仲丁) 때에 이르러 남이(藍夷)들은 노략질하는 도적이 되었다. 이때부터 때로는 상에 복속하고, 때로는 반란을 일으키며 삼백여 년이 지나게 된다. 무을(武乙) 때 상이 다시 쇠퇴하면서 재차 동이들의 침입이 빈번해졌고, 마침내 그들은 (淮岱)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겨 점차 중원에 살게 되었다.”
『후한서』의 이 기록은 『고본죽서기년』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이들 동이족 중 강대했던 일개 분파가 엄 혹은 상엄(奄/商奄)으로서 그들은 현재의 산동성 곡부(曲阜)에 도읍을 정했는데, 이 곳은 바로 상나라의 반경이 천도하기 이전에 상의 국도였던 곳이기도 하다. 후대
여상(呂尙: 강태공)에게 분봉한 제나라의 임치(臨淄) 주변은 원래 상나라의 봉국 유봉백릉(有逢伯陵)의 땅이었다. 그러나 상대 말기에 이르면 이미 그 곳은 동이족의 일파인 박고(蒲姑)의 근거지가 된다. 같은 시기 동이족의 봉백(丰伯) 역시 이 지역에 거주했다. 이에 대한 기록으로 『좌전·소공 20 년』 “옛날 상구씨가 이 제나라 땅에 거주했고, 그 다음으로 계즉(季萴), 그 다음엔 유봉백릉이, 그 다음에 박고씨가, 그리고 그 다음에 강태공이 봉국으로 받았습니다.”
상나라의 중정(仲丁) 이후로는 끊임없이 중원으로 침입하는 동이족과 상나라 간에 충돌이
빚어졌다. 『고본죽서기년』 “중정이 즉위하여 남이(藍夷)를 정벌하러 나섰다”; 하단갑은 “남이를 정벌했고 다시 반방(班方)을 정벌했다.” (『태평어람』에서 인용) 제을(帝乙)과 제신(帝辛; 마지막 군주 紂)의 시기는 상과 동이족의 전쟁이 더욱 격렬했던 시기다. 은허의 복사 중에는 제신 10년과 15년 두 차례에 걸쳐 人方(夷方)의 대규모 정벌에 대한 점복이 남아 있다.
첫 번째(10년) 정벌에서는 인방과 동시에 임방(林方)을 궤멸시킨 기록이 보인다. 은의 군주 주는 대규모로 동이 토벌에 나섰는데, 이에 대한 진나라(晋) 대부 숙향의 평가가 『좌전·소공 11 년』에 기재되어 있다: “주 임금은 동이의 토벌엔 성공했지만 그로 인해 그 자신은 망가지게 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이를 보면 상 왕조는 동이와의 전쟁에서 물자와 인력에 있어 큰 손실로 인해 국력의 약화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양관, 『서주사』 발췌 요약 】
2018.08.12 08:43
회이淮夷=가이
【회이淮夷 | 하.상.주를 거치는 동안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회수 이남까지 이동하였고 춘추 말년에 초나라에 합병되었습니다. 갑골문에서는 회이를 가이라고 하였습니다. 회이는 지금의 회대 지역의 고애 夷人을 특징적으로 가리키는 명칭이 아니고, 산동반도에 있던 동이족의 분화 및 이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습관적으로 부르는 회이는 대체로 동이에서 분화되어 나온 종족에 대한 전문 호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처:『환단고기』안경전 역주본
엄이 奄夷
【엄이 奄夷 | 엄은 본래 부족명입니다. 엄족은 상나라 때 산동 서남에 국가를 세웠습니다. 엄족은 영씨 성이고 동이 백익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엄국은 주나라 초기에 상의 마지막 왕 주의 아들인 무경의 복국전쟁을 지지했지만, 결국 주공이 동쪽을 정벌할 때 포고(또는 박고)씨와 함께 주에게 멸망 당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엄국이 지금의 곡부 또는 그 부근에 있었다고 봅니다.】
【】출처:『환단고기』안경전 역주본
2019.05.20 14:38
회이(淮夷)는 글자그대로 회수(淮水)유역에 있었으며, 중국 동쪽의 이(夷)족 가운데 가장 강한 나라였다.
그래서 서주(西周)로 부터 춘추.전국시대까지 중국과 팽팽한 대립관계에 있었는데, <상서>와 <죽서기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武王崩, 三監及淮夷叛." <尙書-大誥>
무왕이 붕어하자 3감과 회이가 반란하였다.<상서-대고>
"王師伐淮夷, 遂入奄."<竹書紀年>成王四年
왕의 군사가 회이를 치고 드디어 엄으로 들어갔다.<죽서기년 '성왕4년>
"成王卽政, 淮夷.奄國又叛. 王親政之, 遂
성왕이 정치를 하게 되자 회이. 엄이 또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친정하여 드디어 엄을 멸하고 이를 옮겼다. 이로써 또 수차 반란하였다.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황순종(지식산업사)>
2019.06.07 07:09
회이(淮夷)는 갑골문(甲骨文)에 추이(隹夷)로 많이 나타난다,
회(淮)는 추자(隹字)에 수방(水旁)을 더하여 회(淮)라 칭한다,
자여조동의(字與鳥同意),
회이(淮夷)는 즉 조이(鳥夷)이다.
병음(拼音):zhuī,cuī,wéi
석의(釋義); 단미조적총칭[短尾鳥的總稱짧은꼬리새의 총칭]
석柘實;〔畏(wèi)~〕
옛 “외최(巍崔)”,고준(高峻);옛 “유(惟)”와 같다.
高、精、尖。2.<名>焦點;<動詞>聚焦。
“售”에서는 “隹”가 “고(高)”를 뜻하고,
“淮”에서는 “隹”가 “정(精)”을 뜻하고
“錐”에서는 “隹”가 “첨(尖)”을 뜻하고
“唯”에서는 “隹”가 “초점(焦點) 혹은 “취초(聚焦)”를 뜻한다.
갑(甲)、금문(金文)은 모두 본자(本字)가 있고,자형(字形)은 조형(鳥形)이다。긴꼬리새를 본따 '조鳥'가 되고, 짧은 꼬리 새를 본따 추(隹)가 되었다.([古代把長尾巴的鳥寫成鳥,短尾巴的鳥寫成隹]
23세 아홀단군시기 방고씨가 봉해진 회국(淮國)이 있고, 또 이후 해대땅의 8족 중에 회(淮)가 있으니 이는 회이(淮夷)와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해대땅의 8족(奄,藍,陽,介,隅,萊,徐,淮)이 그 이전에 어떻게 이어져 온 세력인지, 또 서로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를 살펴봐야겠습니다.
乙酉二年 藍國君今達 與靑邱君 句麗君 會于周愷 合蒙古里之兵 所到破殷城柵 深入奧地 定淮岱之地 分封蒲古氏於淹 盈古氏於徐 邦古氏於淮 殷人 望風煌怯 莫敢近之.-『한단고기』
단군세기
(23세 단군 아홀阿忽)재위 2년 을유(B.C.1236)년에 남국(藍國)의 임금 금달(今達)이 청구(靑邱)의 임금, 구려(句麗)의 임금과 주개(周愷)에서 만나 몽고리(蒙古里)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회대淮岱[회수와 태산]의 땅을 평정하고, 포고씨(蒲古氏)를 엄(淹)에, 영고씨(盈古氏)를 서(徐)에, 방고씨(邦古氏)를 회(淮)에 각각 봉하시니, 은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겁내어 감히 근접하지 못하였다.
【『震域留記』 曰
齊俗 有八神之祭 八神者 天主 地主 兵主 陽主 陰主 月主 日主 四時主也 天好陰 故祭之必於高山之下 小山之上 乃祭天太白山之麓之遺法也 地貴陽 故祭之必於澤中方丘 亦卽祭天塹城之壇之餘俗也
天主 祠三神 兵主 祠蚩尤 三神 爲天地萬物之祖也 蚩尤 爲萬古武神勇强之祖
作大霧 驅水火 又爲萬世道術之宗 喚風雨 招萬神 是以 大始之世 恒爲天下戎事之主
海岱之地 旣爲奄藍陽介隅萊徐淮八族之所宅 則八神之說 萌於八族 而盛行於當時也】
-『한단고기』태백일사/신시본기
『진역유기』에 이르기를
제(齊)의 풍속에 팔신제(八神祭)가 있다. 팔신(八神)이란 천주, 지주, 병주, 양주, 음주, 월주, 일주, 사시주를 말한다. 하늘은 음을 좋아하므로 반드시 높은 산의 아래와 작은 산 위에서 제사 지내는데, 곧 태백산 기슭에서 천제를 지내던 유법이다. 땅은 양을 귀하게 여기므로 반드시 못 가운데의 네모진 언덕에서 제사 지내는데, 또한 참성단에서 제천하던 풍속이 이어진 것이다.
천주는 삼신께 제사를 지내고, 병주는 치우천왕께 제사를 지내니, 삼신은 천지만물의 조상이고, 치우는 만고의 무신용강(武神勇强)의 조상이시니,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마음대로 부리고 또 만세의 도술의 조종(祖宗)으로서 바람과 비를 부르고 모든 귀신들을 부르셨다. 이로써 대시(大始)의 세상부터 천하융사(天下戎事:전쟁)의 으뜸(主)이 되셨다. 해대(海岱)의 땅은 이미 엄·남·양·개·우·래·서·회의 8족이 자리 잡고 살았는데, 8신설은 이 8족으로부터 생겨 당시에 번성하였다.
◾“己未 遣上將高力合 與淮軍敗周”-『한단고기』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번한세가 하
(번한 이벌) 기미(BC 842)년에 상장 고력합을 보내어 회군(淮軍)과 함께 주나라를 격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