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22 07:53
한민족의 이칭(異稱)_방이(方夷)
방이에 대해 언급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료에 등장하는 '方夷'
◾“《王制》云:“东方曰夷。”夷者,柢也,言仁而好生,万物柢地而出。故天性柔顺,易以道御,至有君子、不死之国焉。夷有九种,曰 ‘畎夷’、于夷、方夷、黄夷、白夷、赤夷、玄夷、风夷、阳夷。故孔子欲居九夷也. ”-『후한서』동이열전
◾古本竹書紀年 夏紀《竹書紀年》曰:後少康即位,方夷來賓。《後漢書·東夷傳》注
(하나라 소강 즉위때 방이가 내빈했다. *소강(少康) 2년(서기전2117)
◾『죽서기년』曰 後芬卽位, 三年 九夷來禦, 曰畎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
후분 즉위 3년에 구이가 내어했다. 견이, 우이, 방이, 황이, 백이, 적이, 현이, 풍이, 양이이다.
‘方'의 고문
◾ 『康熙字典』을 보면 ‘方’이 “〔古文]牛弓弓
《唐韻》府良切《集韻》《韻會》分房切,音芳..”라 되어 있습니다.
"牛弓弓"
‘방’의 고문에서 보이는 소와 활은 농경과 관련이 있고, 활로써 방위를 정하는 의미와도 관련이 있어 고문에서 ‘방이’의 역할을 짐작하게 합니다.
‘方'의 의미 해석
◾ 『康熙字典』에
[‘方’의 다른 뜻으로 “又《博雅》方,大也,正也”라 하여 ‘크다’,‘바르다’라는 의미를 나타내니, 이족(夷)의 의미를 담았다하겠습니다.].-『康熙字典』
[箋(전) 方(방) 猶嚮也(유향야)
<전>에서는, "방(方)은, 향(嚮)과 같다"고 하였고,
疏(소) 諸言方者(제언방자)
이를 풀이한 소(疏)에서는, "모두 말하기를 방향이라고 하였는데,
皆謂居在他所(개위거재지소) 人嚮望之(인향망지)
모두 거주하는 땅을 이르는 바, 사람이 바라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다.
故云(고운) 方(방) 猶嚮也(유향야)
그러므로 말하기를, 방(方)은, 향(嚮)과 같다"고 한 것이다.]-『康熙字典』
'방(方)'의 의미가 '모두 거주하는 땅으로 이르는 바, 사람이 바라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라 하여 활로써 방위를 정하여 사람들이 거주하는 영역을 지정해주는 역할과 관련이 있습니다.
‘方’과 관명
◾ 또한 ‘方’은 관명으로도 쓰입니다. [又官名。《周禮·夏官·司馬》職方氏,土方氏,懷方氏,合方氏,訓方氏,形方氏。《前漢·朱雲傳註》尚方,少府之屬官也,作供御器物
"직방씨(職方氏), 토방씨(土方氏), 회방씨(懷方氏),合方氏(합방씨) 訓方氏(훈방씨) 形方氏(형방씨)
가 있었다"고 하였다.
"상방(尙方)은, 소부(少府)에 속하는 관직이다. 임금의 기물(器物)을 공급하는 직책이다"라고 하였다.]-『康熙字典』”
◾ ”
職方氏, 掌天下之圖, 以掌天下之地, 辨其邦國都鄙. 四夷·八蠻·七閩·九貉·五戎·六狄之人民 與其財用·九穀·六畜之數要, 周知其利害“-『周禮』 夏官 職方氏
직방씨(職方氏)는 천하의 도서(圖書)를 관장함으로써 천하를 담당하고 방국(邦國)의 도비(都鄙)를 구별한다. 사이(四夷), 팔만(八蠻), 칠민(七閩), 구맥(九貉), 오융(五戎), 육적(六狄)의 인민과 그 재용 및 구곡(九穀), 육축(六畜)의 수요(數要)에 대해서도 그 이해관계를 널리 알았다.
◾ “동북을 유주(幽州)라고 부르며, 물고기와 소금이 유명하고, 가축으로는 4요(擾)가 잘 되고 곡식으로는 3종(種)이 잘된다.[주, 4요는 말․소.양.돼지이고, 3종은 찰기장.메기장.벼이다. 살펴보건대, 유주의 진산(鎭山)은 의무려(醫無閭)로서 요동 땅에 속한다. 물고기.소금이 유명하고 곡식과 가축의 풍요함은 여러 사서에 실린 것이 같다. 삼가 이 조의 앞에 기록하여 물산이 풍부함을 증거하고자 한다.”-『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주례직방씨조(周禮職方氏條)
* '주례(周禮)에서 "직방씨(職方氏)가 사이와 구맥을 관장했다." 고 전하며 직방씨는 주나라 때의 관직명으로 천하의 지도와 토지에 관한 일을 했으며 주변 제후국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관명을 함께 연구하여 ‘방이’와의 관련성을 연구해봄직합니다.
갑골문에 보이는 방(方)
갑골문에는 주변의 다른 나라를 길방吉方, 토방土方, 인방人方, 귀방鬼方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중국에서 발행한 『역사지도집』역사지도집]에는 산동성에 인방人方을 표기하고 있다. 또 갑골문은 은나라가 귀방鬼方을 정벌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후한서>와 <단군세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오호곤의 『중국갑골학사』에 갑골문을 보면 전기인 무정(武丁) 시기와 후기인 제을(帝乙), 제신(帝辛) 때에 전쟁이 가장 빈번하였고, 규모도 비교적 컸음을 알 수 있다. 무정 시대에는 주로 서북족의 강적인 귀방(鬼方), 토방(土方), 방 ( 方 )등과
교전하였다. 】허대동님의 글을 가져옴.
임승국의 『한단고기』단군세기에 “경인47년(BC1291년) 은나라 왕 무정武丁(BC1339-1280)이 귀방(鬼方)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 영지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라 하였습니다.
위 자료를 보면 후대의‘방국(方國)’,‘귀방(鬼方)’도 방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2018.07.31 18:58
2018.08.08 07:34
【】에 언급된 사료 기록을 더 살펴보았으면해서 올립니다.
【-훈육獯鬻,훈육葷粥,험윤獫狁(서주西周 괵계자백반虢季子白磐 청동기 명문銘文)
-산융山戎
-귀방鬼方(곤이昆夷=토방土方)*마방馬方(갑골문과 주례周禮와 역경易經)
-서융西戎,북적北狄,적적赤狄,백적白狄,장적長狄,북융北戎-북막北莫(한단고기)]
◼“당요(唐堯).우禹보다 이전 시대에도 산융山戎.험윤獫狁(험윤玁狁).훈죽葷粥의 제족(諸族)들이 북방의 만지(蠻地)에 거주하고 있었다”-『사기』흉노열전
◼“진작(晋灼)의 주(注)에서 요시왈堯時曰 훈육葷粥 주시왈周時曰 험윤獫狁 진시왈秦時曰 흉노匈奴”-『사기』흉노열전
◼은(殷) 무정(武丁) 시대 갑골문에 토방(土方)이라 불리던 이민족이 변경을 침략하여 주민과 가축을 약탈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주(周, 서기전 1046~256년) 대 『주례(周禮)』와 『역경(易經)』에 토방(土方), 귀방(鬼方), 마방(馬方)이라고 불리던 종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서주(西周, 서기전 770~256년)) 말 청동기 명문에 험윤(玁狁)이라는 유목민을 낙수(洛水) 북방에서 토벌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진(秦) 목공(穆公) 때에 롱(隴) 서쪽에는 면저(緜諸), 곤융(緄戎), 적(翟), 원(豲) 등의 융(狁)이 있었고, 기산(岐山), 양산(梁山), 경수(涇水), 칠수(漆水)의 북쪽에는 의거(義渠), 대려(大荔), 오씨(烏氏), 구연(朐衍), 구유仇猶의 융(狁)이, 진晋의 북쪽으로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이, 연燕의 북으로 동호東胡와 산융山戎이 있다. 산곡(山谷)에 흩여져 각각의 군장(君長)이 통솔하는 100여개의 戎이 있었다. -『사기』흉노열전 】
‘귀방(鬼方)’ 이름의 변천
귀방 – 혼이(混夷)[곶이(串夷)] - 곤이(昆夷), 견이(犬夷) - 귀융(鬼戎) - 견융(犬戎)
【신농씨의 후예가 맨 처음 밭의 경계를 획정해 나누는 법을 발명하였다. 갑골문에 귀방(鬼方)의 ‘귀(鬼)’자는 ‘밭 전(田)’ 자에 ‘사람 인(人)’을 붙인 회의문자로 ‘귀방(鬼方)’이란 곧 이들을 칭한 것이다.
海東經云. 海東有山日度索. 名日鬼門. 萬鬼所聚 <文選注>, 廻風從艮地鬼門來 <隨書>, ‘蕭吉傳’石傍題曰鬼門 <神異經>
이들은 섬서성(陝西省)[경수와 위수] 삼각주의 기름진 땅을 점령하여 신석기 시대 농업을 고도로 발전시킨 전형을 이루었다.
귀방(鬼方)이라는 두 글자는 음과 형이 와전된 것으로 인하여 허다한 변화(滄桑之變)를 겪었다. 방(方)은 곧 방국(方國)의 이름으로, 그 뜻은 은(殷) 대에 비롯하여 주(周) 초로 계승되었다.
서주(西周) 이후에는 귀방이라는 하나의 이름이 변해 「시경」<대아(大雅)면>에 '혼이태의(混夷태矣)'라 한 혼이(混夷)인데, 음이 근사치로 와전되어 황의(皇衣)가 되어 곶이재로(串夷載路)의 곶이(串夷)가 되었다.
「맹자」<양혜왕편>의 곤이(昆夷)가 되었으며, 「사기」<흉노전>의 곤이(?夷)와 「제세가(齊世家)」의 견이(犬夷)가 되었다.
「죽서기년」에 칭하기를 귀방(鬼方)이 귀융(鬼戎)이 되었다 하고, 「국어(國語)」「주어(周語)」에 도리어 칭하기를 '견융(犬戎)'이 되었다 했다. 혼(混), 곤(昆), 곤(?)은 본래의 글자를 바꾼 것이다.
귀방(鬼方)은 곤이(昆夷)로, 곤이(昆夷)는 또한 훈죽( ?? )과 같이 되었으니, 「맹자」<양혜왕(梁惠王)> 편에 설명하기를 '태왕(太王)은 훈죽을 섬기고 문왕은 곤이를 섬긴다(太王事??文王事昆夷)' 했다. 】
【】는 <안원전담론190>에서 부분부분 발췌한 자료입니다.
『한단고기』의 귀방(鬼方)
庚寅四十七年 殷主武丁 旣勝鬼方 又引大軍 侵攻索度令支等國 爲我大敗 請和入貢.
壬辰四十九年 蓋斯原褥薩高登 潛師襲鬼方減之 一群養雲二國 遣使朝貢 於是高登 手握重兵 經略西北地 勢甚强盛 遣人請爲右賢王 帝憚之不允 屢請乃許 號爲豆莫婁.
(21세 소태단군)재위 47년 경인(B.C.1291)년에 은나라 왕 무정(武丁:22세)이 귀방(鬼方)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索度)·영지(令支) 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에게 대패하여 화친을 청하고 조공을 바쳤다.
재위 49년 임진(B.C.1289)년에 개사원의 욕살 고등(高登)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鬼方)을 습격하여 멸망시키니, 일군(一群)국과 양운(養雲)국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성해졌다. 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와 우현왕(右賢王)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소태단군께서는 이를 위태롭게 여겨 허락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거듭하여 이를 청하므로 허락하시고 두막루(豆莫婁)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