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18 06:41
한민족의 이칭(異稱)_견이(畎夷)
『한단고기』삼성기 전 하편에 기록되어 있는 “마침내 재물과 보물을 꾸리고 십간십이지의 신장(神將)들을 이끌고 공공(共工), 유소(有巢), 유묘(有苗), 유수(有隧)와 함께 삼위산의 라림동굴(拉林洞屈)에 이르러 군주가 되니 이를 제견(諸畎)이라하고 그를 반고가한(盤固可汗)이라 했다.”라는 기록에서 ‘제견(諸畎’에 근거하여 견이족 자료를 찾아보겠습니다.
【규원사화(圭園史話)에 “견이(畎夷) ‧ 풍이(風夷)는 서남으로 나뉘어 옮겨 살았으며 풍이는 치우(蚩尤)의 한 족속이다”라는 기록은 『한단고기』삼성기 전 하편에 기록되어 있는 “마침내 재물과 보물을 꾸리고 십간십이지의 신장(神將)들을 이끌고 공공(共工), 유소(有巢), 유묘(有苗), 유수(有隧)와 함께 삼위산의 라림동굴(拉林洞屈)에 이르러 군주가 되니 이를 제견(諸畎)이라하고 그를 반고가한(盤固可汗)이라 했다.”라는 기록에 근거하면 『규원사화』에 “견이(畎夷)”와 한단고기의 “이를 제견(諸畎)이라 하였다”는 기록 내용은‘견이(畎夷)’들의 이주를 보여주고 있다.
규원사화의 “치우씨의 후손은 서남지방을 차지하고 살았다.”는 기록과 한단고기 태백일사 신시본기, 『진역유기』에 기록된 “이때부터 치우, 고시, 신지의 후손들은 지극히 왕성하게 번영하였다.”는 새로운 땅을 찾아 이동하여 번영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중국의 역사가 왕동령(王桐齡)은 『중국민족사』(p.4)에서 “ 4000년 전(‧‧‧) 현재의 호북 ‧ 호남 ‧ 강서 등지는 이미 묘족이 점령하고 있었고, 중원으로 한족(漢族)이 들어오게 된 후에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으며,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이다.”라는 기록과 규원사화의 “치우씨의 후손은 서남지방을 차지하고 살았다.”는 내용은 일치한다.
위 기록들은 견이의 이동과 견이가 치우씨들이며 그들이 사는 땅을 구려라고 하였으며 이 치우씨 후손들이 바로 묘족임을 말해주고 있다. 】
2018.04.21 06:27
2018.05.22 08:54
태호시기의 발명 -견전(畎田)과 견이(畎夷)
祝玉湖编著的《中华远古帝王谱》- <伏羲氏五·太昊>중에서
一是进行农田改革,放水浇田,史称“畎田”。当时气候多雨,洪水不断泛滥,黄河水携带着黄土高原的大量泥沙冲击着下游洼地,形成大面积的平原。当时人们称这种河水冲击形成的平原为“息土”、“息壤”、“宿沙”、“夙沙”。太昊时期发明的“畎田”就是在这些平原上开沟挖渠,即可以灌溉农田,又可排泄洪涝,是农业文明的大发展。伏羲氏因有畎田之利,后被周边氏族称之为畎夷。
2018.07.25 09:44
祝玉湖编著的《中华远古帝王谱》- <伏羲氏五·太昊>중에서
一是进行农田改革,放水浇田,史称“畎田”。当时气候多雨,洪水不断泛滥,黄河水携带着黄土高原的大量泥沙冲击着下游洼地,形成大面积的平原。当时人们称这种河水冲击形成的平原为“息土”、“息壤”、“宿沙”、“夙沙”。太昊时期发明的“畎田”就是在这些平原上开沟挖渠,即可以灌溉农田,又可排泄洪涝,是农业文明的大发展。伏羲氏因有畎田之利,后被周边氏族称之为畎夷。
-번역
祝玉湖가 저술한 《中华远古帝王谱》- <伏羲氏五·太昊(복의씨오·태호>중에서
하나는 농지개혁을 하는 것으로, 수문을 논에 물을 대는 것이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畎田(견전)”이라한다. 당시 기후가 비가 많이 내려 물이 범람하여 끊임없이 홍수가 발생하므로, 황하의 물이 황토고원의 많은 진흙을 하류의 낮은 지대에 쌓여서 넓은 평원을 형성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 강물이 축적되어 형성한 평원을 “息土(식토)”、“息壤(식양)”、“宿沙(숙사)”、“夙沙(숙사)”라 하였다. 태호시기에 발명한 “畎田(견전)”은 바로 이 평원에서 도랑을 파는 것으로, 즉 관개로 농토에 물을 댈 수 있고, 또 홍수나 침수시 물을 배출하는 것으로 농업문명의 대발전이었다. 복희씨는 ‘견전’의 이로움으로 인하여 후에, 주변씨족들에게 ‘견이(畎夷)’로 불렸다.
2018.08.03 19:03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71쪽
犬戎國. 春秋時夷國. 亦名 夷. 又名昆夷在今陝西鳳翔縣北. 漢書注引山海經. 黃帝生苗龍.
苗龍生融吾. 融吾生弄明. 弄明生白犬. 白犬有二牝牡. 是爲犬戎.
견융국(犬戎이란 白犬의 대명사이다. 백견은 본래 氷夷라 했으며 馮夷 또는 河伯이라 한다)은 춘추 때의 이국(夷國)이다.
견이라고도 하며 곤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섬서성 봉상현 북쪽에 있었다.
한서에서 산해경을 인용해 이르기를, 황제는 묘룡을 낳았고, 묘룡은 융오를 낳았으며, 융오는 농명을 낳았다. 농명은 백견을 낳았는데, 백견의 무리들이 모여 견융국이 되었다.
삼성기전(三聖紀全) 하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十干十二支之神將與空工有巢有苗有燧偕至三危山拉林洞窟而立爲君謂之諸 是謂盤固可汗也.
십간 십이지의 신(神)과 더불어, 공공씨, 유소씨, 유묘씨, 수인씨 등은 모두 삼위산에서 나무집을 짓고 살거나 동굴 속에 살았던 군장들이다. 이들 (견이 夷)의 수장은 한국(汗國)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반고(盤固)이다.
2018.09.08 08:15
위의 글에서 유수有燧를 수인씨로 추측하는거 같은데요..
견이는 서쪽에 안착한 무리인 서이(西夷) 중에서 치수사업을 한 이들을 부르는 명칭으로 보는게 맞을거 같습니다.
위 글에서는 누락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데요,
諦畎 是謂盤固可汗也. 라고 삼성기전에 있네요.
'제견諦畎'은 밭의 물길을 보살피는 걸 뜻합니다.
이것이 치수사업이고, 복희씨가 치수를 한 일이 있기에 아마 견이라고 불렀겠지요.
그리고 한단고기 주석에 견은 융을 뜻한다고 되어 있으니 이것은 후대에 치우씨족의 무기와 합쳐져 견융이 됩니다.
결국, 견이, 서이, 서융, 융적은 한 부류로 보아야 할 거 같네요.
위글에서 복희씨를 견이라고 주장하는 요점은
1. 서쪽에 살았다.
2. 치수사업을 했다.
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건 한 시기에 지협적인 부분을 말 하는거 같습니다.
김현주씨 인용글에도 나와 있네요.
"복희씨가 치수사업을 잘해서 후대에 그를 견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견이라는 말은 후대에 생겨난 말이다.
결국, 서이 중에서 치수사업을 한 사람들을 견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해석하는게 맞을 거 같네요.
견(畎):
〔古文〕甽《唐韻》姑泫切《集韻》《韻會》《正韻》古泫切,音狷。《說文》本作,水小流也。《書·益稷》予決九川,距四海,濬畎澮距川。《傳》一畝之閒,廣尺深尺曰畎。
又疏通流注皆曰畎。《乾坤鑿度》聖人畎流大道,萬彙滋溢。
又山谷通水處。《書·禹貢》羽畎夏翟。《註》羽山之谷。
又《集韻》畎迥切,音熲。義同。書岱畎絲枲。劉昌宗讀。
又苦泫切,音犬。《字彙補》西方地名。《史記·匈奴傳》周西伯昌伐畎夷氏。《集韻》亦作。
▶견이(畎夷):
西戎種族的一支。多分布於今陝西省涇渭流域一帶。史記.卷一一○.匈奴傳:「其後百有餘歲,周西伯昌伐畎夷氏。」亦稱為「犬戎」。
출처
:http://www.zdic.net/z/1f/kx/754E.htm[漢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