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17 06:42
한민족의 이칭(異稱)_양이(良夷)
일주서』왕회편에 의하면 ‘양이(良夷)’를 ‘낙랑의 이(樂浪之夷)’라 하였다.
언어적으로 접근하면 ‘樂浪’ 이란 두 글자는 ‘良’자의 완독(緩讀) 혹은 반절(反切)이니 ‘양이’를 ‘낙랑이’라고 한 것이다. 또 ‘良夷’의 ‘良’과 ‘萊族’의 ‘萊’의 상고음(上古音)이 통한다하여 양이의 근원을 래이에서 찾는다.
아래 자료에 의하면 래족(萊族)의 일부가 동북지역으로 들어간 뒤부터, 양이(良夷) 혹은 낙랑(樂浪)이라고 불리어지며 문헌에 기재되었다고도 한다.
良夷는 래이족의 일부, 래이는 곧 낙랑이, 양이는 래이족이 흩어지면서 북경〜하북 동북부의 발해연안을 거쳐 이동했다. 良夷의 거주지는 漢나라때 樂浪郡이 있던 곳이다.
梁貊은 西漢〜西晉 시기에 동북지역에 있었다. 梁貊은 良夷가 거주지를 북녁으로 옮긴뒤 지금의 太子河 상류 기슭에 정착하였는데, 바로 長白산맥과 千山산맥이 만나는 지대이다. 따라서 高句麗族의 서쪽, 漢때 高句麗縣의 남쪽이 된다.
‘양이’는 후대에 거론된 ‘良夷’도 있지만 구이(九夷)인 황이(黃夷), 현이(玄夷), 방이(方夷), 견이(畎夷), 우이(于夷), 양이(陽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남이(藍夷) 중의 ‘양이(陽夷)’도 있어 함께 그 근원을 찾아야 한다. 비록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한자의 뜻보다는 소리를 중심으로 기록된 사례가 많은 것을 봤을 때 ‘良夷’와 ‘陽夷’를 같은 이름의 다른 표기로 볼 수도 있으니 사료를 찾아 그 연계성을 알아보고자 한다.
【1.良夷의 족원(族源)
《逸周書•王會篇》: “<良夷>在子. 在子, ●身人首, 脂其腹, 炙之藿, 則鳴曰‘在子’.” 孔晁 注: “<良夷>, <樂浪>之夷也.”
여기서 良夷는 樂浪夷라고도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 민족의 원류에 대해 그 출자가 貊族이라는 설이 있다.: “가장 동쪽에 있는 貊人이 조선반도의 ‘良夷’이다” (佟冬等). 실제로 良夷와 貊族 둘다 東夷에서 비롯되었기는 하지만, 良夷의 족원(族源)을 좇아 거슬러 올라가도 貊族의 신상(身上)에는 미치지 못한다. 貊族은 東夷의 시원지(始源地)인 지금의 산동지방으로부터 이동해 나가서, 먼저 지금의 화북(華北)지방에 머무르다가, 나중에 동북지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良夷가 지금의 하북(河北) 등지를 거쳐 동북으로 들어간 시기는 貊族보다 조금 빠르다. 그들이 周나라 초에 “成周之會”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이 그 증거이다.
良夷族이 東夷에 속한다함은 긍정적이다.《爾雅》에 보이는 “九夷”에 대한 이순(李巡)의 注에도 良夷가 나온다. 여기서 말하길 “九夷란 玄菟, <樂浪>, 高麗, 滿飾, 鳧臾, 索家, 東屠, 倭人, 天鄙이다.”라고 하였다. 그럼, 良夷는 東夷중에서 어느 한갈래 민족에서 비롯되었을까? 그 족명(族名)으로보아 마땅히 東夷 萊族에서 비롯되었다.
良夷의 “良”과 萊族의 “萊”의 상고음(上古音)은 서로 통할 수 있다고 한다. 良夷는 또한 樂浪이라고도 불리는데, “樂浪” 두 글자는 당연히 “良”자의 완독(緩讀) 혹은 반절(反切)이다.
필자는 거듭해서 실증한다. 상고시대, 東夷 萊族은 오늘날의 산동 동부 및 산동반도에서 활동하였다. 그렇기때문에 많은 지명이 그 민족의 이름에서 기원하는데, “萊”자 지명은 우선 문제삼지 않고 오로지 “樂”자만 말하기로 한다.
《寰宇通志•靑州府》에 지금의 博興縣은 漢때 千乘郡에 속하는데 郡 밑에 “樂安縣”이 있었다고 실려있다.
《嘉慶一統志•武定府》에 지금의 惠民縣은 唐때는 “樂安郡”인데, 宋때도 여전히 그러했으며, 明때 “樂安州”로 개칭되었다고 실려있다.
《寰宇通志•武定州》에 漢의 平原郡 밑에 “樂陵縣”을 두었는데 建安 말에는 樂陵郡 치소가 되었으며, 隋 開皇 초에는 폐군(廢郡)되었지만, 지금 이름은 여전히 “樂陵”이다 라고 실려있다.
산동 곁에 있는 하북 남부에도 “樂”자 지명이 있다.《漢書•地理志》및《嘉慶一統志•河間府》에 지금의 獻縣은 漢때 이 땅에 河間國을 두었고, 밑으로 “樂城縣”이 있었는데 그 땅에는 “樂壽亭”이 있다고 적혀있다.
무릇 이러한 “樂”자 지명은 죄다 “萊”자에서 전가(轉假)된것이다 (王獻唐). 萊族의 한갈래가 동북을 향하여 옮겨가며 살때, 오늘날의 북경〜하북 동북부의 발해연안을 거쳐갔었다.
오늘날의 북경 房山縣은,《嘉慶一統志•順天府》에 漢때는 良鄕縣이라고 불렀는데 옛설에 이 땅의 사람들의 풍속이 순박하고 선량해서(民風淳良) 이름이 “良鄕”이 되었다고 한다 라고 적혀있다. 상고시대의 변두리 땅 사람들은 규제가 적고 간소하였거늘, 民風淳良하지 않은 땅이 어디이길래 어째서 오로지 이 땅만 “良鄕”이라고 불리었는가? 그래서, 民風淳良설은 잘못된 뜻으로 보인다. “良鄕”이라고 불린 진정한 원인은 萊族의 한갈래가 옮겨갈때 일찍이 이곳을 지나갔기 때문이다. “良鄕”이야말로 良夷가 일찍이 와서 살다가 거쳐간 지방이다. 현재 하북 동북부의 발해 서안(西岸)에는 아직도 “樂亭”란 명칭이 있는데, “樂亭”도 萊夷에서 비롯된것이며, “樂亭”이란 樂浪夷의 亭이다. 무릇 이것들은 모두 萊夷人이 동북으로 옮겨갈때 머물렀던 지명의 살아있는 화석이다.
萊族의 일부가 이렇게 동북지역으로 들어간 뒤부터, 良夷 혹은 樂浪이라고 불리어지며 문헌에 기재되었다.
2. 良夷의 거주지 및 그들과 중원의 관계
良夷의 거주지는 漢나라때 樂浪郡이 있던 곳이다.《漢書•地理志》: “樂浪郡, 武帝元封三年開.” 元封 3년은 기원전 108년이다.
呂思勉은 “漢의 군현(郡縣)은 그러므로 종족 마을(種落)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이 뜻은, 본래는 모두 漢代 군현 중의 민족의 이름을 그대로 좇아서 따왔다는 말이다. 樂浪郡도 예외가 아닌데, 그 땅에 樂浪夷가 살았기때문에 그것이 郡의 이름이 되었다.
樂浪郡의 범위는 조선의 평안남도•황해남북도•강원도와 함경도 땅에 상당한다. 이 지역이 良夷의 활동범위이다.
周나라 초, 良夷는 “成周之會”에 참가해서 방물(方物)을 바쳤다. 이것은 당시의 良夷는 이미 周왕조의 관할하에 있는 일개 동북 소수민족인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그 거주지는 周 왕조의 판도에 있어야만 하며, 周왕조는 그 땅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였다고 보여진다.
“成周之會”에서 良夷가 바친 방물은 “在子”이다. “脂其腹, 炙之藿”란 기사로 추정하여 판단하건대, “在子”는 일종의 바닷짐승이어야 한다. 어쩌면 물개랑 바다표범 종류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良夷는 어로 및 수렵경제 위주이다.
《論衡•恢國》에서 말하였다.:
“方今哀牢•鄯善•諾(婼羌)降附歸德. …….巴•蜀•越嶲•鬱林•日南•遼東•<樂浪>, 周時被髮椎髻, 今戴皮弁; 周時重譯, 今吟《詩》•《書》.”
이 기사를 근거로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周때의 良夷는, 머리에 상투를 틀었으니[被髮椎髻], 여전히 東夷族계의 고유 풍속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周때, 중원 華夏와의 교류시 언어상 어려움이 있어 “重譯”을 해야했으니, 여러번 통역의 중개를 거쳤다. 당시 良夷의 사회발전은 또한 비교적 낮았다. 東漢 시기에는 크게 변화하여 이미 머리에 피변(皮弁)을 쓰기 시작하고, 《詩經》과 《書經》를 읽고 읊었다. 교류를 통해서 중원문명이 끊임없이 良夷 등 동북 소수민족에 흡수되었다.
漢•魏때, 良夷중의 절대 대부분이 高句麗 민족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3. “梁貊”에 관하여
梁貊은 西漢〜西晉 시기에 동북지역에 있던 일개 부족인데, 그들에 대한 주요 기사는 《三國史記》에 있다.
梁貊의 족속은 貊族의 일부라는 주장이 있고(陳槃), 또한 小水貊의 별칭으로 여기는 설도 있다(楊保陵 1987). 이러한 설들은 모두 일관되게 그들은 貊과 동족인데, 貊과 梁貊의 관계를 전체와 개체•민족과 부족의 관계로 여긴다. 그러나 실제로는 梁貊은 良夷의 일부이어야만 하며, 貊과는 그러한 관계가 없다.
梁貊의 “梁”은 良夷의 “良”과 같은데 발음이 비슷하여 전가된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貊은 어떤 특정 부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통칭(通稱)인데 - 이 책의《貊族의 발전과 변화》1장에서 이미 서술하였다 - 貊이 통칭으로 쓰일 때는 “夷”와 같은 뜻이다. 그래서 梁貊은 “梁夷” 또는 “良夷”가 된다.
高句麗族이 나라를 처음 세웠을 무렵, 梁貊은 그 나라 서부에 있는 몹시 강대한 부족이었는데 高句麗와 여러차례 치고 받고 싸웠었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琉璃王紀》에 “(三十三)秋八月, (琉璃)王命烏伊•摩離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 라고 하였다. 琉璃王 33년은 西漢 天鳳 원년 즉 AD 14년이라고 한다. 梁貊은 高句麗國 속으로 병합당해 들어간뒤부터는 高句麗國하의 한 부족이 되었다.
梁貊은 高句麗國에 의하여 병합된 뒤에도, 그 부족은 여전히 끼리끼리 모여 살았으며 西晉 말까지도 아직 동화되지 않았었다. 《三國史記•高句麗本紀•新大王紀》拜答爲國相, 加爵爲沛者, 令知內外兵馬兼領<梁貊>部落.” 梁貊은 본디 비교적 강대하였기에, 정복당한지 수십년 뒤에도 高句麗國 전체는 여전히 그들에 대해 경계심리를 품었으며, 梁貊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였다. 때문에 기사에서 보듯이 고위 관원을 國相으로 임명하여 梁貊의 일을 관리하게 하였다.
또한《三國史記》에, 烽上王이 원년 (292)에 공신인 達賈를 죽이자 백성들이“微安國君, 民不能免<梁貊>•肅愼之難 今其死矣 其將焉託”라고 원성어린 탄식을 하였다. 이것도 梁貊이 정복당한 후에도 高句麗에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 틀림없음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적어도 晉 초, 高句麗에 대한 梁貊의 관계는 여전히 때로는 반란을, 때로는 정복되는 관계였다. 대체로 西晉 말에 두 민족이 융합되기 시작하여 東晉 시기에는 분별할 수 없게되고, 때문에 사적(史籍)에는 두번 다시 梁貊에 대한 기재는 보이지 않게 된다.
梁貊의 거주지는 지금의 太子河 자락이다. 太子河의 옛 이름은 “梁水”인데, 이 이름은 梁貊의 족명(族名)을 그대로 좇아 따온것이다. 문헌근거로써,《三國史記》의 “梁貊之谷”이란 지명도 이와같은 이치로 나온것이며 또한 梁貊의 옛땅임이 확증된다. 그 땅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梁貊은 良夷가 거주지를 북녁으로 옮긴뒤 지금의 太子河 상류 기슭에 정착하였는데, 바로 長白산맥과 千山산맥이 만나는 지대이다. 따라서 高句麗族의 서쪽, 漢때 高句麗縣의 남쪽이 된다. 】
【】의 [출처]동북공정 - 양이의 족원|작성자역사산책, https://blog.naver.com/zhixin/40025760625
참고)
고구려가 양맥(梁貊)[태자하(즉양수梁水) 상류지역의 맥(貊)]을 정벌하고 이곳에다 성을 새로 쌓고 양성(梁城)이라 불렀는데 그 이름이 중국 길림성 집안시(集安市)의 고구려 ‘호태왕(好太王)’ 비석에 조각되어 있다. 지금 중국에서 이 성을 또 맥성(貊城)이나 양맥성(梁貊城)이라고도 부른다.
2018.08.04 12:20
2018.08.05 01:02
逸周書&良夷
"良夷在子,在子幣身人首,脂其腹,炙之藿則鳴曰在子。揚州禺,禺,魚名,解隃冠,發人。麃麃者,若鹿,迅走"-
『일주서逸周書』
『일주서逸周書』 기록에 의하면 양이(良夷)는 낙랑(樂浪)이며 예인(穢人) 이요
양이(良夷)는 양주(揚州) 우우(禺禺)인데 물고기 이름으로 해유구(解隃寇)이고, 발인(發人)은 록록(廘廘인데 마치 록(廘)이 신주(迅走)하는 것 같다.
일주서에 발(發)이라는 것은 록(鹿) 즉 사슴이 질주하는 형상을 의미한다. 또한 양주(揚州)와 발인(發人)은 양이(良夷)라 하였다. 양이는 일주서주(逸周書註)에 “성주(成周)의 회합에서 서면(西面)한 자는 정북방의 양이(良夷)로, 재자(在子)이다. 양이는 바로 낙랑(樂浪)의 오랑캐로 기이한 짐승을 공물로 바쳤다”라고 하여 양이가 낙랑으로 표현되고 있다. 정리하면 발인(發人)은 양이(良夷)이며 낙랑(樂浪)이다. 급총주서(汲冢周書)에도 '양이(良夷)는 자(子;북쪽 방향)에 있다'하고 그 주에 '양이는 낙랑에 사는 이(夷)다'라 하여 양이(良夷)이며 낙랑(樂浪)이다. 또 일주서(逸周書)에 “성주(成周)의 회합에서 서면(西面)한 자는 정북방의 예인(穢人) 전아(前兒)인데, 전아는 원숭이와 같이 생겼다”라고 하여 양이(良夷)이며 낙랑(樂浪)이며 예인(穢人)으로 기록하고 있다.
북한 리지린은 일주서 주석 중에 양주(揚州)에 대해 “說文, (魚禺)魚名 , 皮有文, 出樂浪東(日施)”을 소개하고 있는데 낙랑의 동이현東(日施)縣에서 나는 특산물을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리지린은 예(穢)가 중국 옛 발음으로 ‘후이’인데 이것이 불이(不二), 불이(不而), 불(不), 발(發), 벌(伐), 부리(夫里)와 음이 통한다고 말한다. 『管子관자』에서의 발조선(發朝鮮)은 양이(良夷)이며 예인(穢族)이다.
“汲冢周書曰 良夷在子 註曰 良夷樂浪之夷”
참고)
【◾
”唯禹之功爲大披九山通九澤決九河定九州, 各以其職來貢 不失厥宜 方五千里 至于荒服.
南撫交阯,北發, 西 戎, 析枝, 渠廋, 氐, 羌, 北 山戎, 發, 息愼. 東 長, 鳥夷,
四海之內 咸戴帝舜之功. “-『사기』오제본기 순(舜)조
오직 우(禹)의 공이 컸는데, 9산을 깍고 9호수를 통하게 하고 9강이 뚫리게하여 9주(州)를 평정했다. 각각의 방향에서 와서 공물을 바쳤다. ,,,,,사방 오천리에 이르렀다. 황복의 남쪽에서는 교지, 북발에서 왔고, 서쪽에서는 융, 기지, 거수, 저, 강이 왔다. 북쪽에서는 산융, 발, 식신(息愼)이 왔고, 동쪽에서는 장이(長吏), 조이(鳥夷)가 왔다. 사해지내(四海之內)가 된 것은 모두 순임금의 공이었다.
◾ ”管子輕重篇發朝鮮之文皮毷服以爲幣“
《관자(管子)》 경중편(輕重篇)에서, 발조선(發朝鮮)의 문채나는 가죽 옷으로 내어 폐백을 삼는다 】
* 조이(혹은)도이가 이 풍습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발조선은 조이(도이)가 된다.
◾ 관자 권 23
發朝鮮之文皮一筴也/八千里之發朝鮮/發朝鮮不朝 발조선의 문피도 그중에 하나 낀다. 즉 발조선의 문피도 좋다라는 말입니다)/발조선까지 8백리/발조선이 조공하지 않다)
【『일주서』
王會解:
成周之會,墠上張赤帟陰羽,天子南面立,絻無繁露,朝服八十物,搢珽。唐叔、荀叔、周公在左,太公望在右,皆絻,亦無繁露,朝服七十物,搢笏,旁天子而立於堂上。堂下之右,唐公、虞公南面立焉,堂下之左,殷公、夏公立焉,皆南面,絻有繁露,朝服五十物,皆搢笏。為諸侯之有疾病者,阼階之南,祝淮氏、榮氏次之,珪瓚次之,皆西面,彌宗旁之,為諸侯有疾病者之醫藥所居,相者太史魚、大行人皆朝服,有繁露。堂下之東面,郭叔掌為天子菉幣焉,絻無繁露。內臺西面正北方,應侯、曹叔、伯舅、中舅,比服次之,要服次之,荒服次之,西方東面正北方,伯父、中子次之。方千里之內為比服,方二千里之內為要服,方三千里之內為荒服,是皆朝於內者。堂後東北為赤帟焉,浴盆在其中,其西,天子車立馬乘六,青陰羽鳧旌,中臺之外,其左泰士,臺右彌士,受贄者八人,東面者四人。陳幣當外臺,天玄毼宗馬十二,玉玄繚璧綦十二,參方玄繚璧豹虎皮十二,四方玄繚璧琰十二。外臺之四隅張赤帟,為諸侯欲息者皆息焉,命之曰爻閭。周公旦主東方所之青馬黑????,謂之母兒,其守營牆者,衣青操弓執矛,西面者正北方,稷慎大麈,穢人前兒,前兒若獮猴立行,聲似小兒,良夷在子,在子幣身人首,脂其腹,炙之藿則鳴曰在子。揚州禺,禺,魚名,解隃冠,發人。麃麃者,若鹿,迅走,俞人雖馬,青丘狐九尾,周頭煇羝,煇羝者,羊也。黑齒白鹿白馬。白民乘黃,乘黃者,似狐,其背有兩角,東越海????,歐人蟬蛇,蟬蛇順食之美,於越納,姑妹珍。具區文蜃,共人玄貝,海陽大蟹,自深桂,會稽以????,皆西嚮,正北方。義渠以茲白,茲白者,若白馬,鋸牙食虎豹。央林以酋耳,酋耳者,身若虎豹,尾長參其身,食虎豹。北唐以閭,閭似隃冠。渠叟以鼩犬,鼩犬者,露犬也,能飛食虎豹。樓煩以星施,星施者,珥旄。卜盧以䊵牛,䊵牛者,牛之小者也。區陽以鱉封,鱉封者,若彘,前後有首。規規以麟,麟者,仁獸也。西申以鳳鳥,鳳鳥者,戴仁抱義掖信。氐羌以鸞鳥。巴人以比翼鳥。方煬以皇鳥。蜀人以文翰,文翰若皋雞。方人以孔鳥。卜人以丹沙。夷用????木。康民以桴苡,桴苡者,其實如李,食之宜子。州靡費費,其形人身,反踵自笑,笑則上脣弇其目,食人,北方謂之土螻。都郭生生欺羽,生生若黃狗,人面能言。奇幹善芳,善芳者,頭若雄雞,佩之令人不昧,皆東嚮。北方臺正東,高夷嗛羊,嗛羊者,羊而四角。獨鹿邛邛,邛邛善走者也。孤竹距虛。不令支玄模。不屠何青熊。東胡黃羆。山戎戎菽,其西般吾白虎黑文。屠州黑豹,禺氏騊駼,大夏茲白牛,茲白牛,野獸也,牛形而象齒。犬戎文馬,文馬赤鬣縞身,目若黃金,名吉黃之乘。數楚每牛,每牛者,牛之小者也。匈奴狡犬,狡犬者,巨身,四足果。皆北嚮。權扶玉目。白州比閭,比閭者,其華若羽,伐其木以為車,終行不敗。禽人菅。路人大竹。長沙鱉,其西,魚復鼓鐘鐘牛。揚蠻之翟。倉吾翡翠,翡翠者,所以取羽。其餘皆可知自古之政。南人至,眾皆北嚮。 】
2018.08.09 08:39
아직은 해석보다 자료자체로 보겠습니다.
■發息愼=숙신(肅慎)
『史記』와 『大戴禮記(대대례기)』에서는 '山戎發息愼', 『설원(說苑)』에는 '山戎肅愼'이라고 하였으니,표면적으로는 '發息愼'을 '숙신(肅慎)'으로 본 것으로 이해가 된다.
◾“禹之功為大...方五千里至于荒服/南撫交阯北發/西戎析枝渠廋氐羌/北山戎發息愼/東長鳥夷”-『史記』
禹의 공로는 위대하다…중략…사방 5천리나 달해 강역이 황복(荒服)에 이르게 되었다. /남쪽으로는 교지(交阯)와 북발(北發) 을 위무하고/, 서쪽으로는 융족 석지(析枝) 거유(渠庾) 저족(氐族) 강족(羌族)을 아우르고, /북쪽으로는 산융(山戎) 發息愼을 위무하고 /동쪽으로는 장이(長夷) 조이(鳥夷)를 아우르게 되었다.
◾“南撫交趾大教/鮮支渠搜氐羌/北山戎發息愼/東長夷鳥夷羽民”-『大戴禮記(대대례기)』
남쪽으로 交趾(교지) 大教(대교)를, (서쪽으로는) 鮮支(선지) 渠搜(거수) 氐(저) 羌(강)을, 북쪽으로는 山戎(산융) 發息愼을, 동쪽으로는 長夷(장이) 鳥夷(조이) 羽民(우민)을 위무하였다.
◾南撫交趾大發/西析支渠捜氐羌/北至山戎肅愼/東至長夷島夷-『설원(說苑)』
남쪽으로 교지(交趾)와 대발(大發)을, 서쪽으로 석지(析支) 거수(渠捜) 저(氐) 강(羌)을, 북쪽으로 산융(山戎)과 숙신(肅慎)을, 동쪽으로 장이(長夷)와 도이(島夷)을 위무하였다.
이 자료는 좀 다르게 나타난다. '發肅慎'을 둘로 나누어 본다. '發'이 독자적 국명이다.
◾“是以教通四海之外北發肅慎”【晉灼疑北發為國名大戴禮孔子曰舜明民教通于四海之外北發肅慎大教鮮支渠搜氐羌南撫交趾按周書有發人乃東北夷則發與肅慎二國名】-『路史』
사해 밖에까지 가르치고 교통하였는데 북으로는 發(발)과 肅慎國(숙신국)【晉灼(진작)은 “北發은 국명(國名)일 것이다. 大戴禮(대대례)에 孔子(공자) 가로되 舜(순)이 백성을 밝게 가르쳐 사해의 밖으로 北으로 發(발)과 肅慎(숙신) 大教(대교) 서쪽으로 鮮支(선지) 渠搜(거수) 氐(저) 羌(강)에, 남으로는 交趾(교지)를 위무하였다고 했다. 생각컨데 周書(일주서)에 發人(발인) 즉 東北夷(동북이)가 있는데 즉 發(발)과 肅慎(숙신)이 두 개의 국명이다.】
■發人=東夷
◾“發人鹿鹿者若鹿迅走(發亦東夷迅疾)”-『逸周書』
發人(발인)은 사슴을 가져왔다. 鹿人(록인 즉 鹿者) 는 사슴처럼 빨리 달린다【發(발)도 역시 東夷(동이)인데 매우 빠르다】
◾“發朝鮮之文皮一筴也/八千里之發朝鮮/發朝鮮不朝” -『관자』권23
발조선의 문피도 그중에 하나 낀다. 즉 발조선의 문피도 좋다라는 말입니다)/발조선까지 8백리/발조선이 조공하지 않다)
고구려의 선조 고이(高夷)가 예인(穢人)(지금의 길림 송화강 유역), 양이(良夷)(지금의 대동강 유역), 발인(發人)(지금의 요녕성 동북부)과 함께 나와있고, 주(周)의 신속(臣屬)으로 되어 있다.-『일주서(逸周書)』
【<관자(管子)>
중원 일대에서 진공(晉公)을 구하고, 적왕(狄王)을 사로 잡아 구금하고, 호맥(胡貉)을 패퇴시키고, 북쪽으로 산융(山戎)을 쳐서, 영지(泠地)를 제압하고, 고죽(孤竹)의 군주를 베니, 구이(九夷)가 비로소 명령을 따랐다.
일주서(逸周書)에 발(發)이라는 것은 록(鹿), 즉 사슴이 질주하는 형상을 의미한다. 또한 양주(揚州)와 발인(發人)은 양이(良夷)라 하였다. 또한 “성주(成周)의 회합에서 서면(西面)한 자는 정북방의 예인(穢人) 전아(前兒)인데, 전아는 원숭이와 같이 생겼다.”라고 하여 양이를 예(穢)족으로 기술 하였다. 관자에서 말하는 구이(九夷)의 중심에는 양이, 즉 조선이 있었다.
이렇듯 춘추전국시대 초기에 중국 북쪽과 동쪽에 거주하는 종족들을 통칭해서 구이라고 정의 하였다.
그러나 왕충이 언급한 북이는 춘추전국시대 구이라는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개념이 등장한 것은 한(漢)나라 시기일 것이다. 진서(晉書)에서는 진나라에 의해 선비도독으로 봉해진 모용외에 대해 “웅(熊)씨의 후손인 그의 선조는 대대로 북이(北夷)에 살았으며 동호(東胡)라고 했다.”고 되어 있다. 이를 보면 북이는 동호라는 것을 알수가 있다. 따라서 왕충이 말하는 북이는 기원전 2세기경 흉노 묵특에게 격파되어 북동쪽으로 이동한 동호 무리중 하나일 것이다.
사마천이 인식하는 부여와 왕충이 말하는 부여의 기원이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부여에 대한 한(漢)나라 사가들의 공통된 생각은 흉노와 같이 오랑캐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가들의 사고방식이 부여를 역사기록에 수록하지 않았던 이유 이기도 하다.
중국인들이 부여를 어떻게 생각 하였든 예맥과 조선의 북쪽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위만이 기씨조선을 무너뜨리고 왕이 되었을때, 일부 예맥족들을 복속시킨 경우는 있었으나 부여와 어떠한 접촉이 있었는지 기록에 없다. 이후 한무제에 의해 우거조선이 멸망하고, 그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 되었다. 기본적으로 한사군은 우거조선의 영토내에 설치하였다고 보여지는데, 이들 군현내 토착인 군장(君長)을 현후(縣侯)로 불러 주었다는 것은 한나라가 사군을 완전 장악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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